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BL 드라마 ‘투게더: 더 시리즈’ 캡처 태국발 동성 로맨스 드라마가 아시아 대중문화 시장의 판도를 흔들고 있다. 엄격한 규제 속에서도 탄탄한 수요를 유지하는 중국과 마니아층이 확산 중인 한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팬덤을 빠르게 흡수하는 모습이다.
미국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보도를 통해 태국의 BL(보이즈 러브)과 GL(걸즈 러브) 드라마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서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고 집중 조명했다. 할리우드나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들이 여전히 성소수자 서사를 실험적인 단계로 다루는 것과 달리, 태국은 이를 이미 거대한 규모의 주류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정착시켰다. 현재 태국은 연간 약 100편에 달하는 동성 로맨스 작품을 쏟아내며 아시아 전체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문화 수출국으로 자리 잡았다.
흥행의 배경에는 태국 특유의 독특한 산업 구조와 정부의 지원이 자리 잡고 있다. 태국 문화부는 동성 로맨스 콘텐츠를 주요 문화 수출 동력으로 지정하고 해외 홍보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제작사들 역시 영리한 사업 모델을 구축했다. 작품이 흥행하면 출연 배우들을 하나의 팀으로 묶어 새로운 작품에 연이어 투입하고, 팬미팅과 브랜드 행사로 수익을 올리는 팬덤 중심의 시스템이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태국발 콘텐츠에 가장 큰 수요를 보이는 곳은 단연 중국이다. 현재 중국 당국은 관련 콘텐츠에 대해 공식적인 승인은 물론 홍보 활동까지 전면 금지하는 엄격한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현지 팬들은 우회 접속하는 방식으로 태국 플랫폼에 접근해 콘텐츠를 소비한다. 실제로 웨이보나 도우인 등 중국 내 주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태국 배우 관련 쇼츠와 편집 영상들이 꾸준히 생산되고 있으며, 콘텐츠를 통해 정서적 대리 만족을 얻으려는 중국 시청자들의 소비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열풍은 한국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과거 태국 드라마 최초로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투게더: 더 시리즈’를 기점으로 한국에서도 탄탄한 마니아층이 형성됐다. 최근에는 태국의 인기 배우들이 연이어 한국을 방문해 단독 팬미팅을 개최하고 있으며, 매진 행렬을 기록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과거 한국 웹툰이나 드라마를 소비하던 국내 팬들이 이제는 거꾸로 태국 콘텐츠의 독특한 감성에 매료돼 소비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 전문가들은 태국 동성 로맨스가 이처럼 국경과 규제를 넘어 글로벌 팬덤을 사로잡은 원인을 태국 사회의 높은 수용성과 콘텐츠의 체급 차이에서 찾는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최대 시장인 중국에 대해 “중국은 워낙 인구가 많기 때문에 전체 인구 중 해당 장르를 찾는 시청자의 비율이 일부에 불과하더라도 절대적인 수와 잠재 수요는 매우 두텁다”며 “내부에 자체 콘텐츠가 없다 보니 그 수요의 공백을 태국 콘텐츠가 채우고 있는 것”이라고 짚었다.
황 평론가는 태국 콘텐츠가 가진 경쟁력으로 ‘작품 안팎을 관통하는 자유로움’을 꼽았다. 그는 “태국은 드라마 속 세상뿐만 아니라 실제 사회 전반에서도 동성 로맨스에 대해 허용적이고 억압이 적다”며 “이미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사회적 배경 덕분에 작품 속에서도 사회적 시선이나 현실의 압박에 얽매이지 않고 로맨스와 해피엔딩을 온전히 그려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콘텐츠의 규모와 장르에도 영향을 미쳤다. 황 평론가는 “한국을 비롯한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는 사회적 억압과 제약이 작품 속에도 반영되기 쉽고, 이를 피하려다 보니 학원물이나 캠퍼스 로맨스 같은 숏폼과 단편 위주의 작은 규모로 제작되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태국은 소재와 장르에 한계가 없어 오피스, 메디컬, 시대극, 누아르 등 회당 45분이 넘는 10부작 이상의 장편 드라마에 대규모 자본을 투자하고, 대형 히트작을 생산해낼 수 있다”며 “한국을 포함한 해외 시청자들 역시 자국 콘텐츠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자유롭고 행복한 서사를 태국 작품을 통해 즐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태국 최초의 트랜스젠더 국회의원이자 감독인 탄와린 수카피시트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태국의 콘텐츠가 규제가 심한 국가의 사람들에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다’는 위로를 주는 오아시스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사회적 억압에서 자유로운 서사와 이를 뒷받침하는 제작 규모가 맞물리면서, 태국 동성 로맨스는 규제 국가의 수요까지 끌어안는 아시아의 주류 콘텐츠로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