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KBS 제공 알파고를 상대로 인류에게 최초이자 유일한 1승을 안긴 전설의 바둑기사 이세돌. 그러나 그는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직업의 변화를 맞이한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스스로 “백수가 됐다”고 고백한 이세돌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땀을 뻘뻘 흘리며 맥주를 따르고 수영장을 청소하는 그의 모습에 해외에서는 “왜 이세돌에게 이런 일을 시키느냐”는 반응까지 나왔다.
하지만 정작 이세돌은 어떤 일이든 진지하고 묵묵하게 임한다. 낯선 일 앞에서는 소년처럼 순수한 호기심을 드러내다가도, 한번 시작한 일에는 놀라울 만큼 집요하게 몰두한다. 세계 정상에 올랐던 천재 기사의 권위나 자존심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작은 일 하나에도 최선을 다하는 그의 태도에서, 이세돌이 왜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지난달 23일 첫 방송된 KBS2 예능 프로그램 ‘백수 이세돌’은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1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이세돌은 고층 건물 유리창 닦기부터 야구장 맥주 판매, 공사 현장 미장 작업, 한강 야외 수영장 폐장 청소, 요구르트 배달까지 AI가 쉽게 대체할 수 없는 다양한 노동 현장에 뛰어든다.
이세돌은 프로그램 제목을 듣자마자 “이거다”라며 큰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그간 ‘데블스 플랜: 데스룸’, ‘뇌볼루션: 기억의 지배’, ‘데스게임: 천만원을 걸어라’ 등 두뇌를 활용한 서바이벌과 퀴즈쇼에 출연한 적은 있지만, 인간 이세돌의 매력을 전면에 내세운 예능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세돌 역시 자신이 낯선 노동 현장에 뛰어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고 한다.
사진=유튜브 채널 KBS 한국방송 그렇게 삶의 현장에 던져진 이세돌을 보고 있으면, 마치 사회 초년생이 된 누군가의 아버지를 지켜보는 듯한 짠한 감정이 밀려온다. 특히 어느 현장에서든 양복 차림을 고수하는 모습이 묘한 애틋함을 더한다. 이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이세돌이 일을 대하는 자세다.
맥주를 따를 때마다 거품만 잔뜩 올라와 관중들에게 연신 사과하고, 고된 노동을 마친 뒤에는 컵라면으로 허기를 달랜다. 마땅히 잠잘 곳이 없어 KBS 당직실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한다. 다음 날에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며 요구르트를 배달하고, 저녁에는 수영장을 청소하다 엉덩방아까지 찧는다. 그럼에도 이세돌은 좀처럼 불평하지 않는다.
한 방송 관계자는 “이세돌은 잔꾀를 부리지 않는다”며 “예능에서는 출연자들이 힘든 상황에 투덜거리거나 제작진과 타협하는 모습도 웃음 포인트가 되는데, 이세돌에게는 그런 게 없다. 모든 일을 너무 진지하게 하다 보니 예능이 다큐멘터리가 됐다”고 평했다. 이어 “그 와중에 소년처럼 순수한 모습이 드러나면서 오히려 자연스러운 웃음이 나온다”고 덧붙였다.
사실 연예인들의 직업 체험은 이미 익숙한 예능 소재다. ‘워크돌’ 등 비슷한 형식의 프로그램도 적지 않다. 하지만 ‘백수 이세돌’은 출연자가 이세돌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AI와의 역사적인 대결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천재가 AI 시대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노동을 찾아 나선다는 설정 자체가 남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여기에 승부사의 집요함과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공존하는 이세돌의 매력이 더해지면서 익숙한 직업 체험 예능에 새로운 색깔을 입혔다.
‘백수 이세돌’은 정규 편성이 아닌 5부작 특집 프로그램이다. 다만 제작진과 이세돌이 제작발표회에서 시청률 3%를 넘기면 정규 편성을 고려해 달라는 공약을 내건 만큼, 향후 성적에도 관심이 쏠린다. 5일 기준 최고 시청률은 2.3%(닐슨코리아 전국 가구 기준)로, 아직 목표에는 미치지 못했다.
사진=유튜브 채널 KBS 한국방송 오는 6일 방송되는 3회에서 이세돌은 부산으로 향해 고층 건물 유리창 청소에 도전한다. 약 51m 높이의 KBS 부산총국 건물에서 로프를 이용한 작업에 나설 예정이며, 배우 한상진과 최다니엘이 일일 서포터로 합류한다. 이세돌은 “뭘 시킬지 몰라 속옷과 양말을 싸왔다”며 이번에도 예측할 수 없는 도전에 나설 준비를 마쳤다.
바둑판을 떠났어도 이세돌의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승패를 가르는 상대만 달라졌을 뿐, 눈앞의 일에 온 힘을 쏟는 태도는 여전하다. ‘백수 이세돌’이 보여주는 것은 천재의 추락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서도 진심을 다하는 한 사람의 변함없는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