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반항의 향 ➃ 붉음과 어깨를 나란히 (2)
박지효 기자
등록2026.09.04 15:25
일간스포츠는 곽재선 문화재단과 함께하는 제1회 하이니티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인 금알음 작가의 「세계에서」와 김재인 작가의 「반항의 향」을 매주 1회씩 순차 연재합니다. 이번 연재는 청소년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고,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많은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독창적인 상상력과 깊이 있는 시선이 담긴 두 작품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편집자주>
제1회 하이니티 청소년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 김재인 작가의「반항의 향」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정신없이 돌아간 상황 때문에 새벽이었던 걸 까먹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따뜻해서 몸이 노곤해졌다. 대충 머리를 말리고 이불에 들어가 누웠다. 서화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걸까. 하긴, 그게 뭔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뭘 안다고. 나는 클록터도, 서화도, 심지어 나라는 사람조차도 몰랐다. 이래서는 이모션 사이클 받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누군가를 좋아해야 고장 난 감정이 돌아올까? 스마트폰을 켜서 서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세 번 갈 동안 감감무소식이었다. 그 사이 책상 구석에 처박힌 사전을 꺼내 들었다. ‘사랑’을 찾아본 이후 두 번째로 펼치는 사전이었다. 나는 서둘러 ‘좋아한다’를 찾았다. 안타깝게도 그런 말은 보이지 않았다. 휘연이에게 받은 허접한 사전은 휘연이가 직접 기록한 공책이기 때문에 없는 단어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감정의 뜻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을 수 없으니까 이게 최선이었다. 한동안 펼친 페이지를 계속 바라보다가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좋아한다, 사랑의 유의어.’ 하단에 작게 쓰인 예문이 눈에 띄었다. ‘나는 서화를 좋아한다.’ 소담한 문장이 귀여워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웃음이 나왔다. 휘연이와 서화는 항상 싸우기만 해서 이런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마주쳤던 휘연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더 이상 어린아이의 사랑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사전에 푹 빠져 있는 사이 통화가 연결된 모양이었다. 급히 스마트폰을 주워 대답했다. “미안. 기다리면서 다른 일 좀 하느라.” “주의력 결핍이냐? 신경 좀 쓰고 살아.” 눈동자는 계속해서 사전의 예문을 향해 있었다. 만약 휘연이가 클록터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지금쯤 뭐 하고 살았을까. 아마 그 작은 손으로 타자를 열심히 두드리면서 자기가 쓴 소설을 들려주겠지. “야, 왜 전화했냐고.” 서화의 부름에 회상은 멈추었다. 내가 전화를 걸었던 이유를 까먹어버렸다. 예문의 옆으로 시선을 옮기니 곧바로 생각났다. “나도 너를 좋아해 보려고.” 목소리가 흐르던 스피커가 잠시 고요해졌다. “네가 나 좋아한다고 한 거. 저번에 써먹은 건 미안하다. 그때 제정신 아니었던 거 알잖아.” “아니, 어어. 너 지금 무슨 말인지 알고 뱉는 거야?” “사전도 찾아봤어. 잘 안 나와 있지만. 맞다, 휘연이가 너 좋아했대.”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왜 이리 주춤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어. 사랑의 유의어라는데.” “사귀자는 거야?”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야 사귀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니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내 침묵의 뜻을 알아들은 듯 서화가 설명했다. “좋아하는 사람끼리 서로 사랑을 건네는 거. 그런 거야.” “별로다. 귀찮게 뭘….” “싫으면 말고. 인생 첫 고백을 이런 식으로 받을 줄 몰랐네.” 따지고 보면 휘연이가 첫 번째 아닌가. 서화의 말투가 묘하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어색해서 속이 울렁거렸다. 단순한 울렁거림이 아니라, 달콤한 디저트를 과도하게 먹어서 느글거리는 느낌. 썩 반가운 기분은 아니었다. 도망치듯이 통화를 끊어버렸다. 이제 낮이 밝았지만, 그냥 퍼질러 자고 싶었다. 왠지 내가 상황을 한 번 더 꼰 것 같다. 골치 아팠다. 이성과 감성이 뒤섞여 사고회로를 잘게 조각내고 있었다. 차라리 이모션 사이클을 받았다면 감성이라는 하나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을 거다.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다. 나는 이모션 사이클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센터도 싫고, 클록터도 싫고, 다 싫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마주하는 새하얀 천장도 싫고, 부실하게 지어진 교실 창문 틈으로 꾸준히 들어오는 햇살도 싫다. 내가 좋아하는 건 따뜻한 목욕과 부드러운 이불, 서화 정도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서화와 휘연이를 위해서 나는 이모션 사이클을 증오해야만 한다. 그게 정녕 내 확신을 흐트러트린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다. 피곤하게 사는 건 딱 질색이다. 단순해지고 싶다.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 그건 멋대로 형성된 자아 때문에 불안을 떨쳐낼 수 없는 나에게는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그 후로 쪽잠을 반복하며 이틀을 보냈다. 수면 주기가 흐트러진 건지 새벽에 자주 깨 버려서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48시간을 살아온 기억이 없는데 내일 당장 보기 껄끄러운 사람을 만나야 했다. 걱정이 내 일상을 조종했다. 오늘따라 딱딱하게 느껴지는 침대에 누운 지 어언 세 시간, 여전히 정신은 맑았다. 결국 일어나서 좁디좁은 방을 여러 번 걸었다. 굳게 잠긴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 편한 옷만 추구하다 보니 딱히 옷에 관심이 없었다. 유감스럽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쓸데없는 걱정거리가 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대기업에 방문하니까 갖춰 입어야 할까, 회장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서라면 빼입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한낱 꼬맹이가 정장 입었다고 긴장할 사람은 아니지만 말이다. 안절부절못하며 먼지 쌓인 옷을 걸쳤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구겨진 옷깃을 꾸역꾸역 세워봐도, 고작 먹이사슬 최하층의 작은 새 한 마리가 매를 위협하는 꼴이었다.
나 홀로 밤을 지새울 동안 해님이 서서히 떠올랐다. 정신을 붙잡고 세뇌했다. 대충 뭐…. 겁내지 말자, 정도. 밤에 가서 봉변당할 바에야 이른 아침에 일찍 출발하는 게 나았다. 어차피 수업도 없는 주말이니까 상황이 맞아떨어졌다. 서화도 아직 자고 있을 게 뻔하다. 자리를 박차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대니, 졸음이 쏟아졌다. 생뚱맞은 곳에서 찾아오는 졸음이 썩 반갑지는 않았다. 정신은 긴장한 상태인데 몸이 축 늘어져서 되겠냐고. 머리가 닿은 유리창이 뜨거웠다. 슬슬 여름이랑은 작별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구겨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지도만큼은 내게 진실을 말해주면 좋겠다. 처음 보는 정류장에 버려지긴 싫기 때문이다.
전원이 꺼진 듯한 어둠 속에서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여전히 버스에는 나뿐이었다. 노선도를 바라보니 다음에 내려야 했다. 헐레벌떡 짐을 싸서 도착한 곳은 다른 세상 같았다. 매미 붙은 나무도, 콘크리트가 더럽혀진 건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착한 ‘도시’에는 푸른빛이 감돌았다. 하나의 코딩 프로그램으로 짜놓은 듯한 정교함과 세밀함. 곳곳에 깔린 홀로그램과 코 깊숙이 찔러 들어오는 까칠한 공기의 향. 센터로 돌아갈 때는 이 향을 가져가 서화에게 권하고 싶었다. 꼭 기록해서 지녀야지. 도시는 무엇보다도 쌀쌀했다. 멋 부리기용으로 걸친 얇은 외투 하나가 체온 유지에 도움이 되었다. 모처럼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였는데 바로 가시방석에 앉고 싶지는 않았다. 클록터로 가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도시를 배회했다. 목적 없이 건물과 건물 사이를 맴돌았다.
분명 기숙사에서 출발할 때는 이른 아침이었건만, 아직 이룬 일도 없는데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아침을 거른 탓에 근처 식당에 들어가 끼니를 때웠다. 도시에 도착했을 때 느낀 심장 박동은 금방 잦아들었다. 따뜻한 국물을 삼키며 생각했다. 왜, 내가 생각한 도시의 음식은 만능 알약 하나 정도였는데. 먹는 것도 우리와 다름없었다. 애꿎은 면발만 젓가락으로 휘저었다. 그래도 확실히 무인 시스템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예상외로 클록터에서 재촉 연락을 보내지 않았다. 메일함도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기를 반복했다. 식사를 끝마치고도 식당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곳을 나가면 또다시 이방인이 되어버릴 게 뻔했다.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다. 도시도 재미는 없었다. 건물에 색색의 페인트칠은 되어 있었지만 내게 만큼은 흑백이었다. 그냥 다채로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모순되게도 흑백의 세상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이후로 저녁 무렵까지 근처를 빙빙 돌며 시간을 보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 클록터의 만남 일정이 당겨진 걸 까먹은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결국 너덜너덜해진 지도를 꺼내 들었다.
골목에 골목을 거쳐 도착한 거리의 풍경은 또 한 번 낯설었다. 곳곳에 켜진 네온사인 간판은 도시 속에서 이질감을 자아냈다. 밝지만 의심스러운 빛은 불법 거래가 오갈 것만 같은 스산함을 주었다. 지도 위 빨간색 별이 쳐진 지점에 도달했다. 대기업의 본사로 보이는 건물은 없었다. 오히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업소는 꽤 위험해 보였다. 도시에도 술집 거리는 남아 있는 건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정면의 건물은 조금 허접한 와인 바 정도로 보였다. 지은 무심한 표정과는 반대로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도 역시나 무인 가게였다. 딱딱하게 흘러나오는 안내 음성을 무시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면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고철 문을 열어젖혔다. 신이 있다면 이번 한 번만 살려달라고 빌면서.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유령이 되어 그 남자를 저주할 거다. 잘못된 지도를 준 죗값이지. 걱정이 무색하게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삼 초 전까지 내가 저주하리라 다짐한 그 남자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지하에는 내가 상상하던 바가 그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게 뭐야.” 황당한 상황에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정신이 나간 취객은 없는 눈치였다. 당장은 목숨을 건진 셈이다. 일단 경계 태세를 취한 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사기를 치네?” “잘 찾아오셨는데요. 대화나 할까요?” 남자가 둥글고 낡은 형광 노란색 의자에 앉았다. 이런 의자는 딱 질색이었다. 너무 높은 탓에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방어적으로 굴며 말을 꺼냈다. “술집에 미성년자를 부르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남자는 내 말을 무시한 채 오렌지 주스 하나를 주문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장난하냐고 따지려다 말았다. 누구처럼 유치해 빠졌네. “정 싫으시면 나가실까요? 밖도 치안이 좋은 편은 아니라.” “여기는 뭡니까? 도시 중심에 난잡한 거리가 있는 것부터 의심스러운데. 감정 제어한다는 양반들이 술 마시고 노는 건 안 잡나 봐.” “외곽의 센터 같은 개념이죠.”
반항아 양성소. 다크서클이 새겨진 눈으로 짓는 웃음은 내 말문을 틀어막았다. 화를 식히라는 듯 그가 풍선껌 하나를 내밀었다. 입에 구겨 넣으니 인공적인 딸기향이 풍겼다. 진부한 맛에 표정을 굳힌 채 무의식적으로 질겅거리기를 반복했다. 한동안 나와 그는 말없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묘하게 절제된 행동이 신기했다. 그래도 모두 시술은 받은 것 같지. 예상을 해보자면 여기는 약물로 이모션 사이클을 받은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시술을 중단하고 반항하는 곳 아닐까. 추리력은 꽝이라 기대를 걸지는 않겠다. 어느새 거추장스럽게 꾸며진 와인 잔에 오렌지 주스가 담겨 나왔다. 하찮았다. 그가 잔을 내밀며 말했다. “클록터에 가고 싶습니까?” “아니요. 강제죠. 안 가면 내 목숨이 위험한 거 아니까.”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도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왜 여기로 유인했어요?” “본사 가면 재미 없잖아.” “재미고 자시고. 술집은 재밌나?” 그가 잠시 생각하는 듯 턱을 괴고는 한숨을 뱉었다. 단물이 빨리 빠져 고무 덩어리가 된 껌으로 풍선을 불었다. 색은 빠지지 않아 풍선이 선명한 분홍이었다. 불쌍하게 버려진 지도에 껌을 뱉어버렸다.
“이 골목길이 유일한 접선 방법입니다. 뭐, 대충 네온 스트릿이라고 부르도록 합시다. 도시의 총괄 감시자는 정부와 클록터에요. 이류 양은 똑똑하니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혁명적인 도시라고 한들 구성 요소가 인간인데 결함이 없겠습니까? 결함과 결함이 모여 만들어 낸 작은 세상이 이곳입니다. 센터와 본질이 비슷하죠. 한 가지 다른 점은, 네온 스트릿의 사람들은 이모션 사이클을 시술받다 도망친 이들이라는 겁니다. 중단의 방법이 자의적이든 도움받았든, 그들에게는 도망치는 게 살길이니까요.” “나를 절벽에 매달아 놓고서 반대편 벼랑 끝에서 추락하는 사람 구경이나 하라는 뜻인가.” “당신은 항상 날이 서 있네요. 그게 어리다는 증거지.” 그가 오렌지 주스를 보더니 안 마시냐며 재촉했다. 올려진 체리에 눈길이 갔다. 입으로 던지듯 넣었다. 오렌지 주스에 체리는 무슨 조합인지. 꾸역꾸역 씹는데 씹히지를 않았다. 내 모습을 본 그가 급하게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그거 모형인데.” 진작에 말하지…. 내가 움찔하며 잔을 팔꿈치로 건드려 버려서 소량의 주스가 쏟아져 소매에 묻었다. 미간을 구긴 채 오렌지 주스 한 모금을 머금었다. 딱딱한 체리 모형과 밍밍한 주스가 입안에서 움직였다. 신경질적으로 소매를 붙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입안에 맴도는 불량의 맛이 불쾌했다. 삼키지 않은 체리 모형을 변기에 뱉어버렸다. 꿋꿋이 제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꼴 보기 싫게. 차가운 수돗물에 소매를 댄 채 주황빛 오염을 지웠다.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류 양이나 저나 똑같이 이모션 사이클을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 도시에서 순물질은 저희뿐이라는 겁니다. 서로 도와야죠. 저는 이류 양의 본사 방문을 에스코트할 겁니다. 상부에서 그렇게 명령했으니까요. 당신은 회장님과 대화하며 시간을 끄세요. 제가 정보실에서 데이터를 파괴하겠습니다. 저희의 목적은 이모션 사이클의 완전한 몰락입니다.” “데이터 파괴는 어떻게 하게요? 해킹이라도 하려나?” “입사 당시 그쪽을 다뤘기에 방법이 있습니다. 제일 필요한 정보는 이모션 사이클의 시술 명단과 시술받은 이들의 칩 정보입니다.” “제가 당신을 무슨 수로 믿습니까?” “질질 짜기에는 그렇고, 간단히 이야기할게요. 선휘연이라는 연구원과 아는 사이지?” 침을 꿀꺽 삼켰다. 있지, 난 네 이름만 들으면 몸이 굳어. “제게도 그런 인연이 있습니다. 효율만을 따지는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이 진정한 관계를 맺기란 불가능에 가깝죠. 그게 싫어서.” 대충 이해하라는 말과 함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떠나자는 신호였다. 함께 바를 빠져나오니 다시 한번 마주한 쨍하게 빛나는 네온사인에 머리가 아팠다. “체리는?” “뱉었는데요.” 그의 정장 차림을 보고 있자니 대충 검은 후드티를 뒤집어쓴 나와 격이 달라 보였다. “진짜 안 어울리는 거 알아요? 딸기향 풍선껌.” “편견도 많으시네.” 반말과 존댓말을 섞은 혼잡한 대화가 이어졌다. 우리는 이제 어디로 향하는 걸까. 축축한 아스팔트를 짓누르는 반질반질한 그의 구두가 얄미웠다. 침투당한 의심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내게 미움을 산 구두는 또각또각하는 소리를 내며 제 형태를 돋보였다. 딱딱한 소음이 도시와 어울렸다.
만들어진 감정을 데이터화한다. 도시에서는 당연했다. 반듯하게 빗어진 감정은 잘게 쪼개지고 나누어져 멋대로 배치되어 버리겠지. 0과 1의 나열이라던가, 네모난 픽셀과 같은 것들로. 거리에서 흐르는 녹슨 철의 잔향이 시큼했다. 그건 흐르는 혈액과도 같은, 어딘가 붉은빛을 띠는 비릿함이었다. 걷다가 상가에서는 기름 냄새가 흘렀다. 저번에 서화와 통화할 때 이런 냄새의 기름을 몽땅 마신 기분이었다. “쥐에게 갉아 먹힌 청춘에 잠길 때는 간사한 꾀를 부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내가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의미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내 쪽을 흘깃 훑어보고는 말을 이었다. “반항 몇 번쯤이야. 후에 상대가 그른 것으로 판명 나면 꾀부린 반항이 곧 혁명 아니야?“ “원래 갈고 닦아야 깔끔해지잖아요. 그런 욕망 아니었을까요…. 성게 같은 감정은 위험하니까. 하지만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서 이 꼴이 났겠죠.“
솔솔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속눈썹을 간지럽혔다. 거칠한 안구 표면에 눈물이 맺혔다. 눈을 비비는 잠깐 사이에 그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미적대던 도중 주머니에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서화의 전화였다. 어디냐고 윽박지르는 듯한 목소리에 짜증을 섞어 대답했다. “놀러 왔어.” “보나 마나 향수 제작 겸의 견학이라 변명하겠지.” “꽤 불량의 냄새야.” 잠깐, 서화는 내 위치를 알고 있는 걸까. 귀 뒤를 만지작거리자, 역시 손톱 끝에 무언가 걸렸다. 괜히 잡아뗐다가는 피부까지 뜯길 것 같단 말이야. 나와 클록터의 만남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도시에 방문했다면 당황할 법도 하다. 서화의 윽박지르는 태도가 이해되었다. “도시에 간 거 아니야?” 긴 정적 끝에 건네받은 첫 물음이었다. 아무래도 반항아와 도시는 거리가 멀어서 생긴 의문이겠거니 싶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긴장만이 맴돌았다. 중력이 두 발목을 꽁꽁 옭아맸다. 가시넝쿨 같은 중력은 발끝부터 점점 솟구쳐 내 숨통을 졸랐다. “왼쪽 귀 뒤 만져봐. 위치추적기야. 원리는 이모션 사이클 시술 칩이랑 동일하고. 도망치고 싶으면 떼. 선택은 네가 해라.” 서화의 입을 거쳐 술술 흐르는 비밀에 심정이 불편했다. 통화로 전하는 건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
“공기계야?” “아니. 안 그래도 옛날에 쓰던 고철 폰을 찾았는데 작동 불능이야.” “근데 왜 전화해서 비밀을 까?” 꼭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의미인지 알고 저지른 행동이야? 저번에 서화의 스마트폰은 감시 상태라는 사실을 똑똑히 들었다. 감시를 알아차리고도 무모한 장난을 저지르는 게 꼬맹이 같았다. “어차피 오늘 만날 거 아니야? 그쪽 사장.” 지직거리는 스피커 너머로 서화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알아. 네 머릿속에 있는 거 다 보여. 괜히 입 아프게 설명하지 말고. 도망자 신세라도 괜찮으니까. 이건 살아보기 위한 행동이야.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한 마지막 발악. 너 별로 안 보고 싶으니까 도망치듯 뛰어오지 마. 다 해결하고 여유로운 표정이나 짓던가. 내가 널 믿으니까 치는 장난이야.“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통화가 종료되었다. 뺨이라도 한 대 맞은 듯 얼떨떨했다. 하도 안쪽 볼을 잘근잘근 깨물어 피부가 쓰라렸다.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잔뜩 긴장한 채 누른 화면에는 김빠지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이담 씨 만났어? 그 사람 스물이야. 명함은 가짜더라.‘
내가 문자를 정독하기 무섭게 그가 나타났다. 그는 내 후드 모자를 왼손에 쥐고서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귓가에 꽂히는 여러 단어는 뜻을 알 수 없었다. 업계 쪽에서 쓰는 전문 용어 느낌이었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그의 명함이 만져졌다. 신경질적으로 명함을 구겼다. 나의 심기를 알아차린 그가 질문했다. “뭐가 그렇게 언짢아? “오셨네요? 이담씨.”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는 나 지금 놀랐어요, 가 선명히 드러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천천히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이류 양은 뒷조사가 취미 신가 봐. 클록터 소속 이담입니다. 나이는 스물여섯이고요.” “거짓말쟁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마치 염소 같은 내 목소리에 그가 흠칫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폭소하는 이담의 모습에 마음이 초조했다. 아무리 불량한 거리라지만 도시 안인데 저렇게 풀어져도 되는 건가? 이모션 사이클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감춰야 하는 게 상식이고 그게 생존 본능이다.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이담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문제의 근원은 서화겠지. 스물여섯이나 스물이나 같은 성인인데 큰 문제 있나?” “여섯 살 차이는 아무래도 큰 편이죠.” 이담은 내 말을 수긍할 의지가 없는지 구석에 있던 깡통을 바로 차버렸다. 경쾌한 소리가 맑은 바다를 연상시켰다. 쓰레기 속 깡통 주제에 바다라니. 서화가 직접 이실직고한 이상 위치추적기를 달고 다닐 이유는 없었다. 내 몸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던 추적기는 손가락 두 개에 미심쩍도록 쉽게 떨어졌다. 이를 바닥에 던지고 밟아 부쉈다. 나의 과감한 행동에 이담이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지금 성질부리는 거?” “신경 쓰지 마세요.” 작은 위치추적기가 가루가 되도록 연신 밟았다. 잘게 부서진 조각을 깡통과 함께 구석에 처넣은 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가요?”
[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반항의 향>은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➃ 붉음과 어깨를 나란히 (3)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