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리/사진=ENA 배우 이혜리는 여전히 ‘덕선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불린다. 그 계기가 된 작품은 2015년 방송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다. 서울 쌍문동 골목에 사는 다섯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에서 이혜리는 밝고 털털하지만 속정 깊은 성덕선 역을 맡아 자신을 대표하는 필모그래피를 남겼다. 이처럼 일찌감치 만난 인생 배역은 대중에게 배우 이혜리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동시에, 이후 그의 모든 연기를 평가하는 기준이 됐다.
이혜리는 지난 13일 첫 방송된 ENA 월화드라마 ‘그대에게 드림’을 통해 다시 한번 그 오랜 이미지와 마주했다. ‘그대에게 드림’은 꿈을 이룬 천재 영화감독 우수빈(황인엽)과 꿈을 잊고 살아온 생계형 리포터 주이재가 15년 만에 재회하며 사랑과 꿈을 다시 써 내려가는 로맨틱 코미디다. 이혜리가 맡은 주이재는 영화감독을 꿈꾸며 달리던 10대를 지나 현실의 벽에 부딪힌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혜리는 설렘 가득한 눈빛과 차갑게 굳은 표정을 오가며 한 인물이 지나온 세월의 변화를 짚어냈다. 학창 시절의 주이재는 카메라로 세상을 담고 첫사랑의 말 한마디에 얼굴을 붉히는 소녀였다. 반면 성인이 된 주이재는 전국을 누비는 생계형 리포터로 살아가며 꿈을 이룬 우수빈과의 재회 앞에서도 반가움보다 냉소와 분노를 먼저 드러낸다. 이혜리/사진=ENA 주이재의 10대 시절에는 이혜리 특유의 밝고 생활감 넘치는 연기가 빛을 발한다. 상대와 툭툭 말을 주고받는 대사 처리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은 인물의 풋풋함을 고스란히 살려낸다. 성인이 된 뒤에는 꿈을 접은 뒤의 허탈함, 첫사랑을 향한 원망, 오랜 시간 쌓아둔 서러움까지 섬세하게 표현하며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사실 격한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는 그동안 이혜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였다. 2015년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성덕선이 삼남매 중 둘째로서 차별받아 온 설움을 폭발시키는 장면은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이후 그가 화를 내거나 억울함을 토로하는 장면마다 덕선이가 겹쳐 보인다는 평이 이어졌다.
지난 2021년 tvN 드라마 ‘간 떨어지는 동거’에서 이담 역을 맡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웹툰 원작 속 캐릭터는 시크하고 담담한 성격인 반면, 드라마 속 이혜리의 연기는 톤이 다소 높고 감정 표현이 과해 덕선이의 모습이 연상된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러한 우려를 덜어냈다. 주이재가 억울함을 토로하며 감정을 쏟아내는 장면 역시 이전보다 안정적으로 소화하며 오래 버텨온 인물의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이혜리는 인물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매력을 살리면서도 주이재가 지나온 시간과 현실의 무게를 차분하게 담아내고 있다.
유선동 감독 역시 이혜리에 대해 “주이재의 현실적인 고민과 이를 이겨내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모두 채워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배우”라며 깊은 신뢰를 드러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연기적 성장을 증명한 이혜리가 앞으로 주이재라는 새로운 인생 캐릭터를 어떻게 완성해 나갈 수 있을지 기대가 모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