21일 2026 아이치·나고야 APG 여자 도로경기(스포츠등급 B)를 마치고 결승선을 통과하는 파일럿 김채연과 선수 박현미. 사진=공동취재단
"저는 자전거를 탈 때 좋았던 기억밖에 없어요."
자전거를 타다가 사고로 장애를 얻었다. 하지만 다시 자전거를 타면서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돼 아시아 정상에 우뚝 섰다. 생애 첫 아시안패러게임(APG)에서 2관왕에 오른 박현미(41·경기도장애인사이클연맹)의 이야기다.
박현미는 파일럿 김채연(22·경기도장애인사이클연맹)과 함께 2026 아이치·나고야 APG에서 금메달 2개(트랙 여자 4000m 개인추발, 1000m 독주·이상 스포츠등급 B)를 수확했다. 특히 1000m 독주에선 막판 스퍼트를 펼쳐 0.095초 차 금메달을 수확했다. APG 첫 대회에서 거둔 쾌거였다.
21일 일본 시즈오카현 이즈시 이즈 사이클 스포츠센터 도로 코스에서 열린 여자 도로경기(스포츠등급 B)에선 36분23초95로 5위에 올랐다. 주 종목인 트랙과 달리 도로경기 경험이 많지 않은 두 사람은 이날 비바람 속에서 경기를 치렀다.
21일 2026 아이치·나고야 APG 여자 도로경기(스포츠등급 B)를 마치고 결승선을 통과하는 파일럿 김채연과 선수 박현미. 사진=공동취재단
경기 후 만난 박현미는 "우리는 도로는 거의 안 타고 트랙 위주로만 훈련한다. 비바람까지 불어서 많이 위험했던 것 같다"라면서도 "그냥 (김)채연이만 믿고 탔다. 트랙에서도, 도로에서도 채연이만 믿고 탔는데 결과가 너무 좋아서 감개무량하다"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 사이클은 탠덤(2인승) 자전거로 승부를 겨룬다. 비장애인인 파일럿 김채연이 앞자리에서 핸들을 잡고 주행 방향과 페이스를 조절하면, 시각장애인인 박현미가 뒷자리에서 함께 페달을 밟으며 추진력을 더한다.
박현미에게 이번 2관왕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32세 때 자전거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그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아시아 정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박현미는 사고 전 자전거 동호인으로 활동했다. 자전거를 탄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필리핀 세부로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가 차량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정상에 올라 경치를 감상한 뒤 내리막길을 내려오던 순간이었다.
그는 "세부에서 정상에 올라가 '와, 좋다'고 생각하고 내려올 때 사고가 났다. 그런데 내려오는 순간부터는 기억을 잃었다"라며 "사실 사고를 당했던 기억은 없고, 자전거를 타면서 좋았던 기억만 남아 있었다"고 돌아봤다.
21일 2026 아이치·나고야 APG 여자 도로경기(스포츠등급 B)를 마치고 결승선을 통과하는 파일럿 김채연과 선수 박현미. 사진=공동취재단
사고 이후 재활 과정은 힘겨웠다. 장애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일상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다시 삶의 활력을 찾아준 것은 자신에게 아픔을 안겼던 자전거였다.
박현미는 "어머니는 절대 자전거를 타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남동생이 실내 사이클을 한번 타보라고 권유했다"라며 "매일 울고 힘들어하던 제가 자전거를 타면서 웃고 있다고 하더라. 이후 동생이 실내 사이클을 탈 수 있도록 도와줬고, 다시 자전거의 재미를 느끼면서 더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다시 자전거에 오른 박현미는 장애인 사이클의 세계를 알게 돼 입문해 국가대표까지 됐고, 처음으로 출전한 APG에서 파일럿 김채연과 함께 2관왕을 달성했다.
두 선수의 인연도 특별하다. 비장애인 파일럿 김채연이 앞에서 핸들을 잡고 주행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면, 시각장애인 박현미가 뒤에서 함께 페달을 밟는 방식이다. 두 사람은 약 2년 전부터 호흡을 맞췄다.
박현미-김채연 조. 사진=대한장애인체육회
박현미는 "채연이가 정말 예의가 바르다. 경기 중에도 '언니, 여기서 힘을 주세요', '언니, 올려야 돼요'라고 존댓말을 쓴다"라며 웃었다. 이어 "그냥 욕을 해도 괜찮다고 하는데도 계속 존댓말을 한다. 나는 그저 채연이가 하라는 대로 하려고 노력한다. 그냥 채연이만 믿으면 된다"고 말했다.
김채연은 사이클 주니어 세계챔피언에 올랐던 능력 있는 사이클 선수다. 지난 2022년 울산에서 열린 전국체전에선 고등부 5관왕에 오르기도 했다. 김채연은 "현미 언니가 이전에 다른 파트너와 활동했는데, 그 파트너가 그만두면서 제의를 받았고 내가 수락하면서 함께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쩌다 보니 이렇게 계속 사이클을 타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세계 무대를 누비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박현미가 금메달을 따고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여섯 살 쌍둥이 남매 서승우·서승혜였다. 그는 "쌍둥이들은 다른 색깔 인형이면 싸운다. 그런데 채연이가 똑같은 색깔 금메달을 딱 두 개 따줘서 정말 고맙다"라며 활짝 웃었다.
박현미-김채연. 사진=대한장애인체육회 제공
두 아이는 엄마가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신기해하면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응원한다. 박현미는 "아직 아이들에게 장애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엄마, 자전거 혼자 타는 것도 힘든데 왜 둘이 타?'라고 묻더라"라며 "그러면서 자기들도 둘이 자전거를 타고 코너를 도는 모습을 흉내 낸 응원 영상을 보내줬다. 그런 모습이 정말 큰 힘이 됐다"고 전했다.
자전거로 아픔을 겪었지만 자전거를 통해 다시 웃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은 금메달까지 수확했다. 박현미는 "다시 자전거를 타면서 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며 미소 지었다. 그의 금빛 질주가 더욱 특별한 이유다.
한편, 같은 날 남자 도로경기(스포츠등급B)에 출전한 김정빈(35)과 파일럿 윤중헌(35·이상 경기도장애인사이클연맹) 조는 경기 도중 낙차 사고로 완주하지 못했다. 지난 19일 사이클 트랙 남자 개인추발 결승에서 대회 신기록(4분26초01)으로 우승한 두 선수는 이날 대회 2관왕을 노렸지만, 첫 바퀴를 2위로 통과한 뒤 두 번째 바퀴 코너에서 비바람에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부상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