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는 곽재선 문화재단과 함께하는 제1회 하이니티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인 금알음 작가의 「세계에서」와 김재인 작가의 「반항의 향」을 매주 1회씩 순차 연재합니다. 이번 연재는 청소년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고,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많은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독창적인 상상력과 깊이 있는 시선이 담긴 두 작품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편집자주>
제1회 하이니티 청소년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 금알음 작가의「세계에서」
학교에 대해 꽤 비관적으로만 얘기한 것 같은데, 사실 그다지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어떤 척도이든 삶을 그래프로 나타냈을 때 중간 범위에 있는 자라면, 또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안정적인 궤도를 구축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였다. 첨단 사회에 접어들며 교육 체제가 새롭게 정립된 이후, 공교육을 위한 모든 학교는 각각 하급, 중급, 상급 학교로 통합되었다. 대개 만 17세에 입학하는 중급 학교부터는 필수 교육이 아니기에, 학문 분야에 진학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하급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 상공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그러하다. 다만 과학과 기술을 바탕으로 한 지금 사회에서는 학력이 높을수록 사회적인 위치나 명성이 높아지는 편이었으므로, 보통은 학과를 골라갈 수 있는 상급 학교에 진학하려고 발버둥 치는 추세다. 그리고, 내가 다니는 학교는 상급 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중급 학교였다. 보통의 중급 학교와는 다르게, 까다로운 입학시험을 치르고 들어오는 꽤 명망 높은 곳.
‘세상의 진리를 꿰뚫어 보고 싶은 자, 자신을 이겨내라.’
교무실 벽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옛 철학자의 명언 같은 학교 슬로건이라면 그 성격이 어느 정도 설명이 될까. 딱 봐도 재미없어 뵈는 철학을 가진 이곳은, 전국에서 상급 학교에 갈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라고 불렸다. 그래. 이곳의 모든 이야기는 그런 호흡으로 흘러갔다. 이름보다는 번호로 학생을 호명하는 선생님들, 지나치게 경직된 생활 환경. 모든 신경을 발전에 치중한 이곳은 여긴 그런 고루한 이야기에 걸맞은 고루한 곳이었으나, 이곳에 귀속되어있는 내가 불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인생도 그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으니까.
꽤 운 좋게도, 나는 공부를 꽤 잘하는 편이었다. 이론을 암기하거나 수식을 풀어가는 일들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눈앞에 주어진 것을 공부하는 것을 그다지 끔찍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거기서 남들 하는 것보다 조금 더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성실하다 여겨지기 시작했고, 일반적인 흐름에 따라 그런 아이들이 보편적으로 모이는 이 학교에까지 흘러들게 된 것이다. 나뭇잎이 개울에 흘러가듯이, 사회의 흐름에 따라 적당히 흘러가는 것. 그게 지금껏 내가 살아온 삶이었다. 아, 물론 감히 유감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정상적이지 못한’ 궤도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는 나는, 평범한 삶이 가장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오히려 큰 격동기 없던 내 인생에 감사했다. 어디서나 모나지 않은 돌이 잘 굴러가는 법이니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리 흐름에 따라서만 살았기에 치러야 할 대가가 있던 걸까. 그 안온한 만족에 이상한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그 파문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은 오늘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포인트를 준다는 소리가 별로 달갑지 않게 느껴진 것은, 분명 오만한 소리일 테니까. 나는 습관적으로 포인트 창을 열었다 닫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더 어릴 때도 이보다 성숙하게 굴었던 것 같은데, 왜 하필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러는지.
“야, 여명! 왜 저녁 시간에 사라졌어? 한참 기다리다가 나 먼저 먹었잖아.” 짙은 한숨과 함께 교실로 들어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한결이다. 평균보다 조금 옅은 색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려온 한결이, 멍하니 창을 내다보던 내게 거칠게 어깨동무를 했다. 한결은 접촉에 거리낌이 없었고, 유독 몸 쓰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사람의 온기가 낯선 내게도 익숙해진 지 오래인 접촉을 가만히 받아들인 나는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미안. 교무실 다녀왔는데 늦어져서…. 많이 기다렸어?” “배고파 죽는 줄 알았거든? 그래도 늦게 가니까 기계들이 웬일로 남은 후식 두 개씩 주던데.” 한결이 투명한 포장지에 감싼 초콜릿 두 개를 장난스레 흔들어 보였다. 익숙한 몸놀림으로 내게 하나를 던진 한결은 무언가 생각난 듯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반에 전학생 온다던데. 교무실에서 그런 소문 못 들었어? 그거 진짜야?” “진짜래. 반장이니까 도와주라고 불려 간 거야. 같은 방 쓰라던데.” “와, 마지막 학기에 진짜 전학을 온다고?” 한결의 경악한 표정에 나는 초콜릿을 주머니에 챙기며 어깨를 으쓱였다. 식당에서 고를 수 있게 되어있는 일반식에는 종종 후식이 나온다고 했다. 나는 오랜만에 마주하는 단 것의 존재를 달가워하며 만족스레 포장지의 바스락거림을 느꼈다. 놀란 듯한 한결의 반응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시험을 끝내면, 곧 모든 포인트를 종합해 상급 학교에 원서를 넣는 시기가 온다. 익숙한 학교를 떠나와 굳이 낯선 곳에서 마지막 시험을 본다는 생각은 좀 많이 특이한 것이었다. 무모한 짓이기도 했고.
“좀 특이한 애인가 보지.” 무감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한결이 진심으로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작 이상한 건 오히려 지나치게 침착한 내 반응인 듯하다. 나는 놀라울 정도로 전학생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생각을 해봐야 그냥 전학을 오는구나, 정도. 신경 써야 할 일이 하나 늘었는데도 이렇게나 기복이 없는 건 조금 신기하긴 했다. 내가 원래 이렇게 차가운 사람이었던가. 한동안은 이러한 종류의 사고를 해볼 기회도 없었기에, 들이차는 생각이 조금은 생경하다. 타인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없는 내 인성이 이대로 괜찮을까 잠시 고찰해 보는 사이, 한결이 으이구, 라는 이상한 소리를 뱉으며 내게 다가와 헤드록을 걸었다. “그나저나 무슨 졸업반 애한테 그런 일까지 시키냐. 담임도 사람 좋은 척하면서 너무하다니까.” “포인트 챙겨준다니까 나한텐 좋은 일이지 뭐. 나쁜 일은 아니기도 하고….”
멈칫.
나는 순간 하던 말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우연히 앞을 올려다본 찰나, 교실 문에 난 작은 유리 너머 낯선 얼굴과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왜? 누구 있….” 내가 말을 멈추자, 한결도 문 쪽을 쳐다보더니 낯선 인영을 마주하고 말을 멈췄다. 누구지. 다른 학년이 이 층에 올 일은 거의 없고, 우리 학년 중엔 저런 얼굴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 기억이 틀린 건 아닐 것이다. 저 강렬한 파란 눈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면, 기억에 없을 리가 없으니까. 문득, 바다를 실제로 본 적이 없음에도, 저 파란 눈이 바다와 같다고 생각했다. 문득 떠오른 생각대로라면, 저 낯선 이는, 아마…
똑똑.
잠시 간의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저쪽이었다. 인영이 시야에서 사라진 잠깐 사이, 낯선 이가 교실 문을 연 것이다. “안녕. 전학생인데, 혹시 A동 기숙사가 어딘지 알아?” 조금 낮은 목소리가 듣기 좋게 교실에 울려 퍼졌다. 문 사이로 보이는 전학생은 키가 유독 컸다. 또래보다 성숙해 보이는 얼굴이 꽤 훤칠했기에, 나는 순간 말을 잊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빨리 만날 줄 몰라서 순간 당황했는데, 전학생이 오면 지켜야 할 반장의 의무가 있었다. “그… 교무실은 먼저 다녀왔어? 기숙사는 여기서 좀 멀어.” “응. 기숙사로 가서 사감 선생님을 뵈라고 하셨는데, 도무지 어딘지 알 수가 없어서 교실로 먼저 올라온 거야.” “아, 그럼 나랑 같이 가자. 얘기 들었는진 모르겠는데, 내가 반장이자 네… 룸메이트야.”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는지 말이 조금 빠르게 튀어나왔다. 첫 만남에 룸메이트인 걸 밝히는 건 조금 갑작스러웠을까. 내뱉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하는데, 전학생은 삐걱대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어른스럽게 싱긋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친절하구나! 룸메이트라니 잘 부탁해.” “… 아, 응. 한결아, 나 먼저 갈게. 이따 자습실에서 보자.” “아, 알겠어. 조심히 들어가. 그… 전학생 쪽도.” 잠시 당황한 한결도 이내 평소처럼 넉살 좋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부러 큰 걸음으로 교실을 나섰다.
교실을 나서고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낮은 적막이었다. 복도는 저녁 시간대를 지나 거의 인기척이 없었고, 전학생과 발걸음을 옮기자 고요한 복도에 두 사람분의 발걸음 소리만 울려 퍼졌다. 황혼 녘의 적막한 복도는 온갖 상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으나, 정작 그 속에 있는 나는 반쯤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단체생활을 한 게 몇 년인데, 이런 상황은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필이면 왜 내가 반장일 때 전학을 온 걸까. 머릿속으로 아무리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상상을 해봐도, 나오는 결과는 매번 처참했다. 전학생의 적응을 도와줘야 한다는 의무감과 어색함이 섞여 오히려 말문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때, 불쑥 나보다 조금 더 높은 시야의 전학생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창문 너머 역광으로 비치는 햇빛 탓에 전학생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름이 뭐야?” 어색한 침묵 속, 적막을 먼저 깬 건 결국 그쪽이었다. “… 아, 난 여명이야. 설명 들었겠지만 성은 안 불러… 너는?” “여로라고 해. 나랑 이름이 비슷하네.” 만나서 반가워. 전학생이 나보다 조금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마치 구원이라도 받은 심정이었다. 기숙사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고, 길을 가는 동안 내내 어색한 대화를 끌어나가야 했다면, 차라리 졸도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여로. 나는 내 이름의 발음과 비슷한 이름을 잠시 입속에서 굴려 보았다. 받침 없이 유한 이름이 듣기 좋았다. 학교에서는 모두가 성 없는 이름으로 불렸으므로, 여로라는 이름도 두 글자로 이루어진 외자 이름은 아닐 터였다. 이 학교의 전통이라고 하는데, 학생들은 아예 입학할 때 성을 제외한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원할 경우, 기존의 이름을 버리고 이름을 다시 지을 수도 있었다. 입학과 동시에 본래의 자신은 잊고 학문에만 전념하라는 성스러운 의미라고, 언젠가 설명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여로라는 이름도 본인이 지은 것일까. 입술을 달싹인 나는 이내 턱 끝까지 올라온 질문을 단념하고 속으로 삼켰다. 보통 처음 본 사이에서 물어볼 만한 것은 아닐 것 같았다.
“새벽의 빛?” “어?” “여명은 새벽의 빛이라는 뜻이잖아. 좋은 이름 같아.” 전학생이 나와 눈을 맞추며 싱긋 웃었다. … 그러니까, 어느 대답을 원하고 꺼낸 말이지? 순간적으로 아득해진 기분에 눈을 굴리는데, 문득 전학생의 파란 눈이 보였다. “… 아, 고마워. 그런 말 오랜만에 듣네.” … 어딘가 잔물결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에 나오는 대답은 반 박자가 늦었다. 학교에서 2년 하고도 3개월이 넘게 지나니 여명이란 이름은 그저 숱한 대명사 중 하나일 뿐이었고, 누군가 뜻을 들어 이름을 칭찬해 준 것은 처음이었기에 순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심장이 간질거렸다. 도무지 익숙지 않은 느낌. 나는 정상적이지 못한 감정들을 내리누르려 눈을 감았다. 숨결을 느끼고, 티가 안 나게 조심하며, 가볍게 날숨을 내쉰다. 감정을 정제하는 것은 세상을 견디기 위해 가장 먼저 익힌 것이었다.
일단 할 일을 하자. 불필요한 감상에 젖는 것 말고도 할 일은 충분히 넘쳐났다. 특히 모범을 보여달라 요청받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마음을 다잡은 나는 조금 더 굳건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초면인 이와 하는 사적인 대화가 익숙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도 온갖 토론과 발표로 훈련된 나는 원래 이렇게 미숙한 사회성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생활 안내는 받았어? 포인트 박스는 제대로 보이고?” “응. 눈앞에 있는 창 말하는 거지?" 여로가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그 작은 행동에 여로의 눈앞에 작은 창이 떠오른다. 아무런 장치 없이 허공에 홀로그램이 떠오르는 장면은, 옛말로 표현하면 마법 같기도 하다. 여타 학교와는 다른 이 포인트 시스템은, 상급 학교 진학률을 높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A-13, + 10p. 사유, 솔선수범하는 생활 태도.]
가령, 이런 식으로. 작은 창이 순간의 성취를 바로 보여주는 식이었다. 나는 간단한 손짓으로 내 창을 띄워, 하나 와 있는 알림을 지워냈다. 파란 창은 시야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투명했다. 학교에 입학할 때 학생들은 생체 칩을 하나씩 심는데, 그 칩이 포인트가 쌓이는 ‘기록부’를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게 해주는 방식이었다. 심지어 칩은 기록부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메신저나 수업 도구로도 기능했다. 체계 자체는 이미 승진이나 입시에서 중요한 평가 항목으로 깊숙이 자리 잡아 보편적인 평가 항목으로 쓰였지만, 아예 기록부가 신체에 내재 되어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기록부를 시각화해서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행동 하나하나에 큰 영향을 주었다. 포인트를 얻고 잃는 것이 가시적이었기에 더더욱. 눈앞에 떠오른 것은 단순한 점수가 아니라 삶 자체를 표방했고, 그 하나를 통해 그 순간 옳은 길로 가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었다. “그게 포인트라는 거야? 아까 그렇게 강조를 하셔서 궁금했거든.” “제일 중요하지. 이 시스템 때문에 여기 온 애들이 대부분일걸.” 나는 대답을 하면서도 어딘가 의문스러운 눈길을 지울 수 없었다. 전학이 힘든 우리 학교를 찾아온 거라면, 포인트 체계쯤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그의 눈은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 생소해 보였다.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차라리 포인트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자세히 이어 나가기로 했다.
아까 온 알림은 인성 항목의 포인트였다. 입시에 반영되는 포인트는 두 갈래가 있는데, 인성 항목의 ‘포인트’는 모두가 공인할 수 있을 법한 옳은 일을 했을 때 학생에게 지급되는 것이었다. 간단한 상벌점 체계인 것 같은 이 방식은 학생 평가에 반영된다는 명목 때문에, 각 과목의 시험 점수와 비등할 정도로 중요했다. 교육 체제 개편 전엔 부정부패가 연루될까 하는 의혹 때문에 생활 점수 따위의 포인트가 입시에 반영되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의 기술로는 사사로이 포인트를 지급하거나 빼앗지 못했다. 실생활에 대한 감시가 아니냐는 지적을 빼면, 포인트로 개인을 평가하는 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인성 항목과 별개로 실험과 탐구에서 적립되는 것은 진리 탐구 적극성에 속했다. 진리 탐구는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학생이라는 것을 드러내 줘서, 그 항목에서 쌓인 포인트가 어느 수준을 넘어가면 한 학교가 아니라 여러 학교에 지원할 수도 있었다. 포인트가 높으면 높을수록 상급 학교 진학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리 전국 단위로 하는 경쟁이라도 한 중급 학교에서 뽑을 수 있는 학생 수는 정해져 있었기에, 중급 학교의 경쟁은 굉장히 치열한 편이었다. 진학률이 높다는 것은, 아주 단순히 그 뽑을 수 있는 숫자만큼은 모두 진학할 수 있다는 의미다. 입시는 괜히 눈치 싸움이 아니었다.
“생활 태도 같은 부분에서도 점수를 받고, 발표나 봉사 활동 같은 곳에서도 점수를 받아. 누적되는 건 당연하고, 깎일 수도 있는 점수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나는 몇 번이고 그 중요성을 전달하려고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이미 시스템의 원리는 알고 있을 테지만, 이론과 실제 생활은 전혀 다른 법이니 말이다. 생각보다 생활 태도에서 많이 깎이니 주의할 것, 적극성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므로, 일단 활동할 수 있는 뭐든 참여하고 볼 것, 그래도 우리 학교는 차별성이 있어서 다른 학교보다는 입시에 유리하다는 것 표면적인 응원까지. 간간이 맞장구를 치던 전학생은 마지막 대목을 이야기할 때쯤 고개를 끄덕이던 것을 멈추었다. 달라진 흐름에 잠시 시선을 돌리니, 전학생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기선 칭찬스티커 같은 게 중요하구나. 어릴 때도 그다지 관심은 없었는데….” “… 응?” “유치 학교 다닐 때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면 줬던 노란 스티커. 네 학교에선 안 그랬어? 기억 안 나?” 전학생이 장난스레 웃으며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덩달아 내 눈도 크게 뜨였다. 칭찬스티커? 그러니까, 포인트를 얘기하는 건가? 잠시 멍해 나는 이내 고개를 젓고 입을 달싹였다. 칭찬스티커 따위에 비견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아무래도 ‘포인트’의 개념에 대해 이해를 잘하지 못한 듯하다…. “포인트는 그런 개념이 아니야. 계속 얘기를 들었겠지만, 입시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알아. ‘모범적으로’ 생활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지?” 명심할게. 말을 이어가는데, 전학생이 뚝 끊듯이 대답했다. 여전히 말간 웃음을 입에 걸고 있었으나, 나는 순간 그 웃음 속에 다른 어떤 감정이 비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 머리 조심하고. 특히 다치면 안 돼.”
그 순간 석양이 바다 한 가운데 내려앉았다. 나는 내려앉으려는 분위기에 침음을 삼키면서, 부러 과장된 손짓으로 칩이 있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 말간 것에서 모종의 위기감이라도 감지한 것인지, 나는 잠시 그 말간 것으로 인한 사고가 없게 해달라고 빌어야 했다. 칩이 파손되면 가장 먼저 교무실에 알림이 간다. 혹시 모를 폭력 상황이나 사고에 대비해서, 학생을 보호한다는 명목도 있었지만, 제일 큰 이유는 포인트가 중앙 처리 시스템에서 정산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는 칩에 내장된 메모리에 온갖 포인트와 점수가 기록이 되었으므로, 칩이 파손될 경우 입시에 지장이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처음 보는 이라도, 그것을 경시해 끝내 절망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조금 애타는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로는 내 행동을 따라 자리가 잡힌 지 얼마 되지 않은 부분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내게 닿는 시선이, 왠지 모르게 진득하다. … 그 찰나, 섬뜩하게 느낀 그 기시감은 기우였을까. 무언가라도 말을 꺼내보려 입을 달싹이는 동안, 전학생은 먼저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손짓했다.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익숙한 건물이 보인다. A 기숙사. 열띤 설명을 하는 사이, 우리는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라 있었다. 나는 침음성을 뱉으며 애써 별다른 생각을 내리눌렀다. 고갯짓 한 번에 상념을 떨쳐내고는 말마따나 ‘모범적인’, 친절한 행동을 취하며, 투명한 유리문을 열었다. “환영해. 앞으로 잘… 지내보자.” 거기까지가 내 인내심의 마지막이었다. 혹여 더 이 이상한 기분에 매몰되어 버리기라도 할까, 나는 사감실로 전학생을 안내하는 동안, 부러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순간이었지만, 전학생의 바다를 담은 눈동자가 조금 어둑하게 느껴진 듯도 했기에. 그 파란 눈을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내 이어진 옅은 불안과 다르게, 그날 느낀 기시감은 단지 한 순간의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여로는 내 생각보다 훨씬 잘, 아니, 아주 훌륭하게 학교에 적응해 나갔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별달리 도와줄 것도 없었다. 여로는 칭찬스티커 따위를 운운한 것과 다르게 나름대로 착실하게 포인트를 모으려 했고, 무엇보다 큰 어려움 없이 학급에 녹아들었다. 약간의 잡음은 있었지만, 마치 원래 거기 있던 사람인 것처럼.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은 있었다. 여로에게는 범접하기 힘든, 그러니까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모종의 신비감이 있었다. 자기소개 때 안 사실이지만, 여로는 우리보다 한 살이 많다고 한다. 거기다 출신지나 전학을 온 이유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기에, 그의 존재는 어딘가 조금 낯설면서도 특이했다.
그리고 아마…, 그게 내 어떤 무언가를 홀린 듯했다. 어딘가 기이한 빛을 띠는 그 모습이 범상해 보이진 않았기에, 나는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여로에게 점점 더 많은 눈길을 주고 있었다. 신기한 건, 아까 말했듯 여로는 물이 새어 나갈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는 점이다. 전학을 오고 사흘간 적응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내내 붙어 다니면서, 여로의 불안한 모습을 한 번도 찾아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도와줄 게 없으니 오히려 내가 직무를 태만하게 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들어서, 나는 어떤 것이라도 도와야 한다는 조급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조용히 여로를 관망하기만 하던 그때는 모르고 있었다. 정작 내가 그 신비성에 데이게 될 줄은. 나는 조용히 책을 읽는 여로에게 다가가 그의 책상을 톡톡 쳤다. 그가 눈을 들자, 나는 깊은 바다를 담은 눈을 조용히 마주할 수 있었다.
“저기, 다음 시간 이동수업인데….” “아, 기하학이었나? 같이 가자.” 여로가 이미 태블릿에 띄워놓은 기하학 교과서를 슬쩍 보이며 대답했다. 벌써 시간표도 외운 건가? 나는 놀란 마음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로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어떻게 그가 이 시기에 전학 오는 것이 가능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전국 시험 성적이 좋았다더니, 여로는 진도가 맞지 않는 심화 수업을 어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여로는 그날 수업한 내용을 가지고 직접 문제를 만들어서 푸는 모습을 보였다. 이해하기도 급급한 수업 내용을 자유자재로 응용한다는 건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여로가 수준 이상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것만이 여로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아니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여로가 낯선 이들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적대감은 그리 드문 존재가 아니다. 가뜩이나 신비한 존재감에 압도적인 비상함이 더해지자, 전학 첫날부터 호기심과 적대감을 반쯤 섞인 말들이 그에게 쏟아져 내렸다. 다만 그것은 어떤 음성이나 발화를 통해서가 아닌, 무언의 시선이었다. 여로를 향한 감정이 늘어난 경쟁자에 대한 경계이든 동경이나 놀라움을 담은 것이든, 그것들은 말보다는 날것의 시선으로 여로를 향했다. 하지만 여로는 그 시선들을 부담스러워하거나 몸을 움츠리는 대신, 그 시선들을 유연하게 받아치기를 택했다. 시선들에 맞선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몸을 낮춰 눈을 맞추면서. 마치, 그것들의 근원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언젠가 식당으로 향하는 그에게 몰린 시선이 지나치게 과도하기에, 나는 식사를 하면서 조심스레 그에게 그 시선 따위들이 불편하지 않냐고 물었다. 어쨌든 견디기 힘든 일은 맞았으므로, 반장으로서도, 룸메이트로서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일반적인 일은 아니니까 궁금해하는 게 당연하지. 어쨌든 경쟁자가 한 명 늘어난 거니까 내 존재를 마냥 달가워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날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지.’ 여로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했다. 모두가 인정할 수 있도록 완벽한 논리를 구사하면서, 원래 있던 아이들의 처지까지 부드럽게 포용하는 것. 여로가 적대에 대응하는 방식은 적대가 아니라 다정한 눈 맞춤을 통한 이해였다. 교단에 서있는 선생님들조차 이렇게 사고하지 못하는데. 여로는 어쩌면 보통의 어른들보다도 훨씬 성숙하게 이야기할 줄 알았다. 어떻게 해야 저 정도의 성숙함을 가질 수 있는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순수한 감정으로 시선에 대응하는 여로를 본 아이들은 더는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지 못했다. 여로가 그들을 대한 방식처럼, 그저 조용하게 그를 포용할 뿐. 다들 쉬쉬하던 내면이 타인의 말을 통해 수면 위로 올라오자, 오히려 인간적인 인정과 수용을 불러온 것이다. 그 주체가 적개심을 쏟아낸 대상이고, 원망은커녕 다정한 목소리로 이해했으니, 낡아빠진 일말의 도덕심이라는 것이 자극받은 것은 더더욱. 여로는 고작 전학 온 지 삼 일 차에 진작 이 학교에 있었어도 어렵지 않게 수석을 차지했을 완벽한 아이라고 평가받았다. 유감을 가지는 애들은 거의 없었다.
“애들하고 친해지기 영 어렵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동 수업실로 이동하는 길, 함께 걷던 여로가 별안간 말을 걸었다. 불쑥 만들어진 주제가 꽤 의외였기에, 나는 곁에 있는 여로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쉬는 시간에는 애들하고 잘 얘기하는 것 같던데. 어려운 게 있었어?” “보통 과제가 있을 때만 먼저 말을 걸더라고. 그렇다고 내가 먼저 다가가면, 뭐랄까. 알게 모르게 어색해하는 것 같아서.” 여로가 머쓱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미려하게 눈을 접은 그의 뒤로, 정오의 햇살이 실내에 들어오고 있었다. 충분히 할 만한 고민이었지만, 나는 어쩐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월등한 사람을 보면 품는 감정은 두 가지다. 질투하여 적개심을 품거나, 동경하거나. 여로는 그 두 가지 시선을 모두 받고 있었으니, 어색함은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르겠다. 네가 잘나서 그래. 순간, 정제되지 못한 문장이 머리에 떠올랐다. 하지만 이것을 대놓고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기에, 나는 차라리 다른 이유를 대기로 했다. “글쎄… 그건 네가 문제라기보단, 다들 새로 친구를 만드는 걸 조심스러워해서 그래. 오래 친했던 게 아닌 이상, 필요한 얘기 말고는 대화 자체를 잘 안 하기도하고.” “필요한 대화 말고는? 필요한 대화라는 게 따로 있어?”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대화는 있잖아? 포인트나, 입시나, 졸업 시험 같은 거…” 정말이냐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오히려 질문을 받은 내 말끝이 흐려졌다. 오히려 그 당연한 걸 왜 묻는지 궁금한 건 내 쪽이었는데, 정작 내가 샅샅이 조사받는 느낌이 들었다.
이따금 저 잔물결 같다고 생각한 눈을 마주하면, 나를 이루고 있는 체계가 온통 뒤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건의 진위를 제대로 말하지 않는 용의자가 된 기분이라면, 혹은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진실을 꾸며내는 사기꾼이 된 기분이라고 하면 비유가 될까. 하지만 지금 말한 건, 직접 눈으로 겪은 사실이었는데. 선생님들도 친구들끼리 쓸데없이 얘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유독 엄격한 선생님은 아예 오랜 친구와도 같이 다니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차피 경쟁은 혼자 이겨내야 하는 외로운 싸움이라면서. “다들 거기에만 신경 쓰고 있으니까, 그 외엔 얘기할 거리가 없는 건 당연하지. 좀 낯설더라도, 금방 적응될 거야.” 어미가 움츠러든 말이 변명처럼 튀어나왔다. 거짓된 어른스러움으로 무장해 선구자가 되면, 대화의 흐름은 곧 내게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예의 있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나는 먼저 나를 방어해야 했다. 여로가 할 말이 무엇이든, 그 말이 이곳의 흐름으로 가지는 않을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이 든 탓이었다. … 분명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없지? 순간 사고의 흐름이 실타래처럼 얽혀 버렸다. 논리적으로 대답을 해줘야 여로도 납득할 수 있을 텐데, 말을 하면 할수록 혼란스러워지는 건 나였다. 거기다, 저 파란 무언가가 여로의 성정처럼 담백한 솔직함을 요구하는 듯했기에. 또, 이것이 왜 당연한 건지 물어보면, 대답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해서. 그저 내 목소리에 확신이 담겨있지 않은 것을, 여로가 알아채지 못했으면 하는 소망이었다.
“넌 적응이 됐어?” “어?” “버겁다면 적응이 됐다고는 할 수 없잖아. 넌 그걸 당연한 거라 했지만… 당연한 게 버거울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두 명분의 발걸음이 동시에 뚝 멈추었다. 여로는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기 위해서, 나는 처음 듣는 질문을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복기해 내기 위함이었다. 주어진 질문이 말 그대로 생경한 탓이다. 적응이 되었냐고… 처음엔 질문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중급 학교 졸업반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 아직도 적응되지 않았다면 그게 문제일 테니까. 다만, 주저 없이 고개를 저으려던 내 행동을 멈춘 건 심장에 걸린 여로의 마지막 말이었다. 당연한 게 버거울 수도 있다고… 그리 어렵지 않은 문장인데도,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고루하고 낡아빠진 옛 규칙에서 벗어날 새로운 이치를 발견한 과학자처럼, 사고가 잠시간 멈췄다가 새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원래 그쪽으로 가기를 원했던 것처럼, 조금은 다급하게. 캐내어 보니, 이치는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미 먼 옛날에, 꾹꾹 눌러 날숨에 날려버린 것이었다. 그야, 당연한 것도 버거울 수 있다면… 나는 어제와 현재와 다가올 내일이 버겁고 버거울 거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었을 테니까.
너무나 당연해진 일들과 사고는, 아예 버거운 일들을 버겁다고 생각하는 길을 막아버린다. 그것은 일종의 방어 기제와 같았다. 고된 일 하나, 하나를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하면 그 누구도 다가올 내일을 견딜 수 없었을 거다. 차라리 하나의 버거움을 하나의 한숨에 날려버리는 게 더욱 효율적이고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래, 그 보편적인 이치를 모르는 게 아니란 말이다. 무척이나 견고해서 이제는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로의 한 마디가 지반을 흔들어 놓았다. 그렇다고, 버거운 일이 버거운 것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던 것은, 그다지 좋은 징조는 아닌 것 같다는… 조금 반항적인 예감. 그 순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깊어지는 생각을 감당할 수 없어서, 나는 고개를 쳐들어 여로를 바라보았다. 폭탄을 던진 여로는 길어진 내 상념을 끊지도, 답을 내라고 종용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답을 원해서 던진 질문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이. “생각을 피하지 마.” “… 응?” “혼란스러우면 그것도 받아들여. 그게 정답이야.” 여로가 단단한 눈빛으로 말했다. 몇 초간 침묵이 내려앉고, 먼저 걸음을 옮긴 것은 여로였다. 반사적으로 그를 따라나서면서, 나는 순간 어딘가에 홀려 있다가 제정신을 차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수면에 던진 조약돌이 가라앉으면 파문도 곧 잠잠해지는 것처럼, 마음속 낡아빠진 이치가 다시 여로의 말을 부정했다. 내가 받아들이는 게 정답이라니. 나는 답을 찾아야 하는 사람이지, 답을 내리는 사람이 아닌데.
그래, 분명 그 말이 정답일 테다. 하지만, 이미 열어버린 새 활로는 이치를 덮어버린다고 잊을 수 있을 만큼 미약하지 않은 듯했다. 한 번 꼬리를 튼 의문은 교실에 도착하고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떠나질 않았으니까. 나는 기하 수업을 듣는 도중에도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생각을 무시하려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세계에서>는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① 나그네 하나 (3)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