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세계에서 ③ 속죄자 무리 (1)
박지효 기자
일간스포츠는 곽재선 문화재단과 함께하는 제1회 하이니티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인 금알음 작가의 「세계에서」와 김재인 작가의 「반항의 향」을 매주 1회씩 순차 연재합니다. 이번 연재는 청소년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고,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많은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독창적인 상상력과 깊이 있는 시선이 담긴 두 작품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편집자주>
3. 속죄자 무리
“… 콜록.”
나는 미어 나오는 기침을 안간힘을 다해 눌러 참으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다섯 시 오십 일 분. 아까 확인했을 때 사십 분이었는데, 시간이 왜 이리 느리게 가는지 모르겠다.
산책하다 선생님께 걸린 다음 날, 이불을 깐 바닥에서 잠든 내게 찾아온 것은 지독한 감기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로와 배를 깔고 누워 이야기를 하다가, 여로가 잠들면 책상으로 돌아가 남은 공부를 끝마치고 슬며시 그 옆에 누워 잠이 드는 게 요새 내 일상이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거대로 무리가 됐던 모양이었다.
여로와 성에서 지내는 동안은 정말로 안전했다. 오히려 세계 속에서 지내는 대부분이 더 위험했다. 매 순간 전장에 있는 듯한 기분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테다.
거기다… 성에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들의 죄책감은, 세계에 있을 때 더 짙어졌으니까. 성 속에서의 안락과 내겐 그럴 자격이 없다는 속죄자의 후회가 대립하며 나를 괴롭게 했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는 죄인인 걸까, 그저 안정된 집을 떠나 초행길로 발을 들인 집시 하나일 뿐인 걸까. 아주 단순한 존재였던 나를 정의 내리지 못하는 사이, 몸에 가해지는 무리는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혼란과 양심의 고통은 신체적인 반응으로 찾아왔다. 나는 열 오른 이마에 손을 올리며 초점을 잡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시야까지 흐릿한 게, 열이 어지간히도 지독하게 오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학교에서 일개 학생이 아픈 건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아픈 몸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건 그닥 낯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프다고 손을 놓고 있는 게 심적으로 더욱 불안했다. 무리가 정상이 되어버린 학교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화학식을 완성했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다…
“야… 괜찮아? 너 얼굴이…”
열감에 허우적대고 있는데, 옆에 앉은 한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하. 내뱉는 숨이 거칠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간단한 말을 꺼내는 것도 힘에 부쳤다.
“많이 아프면 보건실 가. 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한결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이유를 불문하고 자습 시간에 말을 하는 것은 감점 사유에 해당할 수 있는데,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얘기를 꺼내는 것에서 걱정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괜찮, 큼, 괜찮아. 자습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A-13, 경고. 3회 이상 누적될 경우 심의에 따라 감점. (1/3)]
눈앞에 푸른빛이 떠올랐다. 아, 망할. 소리 낮춰 말한다고 말했는데, 감독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원칙인 자습실에선 보통 무음으로 경고 알림을 보내고 구두로 통보하러 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는 아찔한 기분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선생님을 보지 않으려 눈을 꾹 감았다.
“저, 그게…”
선생님이 설명하라는 듯 눈을 치켜뜨자 한결이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당황한 듯 문장이 제대로 완성되지도 않기에,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아파 보여서 한결이가 걱정하느라 그랬습니다. 저 때문에 물의를 일으키게 되어 죄송합니다.”
한결이 고개를 홱 내게로 돌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간단히 문제의 원인을 내게로 넘기기로 했다. 애초에 한결이 말을 붙인 건 나 때문인데, 억울하게 감점당하는 것보단 이편이 나았다.
선생님은 그에 우리 둘을 번갈아 보다가 내 얼굴을 보고 놀란 듯 멈칫했다. 열이 잔뜩 올라 있는 게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을 테니까.
“… 더 묻지 않겠습니다. 학생은 보건실로 가세요.”
다행히도, 선생님은 감점을 하거나 경고를 더 하진 않았다.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지나치게 시적인 얘기라면 경고를 더 주는 선생님도 있었다. 이 경우는 어느 정도 참작이 된 모양이다. 나는 선생님께 간단히 목례하고 공부하던 것을 정리했다. 마음 같아선 끝날 때까지 싶었지만 나름대로 배려를 해준 듯한 선생님에게 더 감점을 당하고 싶진 않았다.
걱정어린 한결의 시선을 뒤로하고 자습실을 나왔다. 잠깐 움직인 것인데도 시야가 핑 돌았다. 조금이라도 쉴 수 있었으면 나았을까.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보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여유롭게 진도를 마치고 있었으니까. 약이나 받고, 저녁 자습 때 못한 부분을 보충하면, 크게 문제되진 않을 것 같았다.
기숙사 근처에 있는 보건실은 꽤 멀었다. 그러니까,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단 소리다. 보건실의 하얀 문 앞에 다다랐을 때쯤엔 식은땀으로 푸른색 교복이 흠뻑 젖어 있었다.
“여명?”
덜덜 떨리는 손으로 노크를 하려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한 손에 종이책을 든 여로가 보였다.
“… 자습실에 있을 시간 아냐?”
수업이 일찍 끝난 날이라, 대부분의 학생이 자습실에 있을 시간이다. 의문을 담아 묻는데, 여로가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난 자습 신청 안 했어. 근데 너 어디 아파?”
“자습을, 콜록, 신청 안 했다고? 지금껏 안 하고 있었던 거야?”
미어터지는 기침보다는 여로가 여상히 내뱉은 사실이 놀라워 질문을 쏟아냈다. 자습 신청 방법은 분명히 일러줬던 것 같은데. 기숙사에 항상 일찍 들어와 있는 게 그 때문이었나? 아니, 내가 말해주는 걸 잊었던가? 가뜩이나 어지러운 머리가 사고를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 보건실 온 거면 얼른 들어가,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혹시라도 나 때문에 자습을 못하고 있었을까 마음을 졸이는데, 여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건실을 눈짓했다.
“… 이따 제대로 얘기해.”
걱정은 단호한 목소리로 다가왔기에, 나는 항변하는 것을 포기하고 결국 여로를 등졌다. 더이상은 대화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어느 정도 정답이었는지, 여로는 보건실 문이 닫힐 때까지 그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이따금, 적어도 옳다고 믿는 부분에서는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다.
보건실에는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통창이 크게 나 있다. 안정을 위한 침상 두 개와, 진찰대라고 하는 철제 침대 하나. 통창 너머로 보이는 드넓은 자연과 곳곳에 스크린이 떠다니는 보건실 내부의 모습은 조금 이질적이었다.
“아, 왔구나. 이리 앉으렴.”
그때, 스크린 앞에 앉아 있던 선생님이 내게 손짓했다. 나는 바다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진찰대 그 지시대로 께로 다가가 앉았다. 서늘한 감촉이 섬유 조직을 뚫고 맨살에 전해지자 소름이 돋는다.
“자습실에서 연락은 받았는데, 많이 힘드니?”
“견딜 만해요. 조용한 곳에서 괜히 기침하다가 그런 거니까…”
감독 선생님이 이미 연락하신 건가. 나는 밀려오는 두통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숙였다. 자습 도중 불가피하게 먼저 나가게 되면, 학생의 신변 보호를 위해 위치를 알리는 것이 원칙이긴 하다. 정해진 경로를 이탈할 경우 감점당할 수도 있었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조금 소름이 돋아서, 선생님의 눈을 굳이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진단이나 처치는 간단했다. 파란색 광선이 몸을 가볍게 훑고, 이상 상태가 있는 곳에서 멈춘 스크린이 경고하듯 붉은색으로 변한다. 민간에서는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기술이라는데, 중태가 아닌 이상 학교에서 모든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이곳에는 웬만한 최신 의료 장비가 갖춰져 있었다. 한 장비를 들여올 때마다, 이건 우리 학교 선배들이 만든 거라며 자랑스러워하던 선생님들이 떠올랐다.
“그런 것 치곤 열이 높구나. 감기몸살이 심하게 난 것 같은데. 요새 무리했니?”
“별달리 무리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시기가 시기다 보니까… 조금 덜, 자긴 했죠.”
수면 시간을 확보하려면 확보할 수는 있었는데, 그 시간을 여로와 대화하며 보내버렸다. 양심이 어딘가 쿡쿡 아려서, 말 중간이 삐끗했다.
“그래… 많이 힘들겠지. 약 먹고 쉬고 가렴. 저녁 감독 선생님껜 내가…”
“아, 아뇨. 뭐 옮기는 게 아니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시험 기간인데 자습 빼는 게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나는 뇌가 이리저리 울리는 감각을 무시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미 자습 도중에 나왔는데 저녁 자습도 못 하게 되면 곤란했다. 애초에 쓰러져서 실려 온 게 아닌 이상, 선생님의 권유에도 보건실에서 요양하고 가는 애들은 거의 없다. 애초에 지금 개발된 약으론 독감도 가벼운 병으로 만들 수 있었기에, 절대적으로 휴식이 필요한 시간은 많이 없다. 허약한 체질을 가지고 있는 애들은 약을 달고 살며 살인적인 스케줄을 버틸 수 있었다.
익숙한 거절에, 선생님의 표정이 조금 굳는 게 보였다. 전에 얘기했던가. 선생님은 유독 걱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원체 성정이 다정한 선생님의, 그것도 보건 선생님의 눈가에 나이보다 더 많은 주름이 새겨져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파도 쉬지 못하는 애들 사이에서 걱정이란 감정을 품고 있는 건, 넓은 강물에 물감 한 두 방울을 떨어트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강물이 색을 가지게 되는 일은 없을 텐데.
“… 그래. 강요하지는 못하겠구나. 아프면 바로 다시 오고. 끝까지 버티다 쓰러져 실려 오는 게 더 시간을 낭비하는 짓이야.”
결국 선생님이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들었다. 체념 섞인 그 한숨이 익숙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스크린 앞으로 간 선생님은 패널을 몇 개 두드려 기계를 조작했다. 약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기계에 연결된 스크린이 명령어를 받아 내부에 연결된 장치를 움직였다. 보건 시간에 3D 프린터를 기반으로 한 기계라고 설명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때그때 여러 성분을 조합할 수 있는 기계는 개개인에 맞추어 약물을 만들어 냈다.
이제보니 조소가 나왔다. 열이 오른 머리는 생각을 제멋대로 지껄여댔다. 신체별 특성을 고려한 기계는 만들어지면서, 왜 고유한 생각은 고려할 생각을 안 할까. 여로도 이 행태를, 모순적이라 느끼지 않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이 출력된 약을 포장해 내게 건넸다. 나는 간단히 약을 받고는 살짝 목례한 후 진찰대에서 내려왔다. 시간을 많이 뺏겼으니까 석식은 걸러야겠다. 차라리 그 시간에 조금 자고, 저녁 자습 땐 나아진 컨디션으로 공부하면…
“여명아.”
문으로 다가가는데, 별안간 선생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목소리가 조금 낮아진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일까. 선생님은 묘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읽어낼 수 없어서 조금 더 의아한, 그런 눈빛.
“아픈데도 공부하러 가겠다고 하는 걸 보면 잘 하고 있는 것 같다만… 요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
멈칫.
낮은 어조에 몸이 굳었다. 선생님은 평소처럼 웃고 있었지만, 정작 지적한 것은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의 언어를 사용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알았지? 여로와 계속해서 세계를 벗어난 이야기를 하고 있던걸, 성을 만들어 낸 걸… 그것들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세계에 보인 순간, 내 미약한 성은 너무나도 쉽게 스러질 것 같았으니까.
“아, 감점하거나 혼내려는 건 아니란다. 그냥 요즘 네가, 여로와 함께 다니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고 해서 말이다. 물론… 전학생을 도와주려고 같이 다닌 거겠지?”
선생님이 여로를 거론하며 말끝을 늘였다. 그다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어제 산책을 한 것이 선생님의 귀에 들어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로와 함께 다니는 모습이 선생님들에 눈에 띌 정도였다고.
나는 찌푸려지는 미간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내 행동이 문제가 됐다는 생각 때문이라기보단, 고작 이런 일로 여로가 거론된 것이 불편했다. 내가 여로와 다녔든 말든, 그것은 내 자유이자 여로의 자유인데, 왜 그걸 따로 확인받아야 하는 거지.
물론… 졸업 학년은 혼자 다니는 게 맞다. 함께 다니면, 응당 잡담을 하거나 공부와 어긋난 주제로 대화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였다. 신성한 학문을 신성한 태도로 대하라는 선생님들의 말은 권고에 그치는 게 아니라 모종의 경고를 띄고 있었기에, 그 오래 지낸 한결과도 밥을 같이 먹거나 이동할 때 잠시 동행하는 게 다였다. 하지만, 왜. 항상 그 왜가 문제다. 바라지 않았던 의문은 마음속을 치고 올라와 여로에게 닿았고,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말한 여로에 의해서 모종의 힘이 되어버렸다.
졸업 학년은 제한된 행동만을 해야 한다는, 그 당연한 이치가 이제는 불편했다. 전학생을 도우라는 지시를 받아 의무적으로 여로와 같이 다녔던 때와는 달랐다. 그 산딸기를 먹은 건, 함께 황혼을 맞으며 걸었던 건 오로지 내 의지였다. 더이상 여로에게 맞추려는 시도가 아니라, 나 자신이 그렇게 가길 원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난 겁쟁이였다. 조악한 발걸음으로 그 이치들을 부정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심장이 불안정한 고동으로 낮게 뛰었다.
“… 여로는 좋은 친구이고, 영특한 애예요. 제가 별달리 도울 것도 보이지 않아서, 조금 더 신경 쓴 것뿐이고요.”
결국, 어느 정도 정제한 말을 내뱉는 게 다였다. 다만 습관이 된 죄송하다는 말만은 하지 않았다. 허공에 흩어지는 말들이 있다. 결국 그 의미 없는 사죄들은 방어일 뿐,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내 대답에 살짝 눈을 크게 떴지만, 잠시 침묵한 후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느릿하게, 이해하지 못한 감정들을 담아. 원래 나라면 인지하지 못할 감정이었지만, 이제는 그 찰나의 감정이 보였다. 왜 선생님에게서 그런 감정들이 보이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 그래, 그거면 됐다. 어서 가보렴.”
허공에 흩어진 말은 공허했다. 과대 해석일진 모르겠지만, 가슴 속에 짙은 공허를 품고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짚을 수는 없다. 결국 나는 상쾌하지 못한 마음으로 인사를 한 뒤 보건실을 빠져나왔다.
탁. 문이 닫히고,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적을 마주하자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더욱 여실히 느껴졌다. 열 오른 머리로 그것들을 견디기가 힘들어, 벽을 타고 주르륵 주저앉아 버렸다.
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서 있는 선생님이, 왜 저런 눈빛을 하고 있을까. 왜 이런 슬픔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뭘 부정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방향 없는 원망들이 자꾸만 밖으로 새어 나갔다. 나는 핑 도는 시야를 감추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 일단 여로를 만나야겠다. 아까 마무리 짓지 못한 말도 있었으니까. 새어 들어온 정보가 너무 많다. 잠시 성안으로 숨어들고 싶었다.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다는 그것은, 그리 나쁜 종류의 욕구는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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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패널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작은 알림음과 함께 잠금이 풀렸다. 저녁 시간에 기숙사에 들어가는 건 거의 처음이다. 문을 열자마자 어제 깔아놓은 이불에서 책을 보고 있는 여로와 눈이 마주쳤다. 나와 마주치자 푸른 눈이 살짝 커진다.
“너…”
“그, 무슨 말 하고 싶은진 알겠는데, 괜찮아. 그냥 감기몸살이래.”
그가 먼저 걱정 어린 말들을 내뱉기 전에 선수를 쳤다. 괜히 그런 것들로 시간을 보내기엔 아까우니까. 약을 흔들어 보이며 이불이 아닌 침대에 앉자 여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프면 미리 말을 해야지. 요새 계속 피곤해하는 것 같더니…”
“가끔 이래, 괜찮아. 좀 쉬면 나아.”
“안 쉬잖아. 무리 않겠다더니, 너 나랑 얘기하고 다시 공부하는 거 모를 줄 알아?”
멈칫. 여로가 단정적인 어조로 말하자 살짝 몸이 굳었다. 알고 있었나? 부러 불도 안 켜고 스크린 밝기도 최대한으로 낮춰 공부했는데, 같은 방이라 그런지 완벽하게 은폐하진 못한 모양이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그러니까, 이건-
“그, 새벽에 가장 집중이 잘 돼서. 너랑 얘기하다 보면 잠도 깨고, 그때가 가장 공부하기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나는 거의 변명하는 투가 되어 이야기했다. 하지만 내뱉은 것은 거짓이었다. 그때 가장 집중이 잘 되었다기보단… 그냥 몸이 고되면, 척척한 죄책감이나 숨을 죄이는 죄악감이 조금은 왠지는 모르겠으나, 여로에게 공부 때문에 무리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여로는 그 이상의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여로의 푸른 눈은 여전히 낮게 나를 응시하고 있다. 내가 하나를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미 더 높은 것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낮은 곳에 있는 어수룩한 모습이 보이지 않을 리 없던 것이다.
“글쎄, 그게 순전히 네가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면 네 말이 맞겠지만… 내 눈에 네가 불안해 보인다는 건 왜일까.”
여로가 한숨을 쉬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 가끔 새벽에 혼잣말하는 거 알아? 가끔 넌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르겠다고 얘기해. 진짜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를 위해 밤을 새우는 거면, 행선지를 모르진 않겠지.”
… 진짜? 나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왔다고? 여로의 앞에서는 속에 품은 말들을 비교적 쉽게 내뱉을 수 있었으나, 내 과거나 미래에 관한 것들은 의식적으로 꺼내 놓지 않았다. 그야, 나조차도 불안했으니까. 나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으니까. 여로는 그 미숙한 것들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공부를 길을 가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방어 기제로 사용한다는 것도.
공부는 어느 정도 불안을 숨기기 위한 도구였다. 적어도 수식을 풀어갈 땐 머리는 아프지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성적이 높으면 어디든 갈 수 있으니 일단 성적부터 높이고 보자고 생각한 게 고착화한 것도 있었다. 어느 방향인지는 몰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니까. 그게 죄를 갚을 수 있는… 마지막 활로일 테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이 이미 세상 밖으로 나왔었다고… 수치스러운 기분에 얼굴을 감싸는데, 여로가 내 손을 끌어 이불 위에 앉혔다. 내 낮은 감정을 읽어내면서.
“괜찮아, 탓하려고 얘기한 건 아니야. 원래 새벽이 가장 속에 든 것들을 꺼내 놓기 좋은 시간이거든.”
이해해, 부끄러워하지는 마. 내 침묵을 수치로 받아들였는지 여로가 황급히 덧붙였다.
“… 사실 언젠가 얘기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어.”
용기가 없었던 거지. 나는 애써 입꼬리를 잡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대로,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지 모르겠어. 그냥 멀거니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지. 계속 그 길을 가야 하는 주제에 성적까지 낮으면 답이 없으니까 더 쉽게 세계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어.”
내겐 어떤 목표나 의지가 없었다고. 그저 죄악감이 날 움직여, 무리하고 또 무리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여로가 가진 푸른 너울이 다가와 무지로 이루어진 방어막을 부숴주어,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입학 설명회 때의 공허가, 지배자의 존재에 대한 거부감이, 높이 쌓여가는 포인트를 봤음에도 그다지 크지 않았던 기쁨이 일러주었다. 나는 목적지도 설정하지 않은 채 황야를 달리고만 있었던 것이다. 목적 없이 의무감만 있는 일에 성취감이나 그 어떤 노력의 동기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알고는 있었어. 네가 별달리 어딘가로 향하고 있지 않다는 건.”
가만히 근 몇 개월간의 일을 회상하는데, 여로가 나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럼 눈빛이 그리 공허할 리 없으니까. 너는 학문을 어느 정도 좋아하긴 하지만 그게 네 삶의 일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같았어, 라는 추측의 어미인데도 그의 말은 이미 확신에 차 있었다. 정확한 통찰이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해본 적 없는 종류의 사고이기도 했다.
학문이 내 삶의 이유가 아니라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모두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순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 예외가 나일 거라는 자기중심적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보편적으로 존경받는 학문을 받아들였고, 다른 길을 찾을 정도로 그것의 본질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행운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아니, 어쩌면 나는 학문 외에 다른 길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속죄의 수단으로 학문을 택한 내게, 다른 활로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순간 덜컥 두려움이 밀려온다. 학문마저 내 것이 아니라면, 난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 거지?
속죄의 길엔, 다른 종류의 것도 있을 수 있던가?
“학문은 내 일부여야 해. 그래야 살아갈 수 있어, 나는.”
나는 거의 강박적으로 말했다. 곧 끊어질 듯한 동앗줄에 매달린 사람 마냥.
“음, 이제 할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몰라서 함부로 얘기하진 못하겠지만….”
끼이익.
여로는 이불을 깐 바닥에서 일어나 내 곁에 앉았다. 매트리스가 푹 꺼지자 나는 혹여 감기를 옮길까 거리를 두려 했지만, 여로는 내 곁에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아, 또. 저 슬픈 모습.
“나는 살아간다는 게 그다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냐. 오, 그렇다고 내가 회의주의자라고 얘기하는 것도 아냐. 다만 나는, 생존을 위해 기술을 발전시켜 나간 지금 인류에겐 반항적으로 들리겠지만, 인간의 생존만으론 그 가치를 온전히 보일 순 없다고 생각해.”
그가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심장의 고동이 느껴지겠지. 내가 진정하기 위해 고동을 느꼈던 것처럼. 여로는 그 어떤 것을 확인 하고 싶은 듯했다. 어딘가에 초점을 맞추는 그의 얼굴은, 감정을 읽을 수도 없이 침잠해 있었으니까.
“생존을 위한 방법들을 고찰하는 데에서 그 어떤 길을 찾을 수도 있겠지. 그러면 가치 있는 게 맞아. 다만 인류의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다고 얘기하는 이 세계에선, 더이상 추구할 데가 없는 데도 더 높은 경지를 바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어떤 것을 이상화하고, 단순하게 더 오래 건강히 생존하는 것만을 추구하고. 근데 그 과정에서 내가 없다면, 아무리 오래 산들 공허할 뿐이잖아.”
내가 없다면. 그 짧은 문장이 심장에 날아와 박혔다. 내가 없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한 번에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그걸 들을 때 어딘가 진한 슬픔이 느껴졌으므로, 여로가 말하는 것들의 정곡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젠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야. 그러니 더이상 생존만을 바라보지 말고, 그것을 뛰어넘는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난 그렇게 믿어.”
그 순간 나는 여로의 회의적인 시선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여로의 모습은, 이것만이 진리가 아니라 어떤 하나의 길이라고 여기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너는 그걸 어떻게 그렇게 아는 거야? 벗어나 있어?”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져서 물었다. 조금은 간절한 목소리로. 그것은, 내 죄를 다른 시각에서 접근한 아주 새로운 길이기도 했다. 다른 갈래의 길에 공허 없는 길이 있을까. 다른 길이라는 건, 어떤 정립된 생각을 부정하게 해줄 수 있는 걸까.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건. 소멸이 두려워 제 인생을 저버리고 절대적인 인생을 늘리기를 택한 인간의 삶에서, 여로가 말한 그 가치라는 건. 삶을 억지로 억지로 늘려가지 않고, 죽음을 맞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나도 아직 완전히 벗어난 건 아냐. 자습을 신청하지 않거나 산책을 나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고.”
“…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자습을 안 하면 되는 거야? 다른 길이라는 건?”
“그렇게 직관적인 의미는 아니라니까.”
바보 같은 질문에 키득키득 웃은 여로는 내 질문이 달가운 듯 미소지었다. 세계를 한 꺼풀 벗기고 나올 때마다, 여로는 진심으로 웃어주었다.
“그건 네 안에 있어. 너를 들어.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듣지 말고, 세상이 어떤지 평가하는 네 안의 목소리를 듣는 거야. 넌 아직 세계에 갇혀 있으니까. 이제 그곳에서 나와도 괜찮아. 네가 어떤 동기로 그곳에 있었든지 간에.”
그럼 보일 거야, 네가 뭘 원하고 있는지.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내가 정답이라는 그 이야기를, 그전에도 여로에게 들은 적이 있던 것이다. 정말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맞을 수도 있다고? 세계는 죄라고 얘기했던 그것들이? 어쩌면 죄를 더 할 뿐이라고 치부했던 일들이?
“자습을 안 한다는 건, 세계 속에 갇히기 싫어서였어. 나도 인간이야,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모두 한곳만을 좇고 있으면, 나도 어느샌가 그걸 옳다고 여길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더더욱, 내 길을 찾기까진, 어느 정도 수용하되 목숨을 걸고 싶진 않았어.”
그제야 의문이 아주 조금은 풀리는 눈빛이었다. 여로는 시험이나 포인트를 하나의 길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조건 그 길로는 가지 않아도 되는. 여로는 지배라는 개념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자의 이야기라서, 믿어버려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위험하게 펼쳐졌다.
분명 새로운 갈래의 생각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성에서 배웠지 않은가. 여로가 말했듯이, 설령 학문에서도 한 길로만의 생각으론 나아갈 수 없다. 그러니까, 진리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립해 갈 수도 있다고. 여로는 이번에도 다정한 눈빛으로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로는 이번에도… 그것이 죄악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세계를 빠져나온 것도 정답일까. 죄인도 정답이란 걸 정립할 수 있는 걸까. 여로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내가 하는 생각이 맞다고 얘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순간 여로의 깊은 바다에 발을 담갔다. 아주아주 깊은 심해였으나, 두렵지도, 숨이 막히지도 않고… 오히려 따뜻했다.
그리고, 심해도 따뜻할 수 있다는 걸 느낀 그 순간. 나는 틀을 깨고 나오자고 마음먹었다.
[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세계에서>는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③ 속죄자 무리 (2)에서 계속)
박지효 기자 jihyop@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