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고 시절 원태인(왼쪽)과 이건희. 원태인 제공 "태인아, 나 다시 야구 시작한다. 지켜봐줘."
근성이 강한 친구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두 차례의 신인 드래프트 낙방 후 불펜 포수로 야구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스물여섯의 나이에 현역 선수의 꿈을 다시 키우기엔 녹록지 않은 현실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포기하지 않았고, 기어코 일본프로야구(NPB)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이를 지켜본 '절친' 원태인(26·삼성 라이온즈)은 혀를 내둘렀다.
지난 14일, 한국 야구계에 깜짝 소식이 전해졌다. 이건희(26)가 NPB 명문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육성선수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었다. KBO리그 선수 경력 없이 NC 다이노스 훈련보조 직원(불펜 포수)으로 야구 현장을 지키던 그는 일본 독립리그를 거쳐 마침내 NPB 무대를 밟게 됐다. 경북고와 단국대 졸업 후 두 차례나 KBO리그 드래프트에서 고배를 마셨던 그는 돌고 돌아 마침내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그의 소셜미디어(SNS)에 많은 이의 축하 인사가 쏟아지던 중, 깜짝 손님이 댓글을 달았다. 바로 삼성의 '푸른 피 에이스' 원태인이었다. 두 사람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6년 동안 배터리 호흡을 맞췄던 절친한 사이. 최근까지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인연을 이어온 원태인은 친구의 낭보에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네며 앞길을 응원했다.
2015년 삼성기 우승을 차지한 뒤 얼싸안는 원태인과 이건희. 삼성 제공2015 삼성기 결승전 당시 이건희. 삼성 제공 지난 21일 본지와 만난 원태인은 이건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환하게 웃으며 "정말 기뻤다. (이)건희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아는 사이였다. '같은 중학교에서 같이 공 던지자'고 해서 중·고등학교 배터리를 맞췄다. 그랬던 친구가 이렇게 잘된 모습을 보니 엄청 놀랐고 기뻤다"라고 전했다.
그는 "최근 건희가 SNS에 '내일 큰 거 온다'고 써놔서 '나한테 먼저 얘기 좀 해줘'라고 했는데 끝까지 안 가르쳐 주더라. 알고 보니 그게 요미우리에 입단했다는 소식이었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진가 보다'라고 농담했더니 구단과 비밀은 꼭 지켜야 한다면서 미안해하더라. 그 정도로 친한 사이다"라고 덧붙였다.
원태인과 이건희는 원태인의 아버지인 원민구 감독이 이끌던 경복중에서 함께 성장했다. 2015년엔 제45회 대통령기 전국중학야구대회에서 전국대회 정상에 올랐다. 당시 경남중과의 결승전에서 선발 원태인은 4이닝 무실점 호투를 펼쳤고, 이건희는 승부를 가르는 결승타를 터뜨리며 3-1 승리를 이끌었다. 원태인은 이 대회 우수투수상을, 공수에서 맹활약한 이건희는 수훈상을 받았다. 이후 두 선수는 경북고에서도 찰떡 호흡을 맞췄다.
삼성 원태인(왼쪽)과 단국대 이건희. 원태인 제공 다만 고등학교 졸업 후 두 선수의 진로는 엇갈렸다. 원태인은 2019년 삼성의 1차 지명을 받고 프로 무대에 입성해 국가대표 투수로 자리 잡은 반면, 단국대로 진학해 4번 타자로 활약했던 이건희의 프로 입성 꿈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도 야구를 향한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이건희는 단국대 졸업 후 2023년 NC 다이노스 불펜 포수로 묵묵히 현장을 지켰고, 군 복무 중에는 일본어를 독학했다. 전역 후 일본으로 떠난 그는 올해 NPB 2군 리그(웨스턴 리그)에 참가하는 쿠후 하야테 벤처스 시즈오카에 입단, 30경기를 소화한 끝에 요미우리의 부름을 받았다.
원태인은 "정말 리스펙트(존경)한다. 혼자 '맨땅에 헤딩'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는 "(이)건희가 군대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 야구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독립리그는 월급도 적고 정말 힘든 길이라 반신반의했는데, 요미우리에 육성선수로 들어가는 걸 보고 진정한 '인간 승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지난 14일 이건희의 계약을 발표한 요미우리. 구단 SNS 캡처 또한 원태인은 "사실 내가 프로에 온 뒤 건희에게 장비도 많이 챙겨주며 돕기도 했지만, 최근엔 오히려 건희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시즌 전에 부상으로 일본 이지마 치료원에 갔을 때 건희의 일본 에이전트 측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라며 남다른 스토리를 소개하기도 했다.
친구가 바라본 이건희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일까. 원태인은 망설임 없이 '근성'을 꼽았다. 그는 "제가 본 야구선수 중 근성 하나만큼은 1등이다. 독기도 있고 자신감도 넘친다"며 "일본 팬들에게도 우리 (이)건희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다"고 애정 어린 당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