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세계에서 ➃ 용서는 다정한 모습으로 (1)
박지효 기자
4. 용서는 다정한 모습으로
[이제부터 시험을 시작합니다. 전자 패드에 손을 올리면 문제가 표출됩니다.]
딱딱한 기계음이 귓전을 울렸다. 지시대로 은색 패드에 올린 왼손에 금속 특유의 한기가 전해져 왔다. 푸른빛과 함께 떠오른 온갖 화학식들이 잠시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전자껍질을 돌고 있을 그 전자는 어느 오비탈로 가고 싶었을까. 나는 잘 훈련된 손짓으로 문제들을 풀어 나가며 실없는 생각을 했다. 마땅히 느껴졌어야 할, 목을 조여오는 듯한 긴장이, 벗어나고 싶은 그 충동들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다. 그래, 떠날 세계에 겁을 먹는 것만큼 미련한 행동은 없지 않은가.
이제는 말할 수 있었다. 속에 품고 있던 것들은, 사실 누군가의 아주 작은 자극으로도 밖으로 뛰쳐나올 만큼 포화 상태에 있었노라고. 나의 울림은, 실은 세계 속의 것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것이다.
수용과 결정의 언저리에 서서, 남은 시험 기간을 일종의 과도기에 잠긴 상태로 보내는 동안, 또 하나의 계절이 작품을 고했다. 가장 뜨거워야 했던 여름이 차갑게 식어버린 채로, 가을은 별다른 변화도 없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학교 주위에 심긴 나무들은 대부분 상록수였으므로, 가을이 찾아와도 낙엽 지는 나무들이나 열매들이 영그는 것은 볼 수 없었다. 문헌 자료들로 그런 게 있었구나, 막연히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가변적이었던 자연을 통제할 수 없던 인간은, 자연에게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변화하는 계절에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버티는 법을 가르쳤다.
그 결과가 불안정한 다양성을 소거시켰고, 강한 것들은 살아남았으며 그 가르침에 적응하지 못한 약한 개체들은 도태되었다. 강한 것들이 또 다양성을 자아내, 지금의 생태계는 이전보다 훨씬 더 단단하다. 인간의 세계나 자연의 세계가, 적자 생존의 개념이 적용된다는 건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계절의 흐름을 아주 미약하게나마 짐작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잔인한 풍경들 속에 있었다. 옅은 추위 속에는 짙은 불안에 허우적대는 아이들 하며, 건강은 아예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아이들 하며, 아예 답이 보이지 않아 한결처럼 졸업 시험에 매진하겠다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여전히 그 속에 있었고, 아이들을 지배한 어떤 것처럼 끌려가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더이상 세계의 것들은 내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이제는 끌려가지 않았다. 여전히 표면적인 모범생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속에는 아주 다른 것들을 품은 채 변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한 개체들로 굳어져 버린 숲에서는 낙엽이 지지 않으니, 차라리 내 나뭇가지에서 낙엽들을 떨어트리고자 했다.
길을 틀어버릴 때는, 아주 강렬하게. 길게 뻗지도 못한 가지에, 그 어떤 미련의 이파리도 남겨두지 않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그것이 미칠 듯이 불안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붉은 토양 같은 향내를 풍겨 마음을 끌기도 했다.
나는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내 길을 확신했지만, 그 독기들이 주춤한 것이 딱 한 순간 있었다. 나를 잠시 멈칫하게 한 건 시험을 삼 일 남겨둔 시점에 온, 고향에 있는 형의 편지였다.
… 시험이 얼마 안 남았다더구나.
마지막 시험이니 더욱 열심히 준비했겠지?
여태껏 해온 것처럼 잘 하리라 믿는다.
정갈한 필기체로 메시지창에 떠오른 편지는 저번 달과 거의 같은 분량이었다. 형에게선 항상 메시지와 함께 손편지가 왔지만, 이번에는 손편지 없이 간단한 메시지만 도착해 있었다. 항상 두 곳 모두에 같은 내용을 적으면서, 왜 나눠 보내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담백한 어조로 간단히 안부를 묻고는, 시험에 대한 것을 묻는 건조한 말들. 유일한 혈육에게 오는 편지는 매달 놀라울 정도로 같은 내용이었다.
이제는 으레 떠오르는 죄책감이나 일종의 원망 외에, 형에 대한 감정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형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받았을 때는 그래도 편지를 보고 더욱 이를 갈고 공부에 집중 했었는데, 이번에 받은 편지로 확신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다는 것을.
형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다른 방법으로 죄를 갚아나가기를 택했다. 나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그 담백한 편지를 메시지 보관함에 숨겼다.
가고자 하는 길이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끌려가지 않고 나를 고수하다 보면, 언젠가 이정표가 보일 거라고 확신했다. 여로에게도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는 타인의 확인이 필요한 게 아니라, 내 길에 대한 나의 결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로 다가온 것은, 일주일간 이어진 시험의 마지막 날인 지금이었다. 상황이 의지가 향하는 곳으로 길을 터주기라도 한 듯, 나는 가장 강렬한 충동을 벗어나지 않고 몸을 맡겼다.
삑.
삑,
삑.
얼마나 지났을까. 일정한 기계음이 세 번 십 초 간격으로 연달아 울렸다. 마지막 음이 끝남과 동시에 파란색 화면에서 글자들이 사라진다.
한 번 울렸을 때 내려놓으면 감점 없음. 두 번 울렸을 때 내려놓으면 상황을 살펴 감점, 세 번 울렸을 때 내려놓으면 실격 처리. 센서가 있기에 어떻게 속일 수도 없다. 시험이 끝나면 다시 문제를 보지 못했으므로, 마지막으로 자신을 평가해 보라는 의미였다. 그 간극에 오류를 알아채도 수정하지 못하니, 꽤 잔인한 방식이긴 하다.
안전하게 첫 번째 알림에 시험용 두꺼운 펜을 화면 위에 내려놓은 나는 맥이 탁 풀리는 기분에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하며 침음성을 뱉는 주변의 반응에 비해서는 가벼운 편이다.
세 번의 알림음이 모두 울리고 나자 태블릿 창에 답안 제출 버튼이 떴다. 나는 습관화된 몸짓으로 버튼을 누르고는, 그대로 공중에서 손을 멈췄다. 의례적인 절차였다. 정말 입력한 것들이 내 지식의 집체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증명해, 어떤 종류의 변명도 없애기 위한.
모든 게 끝났다. 그 생각을 하자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까지의 시험을 꽤 훌륭한 성적으로 끝마쳤다. 그것은 내 표면의 일부였고, 다른 방법을 모르는 이상 그것을 함부로 깨고 나올 수는 없었다.
이젠 이 점수로 상급 학교에 지원을 하게 될 것이고… 인생의 활로가 결정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제출 버튼을 누른 것을 후회했다. 모두 끝난 이 시험 자체를 부정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비이성적인 생각. 나는 이미 그것을 몇 번 겪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 가는 대로의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냥 뭐랄까. 짜증이 났다. 제출 버튼을 누르며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절망 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 주변의 아이들이. 나도 그 아이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과, 어쩌면 세계 자체가.
아, 지금이구나.
떠나야 할 순간은.
나는 조금은 텅 빈 표정으로, 꺼진 태블릿 화면에 비친 검은 눈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미 시험을 준비할 때부터 짐작하던 일인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모든 것을 이뤄내고 난 후에, 그것을 저버리기를 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시험을 준비하면서 막연히 생각해 왔다. 상급 학교에 간다고 해도 더한 세계에 뛰어드는 것일 뿐, 내 심장은 여전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 나는 이미 이 세계가 온전한 나의 속죄냐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은 지 오래였다. 한 번 균열이 간 세계에 삶을 맡기는 건 오히려 더 위험한 일인지도 모른다.
속죄에도 다양한 방식이 있다. 다른 길로의 속죄를 하나 찾아냈으니, 더이상 죄악감으로 망설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제출 버튼을 누른 아이들이 하나둘 시험장을 빠져나가는 게 들린다. 나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낯으로, 그저 시험을 적당히 끝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박을 온전히 벗어던진 심장이 낮은 고동으로 쿵쿵 뛴다.
그것은 차라리 환희의 감정이었다.
“여로야.”
세계를 빠져나오기로 한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놀랄 것도 없이 옆 시험장에서 시험을 본 여로였다. 그가 제각각의 감정에 허우적대는 애들 무리 속에서 평온한 낯으로 시험장을 나오자마자,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향했다. 내 얼굴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다만 확실한 건… 그게 비탄이나 후회에 물든 것은 아니었을 거다.
“나 상급 학교에 지원하지 않을 거야.”
날숨처럼 내뱉은 말에 여로의 시선이 뭉근히 나를 향했다.
“시험은 괜찮게 봤어. 다만, 이걸로 내 삶을 결정하고 싶진 않아. 내 의지야. 후회는 없을 거고.”
이제는 여로가 무엇을 물을지 짐작이 되었다. 나는 그것을 선수를 쳐 말해주면서, 가만히 여로의 답을 기다렸다. 어떤 반응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다만,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이제 세계에 얽매인 몸은 아니라고.
“후회는, 없을 거라고? 일말의 것도?”
여로는 그저 낮게 내 말을 되물을 뿐이었다. 그는 제출하지 않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확신에 찬 얼굴을 자신 있게 띄워내며.
“응. 더이상 여기 있기 싫어. 길을 바꾸려면, 그 정도의 각오는 필요하잖아. 그걸 보였을 뿐이야.”
“… 솔직히 조금 놀랐어. 언젠가 빠져나오리란 걸 알고는 있었는데, 그게 지금일 줄이야.”
무슨 동기가 있었던 거야? 알 수 없는 감정이 서린 그의 물음에 나는 잠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부터 생각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언어로 뱉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미친 듯이 공부하면서 이뤄낸 것들이 기쁘지 않았어. 시험이 끝났을 때 탈력감이, 그 공허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아니까,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어.”
나는 시험을 치는 내내 싸웠던 공허를 떠올렸다. 그것은 어쩌면 불안보다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를 저버리고 나니, 모든 게 괜찮아지는 것이다. 그럼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잠시 진의를 파악하듯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본 여로는, 이따금 보여주었던 조용한 미소로 내게 응수했다. 아니, 지금 그가 보여주는 감정은… 환희에 가까운 것이었다. 익숙한 표정이었으나, 기저에 있는 낮은 감정들이 보였다.
“광야에 온 걸 환영해.”
그의 손이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정제되지 않은 몸짓이, 그 질서 없는 것이 이제는, 나를 안정시킨다. 내 길을 찾아 빠져나온 초행길, 그곳에 온 걸 환영해 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래, 가장 먼저 어디로 가고 싶어?”
내게 곧은 시선을 맞춘 여로가 물었다. 나는 그 순간 여로와 동등하게 시선을 맞대고 있음을 깨달았다. 방랑자 하나. 내가 다른 길로 접어든 순간, 나는 여로의 뒤를 따라가는 초심자가 아니게 된 것이다.
“청산해야지. 과거를.”
이제부터는, 내 길을 온전히 내가 개척해야 했다. 그 불안하면서 조금은 두려운 길이 어찌나 달콤하게 느껴지는지. 나는 크게 숨을 한 번 내쉬고 왼쪽 관자놀이 부근을 툭툭 쳤다. 얇은 살 아래 느껴지는, 이질적인 딱딱한 감촉. 날 지배하고 있던 것들을 가장 먼저 벗어 던지고 싶었다.
나는 그 충동을 확인한 순간, 여로의 시선을 다시 확인하지도 않은 채, 기숙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급히 뛰어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시선과 스쳤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하나의 목표에 눈이 멀어 있을 뿐이었다. 기숙사에 들어와 가장 먼저 찾은 건 고이 보관해 둔 깨진 비커 조각이었다. 언젠가 학교 주변 정원에서 채집한 과일을 씻다가 비커를 깬 적이 있었는데, 비품 훼손으로 포인트를 잃을까 우려되어 버리는 천으로 싸서 숨겨둔 것이었다. 비커는 개인 지급품이지만, 학교에서 관리하는 품목에 해당했으므로, 실수로 망가트리기라도 하면 귀찮은 구석이 있다.
날카로운 그것을 손에 들자 뛰어오면서 잠시 고요해진 심장이 다시금 낮게 뛰기 시작했다. 온통 하얀색으로 도배 되어있는 기숙사 안에서, 나는 거친 호흡을 고르며 세면대를 짚었다. 흥분감이 진정된 자리엔 고요한 침착이 남았고, 그것은 오히려 이 길을 확신할 수 있게 해주었다.
후우. 나는 옅게 한숨을 내쉬고, 유리 속의 나를 유리하지 않은 채 똑바로 마주했다. 그래, 진짜 미친 짓을 하나 할 것이다. 그것은 침착해진 가슴으로 수행해도 후회하지 않을 일이었다.
나는 간단한 손짓으로 포인트 창을 불러냈다. 상위 5% 안에 드는 포인트 척도가 마치 공치사를 내리는 듯했으나, 그것은 아주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푸른빛에 정신이 빼앗기려는 것을 애써 다잡고, 고요한 눈으로 깨진 비커 조각을 천천히 관자놀이에 가져다 댔다.
푹. 날카로운 조각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소리는, 너무나 작아서 오로지 나에게만 들렸다. 칩 자체는 아주 옅게 박혀 있다. 굳이 크게 상처를 내지 않아도, 피부 안으로만 들어가면, 나를 지배하던 이것을 깨버릴 수 있다.
거울 안으로 붉은 피가 볼을 따라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고작 한 줄기의 피인데도 흘러내리는 감촉은 선연했고, 피를 흘린다는 것을 인지하자 위기를 느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 극심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흥분감에 도취 되어있지도,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있지도 않았다. 아주 맑은 정신으로도 별다른 아픔을 느끼지 못한 건, 날카로운 조각이 피부를 뚫는 고통보다는 더 공정하고 나은 삶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 칩으로 인해 고통받은 시간이 더욱 길기 때문일 터였다.
시야에 보이는 포인트 창이 점차 맥을 놓고 흐려지기 시작한다. 인체에 해를 입히지 않도록 절연체를 사용해 만들었기에 망정이지, 파란 창이 마구 일렁이는 모습은 그 자체로 파지직 소리를 낼 것 같았다.
그리고, 흘러내린 붉은 액체들이 쇄골 부분까지 내려와 푸른 교복을 물들이기 시작할 때쯤. 그 파란 창은 아무런 소리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원래 그 자리에 없었던 것 마냥, 아무런 흔적도 없이…
“… 하.”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비커 조각을 세면대에 던졌다. 쨍그랑, 소리가 미친 상황을 직시하게 해준다. 성공했다. 나를 얽매고 지배하고 옥죄이던 것에서… 이제는 해방될 수 있었다.
탈력감과 안도감. 이제는 쇠사슬에서 풀려났다는 해방감… 어떤 감정들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비단 서늘한 감정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붉게 물든 손이 입을 틀어막자 온 얼굴이 붉은빛으로 뒤덮였다. 알싸한 고통이 뒤늦게 나를 덮쳤고, 그 고통에 겨우 정신을 차려 피가 흐르는 부위를 천으로 지혈했다.
꽤 오랜만에 들여다본 검은색 눈동자는 붉다. 붉은 것들이 오히려 눈에 담긴 공허를 가려주는 듯해서 되려 마음에 들었다. 나는 내 텅 빈 눈동자를 도무지 사랑할 수가 없었으니까. 천천히 그 속으로 손을 뻗은 나는, 차가운 거울의 감촉을 느끼며 눈이 있는 부분을 그저 가만히 쓸었다.
나는 검은 눈을 한 나에게 작별을 고했다. 많이도 지난 했었다. 눈 속에서 빛이 사라질 때까진. 그리고, 새로운 곳에 눈을 뜨기까지는.
삐빅-
그때, 잠금을 해제하는 알림음과 함께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문이 인식되었다는 기계적인 음성이 따르는 것이, 돌아보지 않아도 인기척의 주인이 여로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여명, … … 너…”
방에 들어온 여로가 피투성이가 된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설마.”
“있잖아, 난 아무리 생각해도 푸른색보다는 붉은색이 나은 것 같아.”
놀라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 부러 밝게 미소 짓는다. 평온한 얼굴과는 다르게 여전히 심장이 거세게 뛰었지만, 나는 정말 괜찮았다. 후련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여로가 저런 표정을 지을 것도 없었다. 내 모습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여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피를 보여서 놀란 걸까. 상처를 스스로 내서 놀란 걸까. 어느 쪽이든, 나를 걱정하는 듯 보이는 여로에게 괜찮다고 얘기해줘야 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무시하고 다시 입을 열고자 하는데, 행동은 여로가 조금 더 빨랐다.
성큼성큼 내게 다가온 여로가 비커를 감싸던 천을 집어 들어 지혈하는 내 손 위를 강하게 덮었다. 인지하지 못했는데, 손을 내리니 이미 빨갛게 물들어 있는 천이 보였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피가 많이 흐른 모양이다.
“… 무슨 짓이야. 세계를 빠져나간다는 게…”
“알고 있었잖아. 이건 네가 알려준 게 아니라 내 길이야. 그 길에 지배자를 남겨두고 싶지 않았어.”
내 관자놀이를 강하게 누르는 여로의 온기를 느끼며,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시야가 돌아오는 속도가 조금 느리다. 피를 흘렸기 때문만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일에 몸이 조금 놀란 것 같기도 했다. 스스로 저지른 일에도 스스로 놀랄 수 있었다.
그런 효과를 어느 정도 기대하고 벌인 일이기도 했다. 여로에게 말한 것처럼, 평생 나를 지배하고 있던 것을 떨쳐내기 위해선, 이 정도의 시각적 강렬함이 필요할 터였으니까.
그걸 모르지도 않을 텐데, 여로는 내 여상한 말에 곧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법한 말에도, 그는 여전히 내 눈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보였다. 종종 세계를 논할 때 볼 수 있었던, 슬픈 바다의 물기. 그 축축한 내음이 눈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붉은 노을이 바다를 물들이는 순간, 바다는 깊은 슬픔에 잠겨버리고 말았다. 파도도 치지 않고, 풍랑에 물결이 흔들리지도 않았지만, 아주 고요한 슬픔이기에 더욱 짙은 것.
여로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실질적으로 드러내는 그의 감정이, 낯설어야 하는데 어딘가 익숙하다.
… 아니, 이게 아닌데. 나는 여로의 눈물에 놀라 순간적으로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왜 상처를 낸 것도 나고, 벗어나기를 택한 것도 난데, 그가 눈물을 흘리는 거지?
“… 넌, 그 애와 너무 닮았어.”
감정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어 가만히 그의 어깨만을 토닥이고 있는데, 그는 지혈하는 손의 반대쪽 손을 들어 피가 흘러가 남은 자욱이 있는 볼을 쓸었다. 차마 담담하지 못한 목소리와 함께.
“… 너는 나와 닮았어. 나는 그 애를 찾아 구원하고자 했고, 내가 구원한 그 애를 닮아가고자 했어. 그 애는 옳지 못하고 판단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처 입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거든. 지금 너처럼.”
여로는 훌륭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타인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누군가를 나에게 투영하지 않았다. 그리움이라는 것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인데, 여로의 시선은 온전히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처를 누르는 여로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가 그토록 감정적인 상태라는 것이 그 압력에서부터 전해져 들어왔다. 그 애라는 자는, 여로가 그리도 애틋하게 부르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여로는 한 번도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개인사는 충분히 역린일 수 있는 부분이다. 함부로 물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직접적으로 묻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여로를 닮았고, 여로는 그 애를 닮아가고자 한다면, 그 애도 나와 닮아 있었던 거냐고.
“… 그 애도 갇혀 있어? 그래서 네가 구원해야 한다는 거야?”
“지금은 아닐지도 몰라. 그냥, 그 애도 붉은색을 좋아했었든. 특히 붉은 토양을…”
여로가 슬픈 눈빛을 한 채 어떤 행복한 과거를 떠올리듯 웃었다. 그는 과거의 어딘가로부터 여행을 떠나온 것 같았다. 다시 출발지로 돌아갈 수는 없는, 조금 슬픈 여행.
나는 그저, 그 슬픈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정 원하신다면, 저도 큰맘 먹고 여기 남아 친구가 되어드리지요.*”
(파우스트, 괴테.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장면.*)
과장된 몸짓으로 유혹하듯 팔을 치켜들자 여로의 시선이 살짝 놀라움을 담아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멈추지 않고 머릿속에 떠도는 다른 구절들을 내뱉었다. 눌러두었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끄집어내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황홀한 흐름이었다.
“… 우리의 피비가 계속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 나는 빌어먹을 고함을 지를 뻔했다, 나는 그럴 만큼 젠장 행복한 기분이었다.**”
(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
저 슬픈 눈을 억지로 위로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보여주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세계를 박차고 나온 건, 그 세계 밖에도 온갖 달콤한 것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고. 그리고 그걸 알게 해준 것이 당신이 알게 해주었다고. 여로의 ‘그 애’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름 모를 그 애도, 너의 구원이 닿았다면, 이것들을 찬미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고, 태어나려는 자는 알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데미안, 헤르만 헤세***)
내 목소리 위로 여로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겹쳤다. 지혈을 위해 머리와 어깨를 어색하게 부여잡은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우리는 눈을 맞댄 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괴테, 샐린저, 헤세… 고전적인 명작이지. 넘긴 흔적이 있어서 보고 있다는 건 알았는데, 구절까지 외우고 있을 줄은 몰랐어.”
“이 빌어먹을 학교에서 배운 게 암기하는 기술밖에 없어서.”
암기는 컴퓨터를 시키면 되는데 말야. 홀든 콜필스****의 어투를 표방해 반항적으로 말하자, 여로는 원래의 그 미소로 호탕하게 웃었다. 눈에 서린 슬픔을 사라지게 해주진 못하겠지만, 문학은 내 이야기도 아닌 것들로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있다. 그 순간 나는, 문학으로 꽤 여러 가지의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여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나는 메피스토펠레스나 홀든이나 싱클레어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언어를 현실에 가져올 수는 있었으니까.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된 삶은 가혹한 현실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단단한 양장본에 얌전히 끼워져 있던 여로의 안내를 따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로는 학교 곳곳에 파멸 이전의 문학들을 숨겨두었다. 눈에 잘 띄진 않지만, 위치를 알고 간다면 충분히 발길이 닿을 수 있을 만한 곳에. 과학실에 있는 개인용 실험 물품 보관함에는 ‘파우스트’가, 이제는 잘 쓰이지 않는 체육 창고에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여로의 침대 맡에는 ‘데미안’이 있었다. 양장본을 읽고 난 후 세계 밖으로 끌린 마음이, 그것들을 갈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궤적을 좇으면서 나는 꽤 행복해했다. 웃고, 울었고, 비탄했고, 화를 냈다. 학교에서 정제하라고 가르친 그 날것의 것들은, 문학의 세계에서는 환영받고 존중받을 수 있었다.
“그럼 내 눈은 좀 별로인가? 내 눈도 푸른색인데.”
어느새 그 미소를 되찾은 여로가 장난기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확신이 깃들어 단단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눈은 푸르다기보다는 짙어. 그래서 마음에 들어.”
여로의 것은 떠오르면 긴장부터 되는 알림창을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 처음 봤을 때부터 시선이 끌린 그 눈동자는 청명한 바다의 것이었고, 깊은 심해의 것이었고, 어떨 땐 저 먼 우주를 담고 있기도 했다. 여로의 세계는 방대하다. 온갖 다채로운 빛을 담은 그것을 고작 좁아터진 시야 속에만 머무르게 하는 것은 분명한 죄악이었다.
“다행이네. 너한테 미움받는 건 그다지…”
“A-13, 잠깐… … 무슨…!”
여로가 무어라 말하던 그때, 열린 문틈으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곧 경악이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가장 먼저 날 찾은 이가 먼저였기에, 잠시 간과하고 있었다. 칩이 파손되면 가장 먼저 교무실에 알림이 간다는 걸.
순간 여로와 눈이 마주쳤고, 여로와 나는 동시에 픽 웃어 보였다. 시각적 강렬함을 보일 상대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박지효 기자 jihyop@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