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산업이 생성형 AI와 엔터테크의 거센 물결 속에서 제작 효율성의 극대화와 창작의 본질이라는 대전환점을 맞이했다. 음원 프로듀싱부터 버추얼 아이돌, 뮤직비디오 프로덕션에 이르기까지 기술 도입은 제작비를 크게 낮추고 자본 장벽을 허물며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생존 무기와 IP 확장성을 제공하고 있다. 본 기획 시리즈 [K팝과 AI 혁명]은 K팝 프로덕션의 세 가지 핵심 축인 작곡가 작업실, 버추얼 아이돌·팬덤, 뮤직비디오 제작 현장을 들여다보고 창작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기술이 허무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 속에서, 여전히 빛나는 인간 창작자의 가치와 K팝의 미래를 짚어본다.
사진제공=블래스트, KT지니뮤직
K팝 시장의 지형도가 변화하고 있다. 과거 기술 시연이나 비주류 문화에 머물던 버추얼 아티스트가 국내 주요 음원 차트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대형 음악 페스티벌 무대에 서는 일이 현실이 됐다.
실제 버추얼 보이그룹 플레이브는 지상파 음악방송 1위와 대형 아레나 단독 콘서트 매진을 기록했고, 걸그룹 이세계아이돌 역시 음원 차트에서 성과를 내며 강력한 팬덤과 수익성을 입증했다. 최근에는 이들을 발굴하고 조명하는 전용 시상식까지 등장하며 산업적 저변을 넓히는 추세다.
이처럼 버추얼 아이돌은 일회성 화제성을 넘어, K팝 산업에서 독립적인 팬덤과 시장성을 지닌 IP로 부상하고 있다.
◆‘음주운전·학폭·연애’…리스크 줄이는 아티스트
버추얼 아이돌의 가장 큰 무기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해외 활동의 편의성, 나이가 들지 않는 상징성, 그리고 리스크 관리다.
한 엔터사 관계자는 “실존 아이돌의 경우 학교 폭력, 사생활 스캔들, 음주운전 등 예측할 수 없는 휴먼 리스크로 인해 수십억 원의 투자금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버추얼 아이돌은 팬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사생활 스캔들 위험이 없어, 팬덤 입장에서도 안심하고 마음을 줄 수 있는 대안”이라고 말했다.
버추얼 아이돌은 이러한 불안 요소에서 완벽하게 자유롭다. 기술적 가상 세계관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아티스트는 음악과 콘텐츠, 팬들과의 소통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제공=카카오엔터테인먼트
◆웹툰·광고·글로벌 투어까지…한계 없는 ‘IP 확장성’
버추얼 아이돌의 가치는 단순한 음원 판매에 그치지 않는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가상 아티스트의 특성은 게임, 웹툰, 브랜드 광고까지 영역 제한 없는 ‘무한 IP 확장’을 가능하게 만든다.
실제 버추얼 그룹은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2차 콘텐츠로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2023년 연이어 선보인 이세계아이돌 웹툰 ‘마법소녀 이세계아이돌’과 ‘차원을 넘어 이세계아이돌’은 카카오웹툰·카카오페이지 합산 기준 각각 960만 회, 1100만 회가 넘는 누적 조회수를 기록했다.
IP 파워의 정점은 크라우드 펀딩에서 드러났다. ‘마법소녀 이세계아이돌’ 단행본·굿즈 펀딩이 42억 원, ‘차원을 넘어 이세계아이돌’ 펀딩이 88억 원을 끌어모으며 국내 크라우드 펀딩 역대 최고 모금액 1·2위를 싹쓸이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실존 아이돌 대비 강점에 대해서는 “버추얼 아이돌은 아티스트이자 캐릭터 형태를 갖추고 있어 스토리 확장에 유리하다”며 “별도의 캐릭터 구현 없이 기존 개성과 관계성을 유지하며 다양한 장르를 접목할 수 있다. 특히 팬들이 라이브에서 만나온 캐릭터가 그대로 웹툰 주인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콘텐츠 형식이 달라져도 캐릭터와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형 유통·패션 브랜드의 광고 모델로 발탁되는 사례도 잇따른다. 광고주들이 버추얼 아티스트를 선호하는 결정적 이유로는 단연 가성비와 ‘제작 효율성이 꼽힌다.
한 광고 마케팅 관계자는 “버추얼 아이돌은 실존 아이돌에 비해 모델료 단가가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톤 보정이나 리터칭 등 후반 작업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어 효율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실제로 현장에서 광고 문의가 늘고 있고, 기용 시 효과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며 “버추얼 아이돌뿐만 아니라 AI 기반 가상 모델의 활용도 함께 확산하는 추세인 만큼 광고 시장 내 영향력은 지속해서 확대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오위스. 사진제공=올마이애닉도츠
◆자본과 기술의 결합…핵심은 ‘사람의 온기’와 팬덤의 유대감
다만 현장 전문가들은 버추얼 아이돌의 성공적인 IP 확장과 지속성이 단순히 기술력이나 자본의 규모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기술은 거들 뿐, 핵심은 실존 아티스트와 다름없는 본체의 역량과 팬덤과의 깊은 유대감이라는 지적이다.
버추얼 걸그룹 오위스를 론칭한 올마이애닉도츠 김제이 대표는 최근 버추얼 그룹이 사랑받는 핵심 배경으로 “단순한 캐릭터를 넘어 아티스트와 팬으로서 진정한 관계를 맺으며 몰입을 유도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 대표는 “예전 가상 아티스트는 시각적 기술이 중심이라 신선함이 떨어지면 지속성이 부족했지만, 최근 버추얼 그룹은 수준 높은 음원·뮤직비디오와 함께 실시간 라이브 소통을 축적한다”며 “팬들은 단순 캐릭터 감상을 넘어 아티스트의 성격, 멤버 간 관계성, 성장 과정을 함께 경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기술력은 대중이 저관여 팬으로 진입하도록 돕는 문턱 역할을 하고, 가창력과 소통 능력이야말로 관심을 고관여 팬으로 확고히 전환시키는 진짜 힘”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