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1학년 겨울방학 때였습니다. 저를 비롯해 친구들은 심심했습니다. 당시 우리 젊은이들은 가난하여 관광지로 돌아다닐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친구 중에 광주 출신이 있었는데, 그 친구의 친척이 전남 신안에서 김 양식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겨울이면 일손이 많이 달린다고 했습니다. 교통비만 어떻게 마련하면 거기서 일을 도우면서 먹고 자고 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울에서 신안 김 양식장까지 먼먼 길이었습니다. 광주까지 기차로 가서 광주 친구의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맛있게 먹고, 다음날 신안까지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캄캄한 밤에 김 양식을 하는 마을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광주 친구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 양식은 도박이래. 김이 잘되면 큰돈을 벌고 안 되면 폭삭 망하고. 동네는 허름해 보여도 부자가 많아.”
그 당시에 김은 상당히 비쌌습니다. 설날에 김 한 톳이 선물로 들어오면 어머니는 “아이고, 이 귀한 것을 보내시고”를 열 번은 반복했습니다. 밥상에는 1인당 1장의 김이 놓였는데 가위로 버스 승차권만하게 잘라서 아껴 아껴 먹었습니다.
겨울 김 양식장은 일이 많았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배를 타고 김을 거두러 나갔습니다. 돌아와 아침 먹고 김발을 볏단 벽에 붙이고, 마르면 이를 거두었습니다. 해가 지면 저녁 먹고 김발에서 김을 떼어내어 100장씩 묶었습니다. 태어나 처음 하는 일이라 모든 게 신비로웠습니다.
아침이었는지 저녁이었는지 기억이 흐릿합니다. 밖은 어두웠고 친구들은 밥상에 빙 둘러앉았습니다. 방문을 열어 몸을 반쯤 들인 친구 친척 어른이 막 숟가락을 든 우리에게 이 한마디를 툭 던졌습니다.
“개는 혀?” 이게 무슨 말인지 다들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광주 친구가 ‘번역’을 해주었습니다. “개고기 먹냐고.”
친구들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개고기를 먹는다고?’ 밥상에서 고기가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음식은 된장국밖에 없었습니다. 숟가락으로 뒤적이니 바닥에 고기토막이 보였습니다. 제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겨울 된장국에 들어간 그 개고기가 아니라, 개고기는 “먹는다” 대신에 “한다”라고 표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할 무렵에 어른들이 가끔 제게 했던 말 중에 “술은 혀?”가 있었습니다. “술을 마실 줄 아느냐”는 뜻이었습니다. “담배는 혀?”도 있었습니다. “담배를 피울 줄 아느냐”라는 뜻이었습니다. 여성에게는 이러지 않았습니다. 성인 남성끼리 뭔가 은밀하게 일을 벌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표현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대를 갔다 오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저는 수시로 “개는 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특히 직장 상사가 동료들끼리 연대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때 곁에 슬며시 다가와서 제3자에게 들릴 듯 말 듯 “개는 혀?” 하고 물었습니다. 이 연대에 여성을 제외돼 있었습니다.
그동안에 세상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개고기 먹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더 이상 “개는 혀?” 하고 묻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또 “술은 혀?”, “담배는 혀?”도 잘 듣지 않게 됐습니다. 예전보다 술을 덜 마시고 담배를 덜 피우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남성끼리 은밀하게 ‘헤쳐 먹을’ 수 있는 사회에서 우리가 벗어났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대학 1학년 때에 신안 여행을 함께 간 친구들은 모두 남성이었습니다. 우리 과에 여성은 달랑 1명밖에 없었습니다. 여성이 대학에 가고 사회 생활에 진출하는 것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동료끼리 연대를 강화하는 일이란 곧 남성끼리 연대를 강화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게 옳다 그르다는 것을 따지자는 게 아닙니다. 그때는 그랬다는 겁니다.
김 양식장을 하는 어른의 눈에는 겨울방학에 먼먼 남녘 바닷가 마을에까지 와서 일을 돕고 있는 대학 1학년생들이 대견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 겨울에 개고기를 내면서 “개는 혀?” 하고 물은 것은 아직 어린 우리에게 어른 대접을 해주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하고. 이제야 그때의 일을 꺼내어서 우리 사는 세상이 얼마나 크게 변했는지 새삼 더듬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