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세계에서 ➁ 산딸기 콩포트 한 스푼 (3)
박지효 기자
등록2026.08.28 15:28
일간스포츠는 곽재선 문화재단과 함께하는 제1회 하이니티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인 금알음 작가의 「세계에서」와 김재인 작가의 「반항의 향」을 매주 1회씩 순차 연재합니다. 이번 연재는 청소년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고,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많은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독창적인 상상력과 깊이 있는 시선이 담긴 두 작품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편집자주>
제1회 하이니티 청소년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 금알음 작가의「세계에서」
결국 나는 정제하지 못한 감정들을 품고 일과를 마쳤다. 기숙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운 게, 싱숭생숭한 마음도 썩 편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종일 혼란과 의문에 쓸린 가슴 한 켠이 시렸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자, 세 평 남짓한 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발장에는 이미 여로의 신발이 있었다. “늦게 오네. 고생했어.” 여로는 맞은편 침대 위에 누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인기척에 나를 바라본 그가 손을 흔들자, 나는 지친 눈으로 인사를 받으며 들고 있던 짐들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자습 끝나는 시간 다 똑같은데, 고생은…. 나 먼저 씻어도 돼? 아까 물 쏟아서 축축하네.” “아, 나 이미 씻었어. 천천히 해.” “벌써 다 씻었다고?” 나는 이상함을 담아 반문했다. 짧은 밀색 머리카락에 물기가 어린 것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 했지만… 아직 열 시 십 분 밖에 안 됐는데? 자습은 열 시에 끝나고, 기숙사에서 여로의 자습실이 조금 더 멀었다. 그런데도 여로는 항상 나보다 방에 먼저 들어와 있는다. 이따금은 이렇게 어찌했는지 모를 속도로 잘 준비를 마쳐두곤 했다. 나는 의문 어린 눈을 애써 욕실로 향하게 하고 빠른 속도로 목욕을 했다. 기숙사에서 입는 생활복, 통칭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서늘한 공기가 맨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추운 날씨는 아닌데 왠지 조금 소름이 끼쳐서 잠옷 위에 가디건을 급히 걸쳐 입었다. “기분이 안 좋아?” “… 응?” “표정이 어두워. 씻고 나와서는 더욱.” 그때, 여로가 내게 수건을 휙 던지며 말했다. 어렵지 않게 받아내자 그것으로 머리를 말리라는 듯 제 머리카락을 터는 시늉을 한다. 고마워. 얼떨떨하게 짧은 인사를 건네고 나서야 여로의 말이 제대로 머리에 들어왔다. 표정이 어둡다고? 나는 욕실의 열린 문틈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여로의 말대로, 그곳에는 잔뜩 남루해 보이는 누군가가 있었다. “레포트 때문에 그래? 아직도 신경 쓰여?” “아니, 그것 때문은 아냐. 말했잖아, 너랑 대화한 이후로 괜찮아졌어.”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평소였다면 몇 번을 곱씹으며 괴로워했을 일이, 종이 위에 몇 번 필담을 나눴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조금이라도 자책감이 올라와 또 일상이 흩어지려 할 때는 여로가 준 책의 구절을 곱씹었다. 그럼 자책감이라는 척척한 것은 잠시 형체를 감추고, 혼란스럽고 이상한 사고가 다시 마음속에 자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어두운 낯의 원인은 망친 레포트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우울한 이유가 있다면, 아마…
“말하기 힘든 일이면 억지로 뱉지 않아도…” “아, 그게 아니라 그냥… 내 일은 아니고, 친구 일. 졸업 시험을 준비하겠다고, 이젠 밥 시간까지 줄여서 공부한다고 하길래. 그게 좀 걱정이 됐던 것뿐이야.” 대충 둘러대고 넘기려 했는데, 한 번 말문을 튼 주둥아리는 지나친 솔직함으로 상황을 여로에게 전달했다.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여로가 그리도 편해졌던가. 여로는 여전히 어려운 상대인데, 왜 그에게는 솔직하게 얘기하는 게 어렵지 않을까. 여로는 내 말을 듣더니 잠시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때, 여로는 저렇게 엄지와 검지로 턱을 매만지고는 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 친구가 그러겠다고 한 거.” “나? 나는 그냥…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게 대단하긴 하지만, 역시 걱정은 되지. 그렇게 달리다간 빨리 지쳐버릴 텐데.” 어라. 나는 순간 뇌에서 사고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말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것을 느꼈다. 잠시 생각해 보니, 그것은 여로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날 담임 선생님이 내게 해준 말이기도 했다. … 나도 한결이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었던가? 그리 빨리 지칠 것 같은, 조금은 위태로운 모습으로?
“잠깐 앉을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여로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어.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나는 잠시 멍청한 소리를 뱉었다. 침구류를 오염시키는 건 명백한 규칙 위반 사항이다. 하지만 여로는 그런 것이 신경 쓰이지 않는지, 앉으라는 듯 이불 옆을 툭툭 쳤다. “산딸기 좋아해?” “… 산딸기?” “호수 옆에 나 있길래 몇 개 따왔어.” 잠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더니, 여로가 탁자 서랍에서 비커 하나를 꺼냈다. 신이시여. 나는 옛 습관으로 신을 찾으며 속으로 탄식했다. 지금 내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세상에, 실험에 쓰라고 지급한 비커를 채집에 쓰다니. 느낌일 뿐이지만, 지금쯤 하얗게 질려 있지 않을까…. “… 내가 교칙을 한 번에 몇 개나 어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체념한 목소리로 말하자 여로가 웃음을 터트렸다. “엄밀히 따지면 어기고 있는 건 나지. 어쨌든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이불 깔고 얘기하면서 먹는 간식만큼 매력적인 게 없어.” 그는 유혹하듯이 비커를 흔들어 보였다. 산딸기 몇 개가 유리에 부딪혀 흔들리고, 붉은빛이 비커 안에서 잠시 일렁였다. … 산딸기. 나는 그 유혹에 넘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홀리는 듯한 기분으로 비커를 쳐다보았다. 그 붉은 자태에, 신선한 내음이 여기까지 풍겨오는 듯하다. 무엇보다 책에서 본 활자들이 현실에 구현된 듯한 신비로운 기분이 들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산딸기가 식사에 포함된 적은 없었고, 그것을 본 것도 꽤 오래전 일이었다. 나는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정말 서술된 것처럼 달콤할까? “… 먹을래.” “잘 생각했어.”
나는 결국 체념한 듯 이불 위에 가 앉았다. 여로가 내 순응에 활짝 웃음 짓자, 규칙을 어긴다는 죄책감은 어느새 녹아내려 하나도 무겁지 않게 느껴졌다. “좋아. 다시 논점으로 돌아가 보자. 모든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그것이 왜 그런지를 아는 거겠지. 그래, 졸업 시험이 한결이에겐 그토록 중요한 목표인 걸까?” “당연히 그렇지. 어떤 방법으로든 절대적인 목표는 상급 학교에 가는 거니까.” 나는 여로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이 학교에 있는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잠을 포기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포기하고, 일말의 자유조차 포기하는 이유는 상급 학교였다. 지금을 희생하라. 단지 그 말을 경전처럼 마음에 새기고, 현재가 아닌 미래만을 꿈꾸며. “… 글쎄, 난 가끔 묻고 싶었어. 상급 학교가 너희들에겐 뭐야? 난 이미 내린 결론이 있어. 내 생각을 얘기하기 전에 네 말을 먼저 들어보고 싶은 거야.” 왜 내일은 바라보면서 현재는 챙기지 않고 있는지. 여로가 덧붙이자, 또다시 그 언저리에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이상한 사고에 빠지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여로의 말이 또 지나치게 옳은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원래 내 사고가 그리 흘러가야 했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왜… 냐니, 당연하잖아. 상급 학교를 나오면, 대부분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 수 있어. 꼭 그런 세속적인 동기가 아니더라도, 연구원이나 의료계 같은… 현재 인류에게 도움 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게 이상적인 삶이잖아.” 그래, 그것이 보편적인 사고였다. 인류 발전에 도모하며, 세상을 더욱 이롭게 하는 것. 그것이 과학을 추구하는 이들이 황폐해진 세상을 바로 세우며 내세운 고귀한 목표였다. 무엇보다 생존이 급했던 인류에게 괜히 학문의 편파가 생긴 게 아니고, 존경받을 만한 직업이 괜히 존경받는 게 아니란 말이다. “무엇보다 현재를 희생해서 미래를 더 밝게 할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 네 눈에 지금 우리의 모습이 힘들게 비춰졌더라도 그건 일순간이야.” 나는 아까 한결이 거론했던, 내가 나의 공허를 인지했던 시발점인 그 교수의 말을 인용했다. 보편적인 이치를 담은 그 말이 아무런 이유 없이 중급 학교 학생들의 마음에 깊이 박힌 것이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그런 것을 여로에게 전하려고 진땀을 뺐다. 내 이치가 틀린 게 아니라고, 내가 굳게 믿어왔던 것을 부정하는 여로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여로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부러 산딸기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톡 터지는 달콤함이 입안에 퍼진다. 향기로운 과일 내음이 단맛과 어우러지는 게 퍽 달콤해서, 나는 그만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내 목소리에는 또 자신이 없었다. 입은 논리적으로 말해도, 심장은 거짓을 말하는 사람처럼 쿵쿵 거세게 뛰고 있었다. 심장이 뛸수록, 입속 달콤함은 왠지 모를 죄책감과 만나 까끌까끌해진다. “삶은 이어 나가는 거잖아.” 그때,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여로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삶을 논하는 여로의 얼굴은… … 슬퍼 보였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감정이 서툰 내가 봐도 그것은 명백한 슬픔이었다. 정제된 감정이어서가 아니라, 가슴으로 녹여낸 것이기에 더욱 담담한 슬픔. “그럼 초급 학교를 넘어 중급 학교에 오고… 그곳에서 상급 학교에 가려고 죽어라 발버둥 치고 있는, 너희의 그 시간들 또한 삶이잖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가장 짧은 유년 시절이기도 하고.” 그렇게 말한 여로는 바닥에 떨어진 볼펜을 집어 들어 흰 바닥에 선 하나를 그었다. 나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정갈하던 공간에 그어진 최초의 낙서였다. 항상 어딘가 형이상적인 것을 말하던 여로는 처음으로 구체적인 현실을 이야기했다. 아니, 어쩌면 계속 얘기하고 있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그것이 현실의 언어로 나온 후에야 나는 여로가 지금껏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음을 알아챘다.
“어떤 삶을 희생해서 얻은 안온한 삶이 정말 이상일까. 물론 너희가 말한 노력이란 것의 가치를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냐. 그것은 또 다른 가치가 있고, 숭고한 것이기도 하니까.” 다만. 슬픈 눈을 한 여로가 입꼬리를 올리자 그 푸른 감정이 여실히 내게로 넘어왔다.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슬픔으로 녹여낸 미소는 눈이 아니라 가슴에 박힌다는 것이… 잊고 있던 감정들이 다시 수면 위로 고개를 쳐든 탓이었다. “노력과, 노력을 표방하며 인생을 희생하는 건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해. 어떤 것이든, 어떤 형태이든… 희생의 기억을 안고 사는 사람 앞에서는, 완전한 이상을 논할 수가 없어.” 여로는 그어놓은 선의 오 분의 일쯤 되는 지점을 볼펜으로 마구 선을 그었다. 한 줄, 두 줄… 잉크가 남긴 자욱은 그 작은 부분을 온통 어둠으로 물들이다 못해, 그 거친 손길로 가로로 길게 뻗은 부분까지 침범했다. 나는 그저, 그 검은 것들의 경로를 좇으면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안 그런 척, 저는 충분히 행복한 척… 타인을 속이고, 심지어는 자신까지 속이면서,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아갈 뿐이지.” 한 길로 정갈하던 선은 이제 완전히 더럽혀져 있었다. 고작 오 분의 일 되는 저 짧은 지점을 가득 메운 어둠 때문에. 더 이상 잉크가 나오지 않자 여로는 볼펜을 미련 없이 책상 위로 던져버리고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적어도 내 앞에선 네 삶을 속이지 않아도 돼. 배역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면, 차라리 아무도 없는 성을 지어서 그 안으로 숨어버려.” 얼마 전에, 도망치라고 했지. 도망칠 곳이 없다면, 그곳으로 가도 좋아. 적어도 그곳에서 너는 안전해. 여로가 산딸기 하나를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그 올곧은 시선이 전신을 집어삼키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서 나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인 것은, 여로는 다정하게 말할 줄 알고, 기다릴 줄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 다정한 마지막 말에서, 나는 감정 조절 못 하는 어린애처럼, 마냥 펑펑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왠지 그 다정함이, 세계 속에 숨은 나를 위로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 다정함이 여로의 푸른 눈에 들어있는 슬픔에서 비롯되었음이, 여실히 느껴지는 듯해서…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나는 잠기려는 목을 애써 숨기고 내뱉듯 말했다. “말마따나 우리는 그다지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네가 크게 고마워할 만한 일을 해준 적도 없어. 근데 너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하고, 내게 너한테 소중한 걸로 보이는 선물을 주고, 오랜 시간을 들여 날 이해하려고 했어. 억지로 너를 내게 이해시키려 하지도 않고 말야.” 넌 어떻게 그렇게, 매 순간 다정한 존재로 남아있을 수 있어? 나는 치미는 감정들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먼저 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그의 앞에서 꼴사납게 울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이해해야 할 것은 많았어도, 나를 이해해 보겠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저 다정에 어떤 정당성이라도 부여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저런 위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성 따위를 지어서 보호할 만큼 소중한 존재도 아니었으니까…
“너는 저항하고 있거든.” 익숙한 혐오에 늪에 빠지려는데, 여로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려다 말고 생경한 단어를 되물었다. “… 저항?” “응.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넌 항상 네 세계에 의문을 품고 있었어. 문장으로 정립하진 못했을지언정,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비판하고, 이 세계가 옳은가를 성찰하려 하고, 본질을 보려고 했지.” 그게 내가 아는 누구하고도 참 닮아 있어서, 다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 여로가 슬픈 어조로 덧붙였다. 나는 감히 온전하지 못한 손길로나마 그것을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로의 언어가 담담히 내 곁에 있었던 것처럼, 차라리 곁에라도 있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언어도, 서툴게 내뱉는 문장으로도, 그에게 가닿을 수 있을까. 이성적이지 못한 감정들을 도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감정들은 그 자체로 부정하고 의심하며 없애려고 한, 어떤 정제되지 못한 날것들을 내보일 수 있게 했다. 나는 딱히 위로에 재능이 없다. 다만 그의 성 속에 뛰어드는 것만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지배자가 있어. 이곳엔.” 그래, 어쩌면 이미 그 생각을 한 순간부터, 내 세계엔 이미 금이 가 있었던 것이다. 균열이 가기 시작한 몸으로 세차게 들어오는 물줄기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여로의 말마따나, 어떤 성곽 안에서라면, 물속에 잠겨 있는 것도 괜찮을 테니까.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솔직하게 내 속에 있는 것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입속에 남은 산딸기의 잔향에서 어떤 용기를 얻으며. “그냥 어느 순간 느꼈어, 그걸. 난 정말 보편적으로 이상이라고 하는 걸 좇는 삶을 살고 있었고, 다른 방향을 보려고 한 적도 없었어. 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 근데 어느 순간 문득, 이상하게 느껴지는 거야. 내 세계라는 게.” 왜 내 눈에 보이는 풍경에는 피로하고 지친 아이들밖에 없었을까. 인류의 미래를 향한 삶을 산다면서, 왜 ‘인류’인 아이들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을까. 오히려 펼쳐진 것은 아까 나처럼 피나는 노력이 무너져서 우는, 높은 점수를 받았음에도 등수에 밀려 우는, 하루에 네 시간을 채 자지 않고도 노력이 부족하다며 자신을 몰아세우는 살풍경이었다. 그래, 말 그대로, 시야에 있는 건 죽어가는 이들이다. 인류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있는 이들이 아니라. “왜 이런 게 정상일까. 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주도점에 서 있고 싶다면서, 왜 본인들은 자기 삶을 구원하지 못할까. 네 말대로, 지금 이 순간도 삶인데…. 그걸 이제야 알아챈 게 더 이상해. 오히려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심장이 아프게 쿵쿵댔지만, 이번엔 거짓을 말한다는 죄책감으로 인한 고동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 상은 자신이 구축한 것이 맞았을까? 처음 소리 내어 속마음을 뱉으면서, 다른 갈래의 의문들이 서서히 자라났다.
“그래서 네 말대로… 그냥 끝없이 속이고 속였어. 모두가 옳다고 하는 길인 여기서 벗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다수가 옳다고 따가라는 길을 벗어나면 이단아밖에 되지 않으니까. 따라가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어버리니까….” 또다시 그 길로 들어설 순 없었으니까. 나는 뒷말은 애써 삼키고 숨을 골랐다. 날것의 진심을 누군가에게 내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포인트를 많이 잃어 자퇴를 선택한 내 룸메이트도 그랬다. 나는 선생님들이 떠나는 그 애의 뒷모습에 대고 했던 말들을 선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또 낙오자가 생겼네, 저런 의지로 뭘 하겠다고. 그 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나는, 그 혀를 차는 말들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그게 나의 모습이 될까봐. 나는 그저 그 애를 애도하며 소리 없이 울었다. 머리와 심장은 다르다. 머리는 경쟁자가 줄었으니 잘된 일이라고 냉철하게 작동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심장은 떠난 아이를 연민하며 울고 있었다. “근데… 벗어나고 싶어. 더이상 속이기 싫어. 내 생각들을, 속에서 치미는 말들을, 부정하고 싶지 않아.” 나는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는 울분을 담고 있었으나 그렇기에 더욱 진심을 담아 세상에 나왔다. 말을 마치자 조금 숨이 가빴다. 너무 많이 이야기한 걸까. 순간 후회가 밀려와 덜컥 겁이 났지만, 여로는 내 외침에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었다. 무언가를 인정받은 사람처럼, 혹은 마침내 벽을 넘어온 사람을 보듯이.
“거봐, 이야기할 수 있잖아.” 여로는 내 머리를 장난스레 쓰다듬었다. 기특한 짓을 한 아이를 칭찬하는 것처럼. 거친 손길에 꼿꼿이 세운 자세가 무너지려 했지만, 아래 이불이 있으니 얼마든지 무너져도 괜찮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어.” 결국 이불 위에 누워버려 가만히 천장을 보는데, 씩 웃음 지은 여로가 덧붙였다. 나는 그 미소를 본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품은 것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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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분기점이었던 그날 밤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 기간이 다가왔다. “여명아, 분자생물학 범위 어디까지라고 했지?” “작년에 배운 파트 전체랑, 이번 학년 파트 1. 누적 범위래.” “미친, 누적이라고? 진짜 잠은 다 잤네…” 범위는 시험 한 달 전에 공지됐다. 그런 주제에 넓기는 엄청 넓어서, 한결은 절망 어린 얼굴로 태블릿을 뒤지기 시작했다. 푸른 빛으로 떠오른 시험 범위 공지 사항에, 내가 말한 것과 다르지 않은 현실이 적혀 있다. 졸업 학년의 첫 시험은 대부분 지난 학년에 배운 것까지 함께 시험을 보기에 그야말로 부담감이 막중했다. 시험은 두 학기에 각각 두 번, 보통 겨울에 치는 승급 시험 한 번, 공식적으로 총 다섯 번을 보았다. 말이 승급 시험이지, 절대 평가로 일정 점수를 넘기지 못하면 성장 척도에 따라 퇴학을 당할 수도 있어 학기에 있는 시험만큼 부담감이 막중했다. 절대 평가이기에 이 학교 아이들 대부분은 승급 시험을 통과하긴 했지만, 정말 간혹가다가 시험에서 떨어지는 애들이 있긴 했다. 대개는 눈가가 유독 짙다거나, 죽은 자의 공허한 눈빛을 하고 있거나,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자는 그 일상적인 것들 자체가 어려워진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까진 그러한 것들이 당연했었기에, 세계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어도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아직까진, 지배당하지 않고 홀로 걸어갈 용기가 없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지배당하는 것을 뿌리치지 못해 하루 네 시간 이상 등을 붙이지 않으며 공부에 몰두했다. 다만 정말 신기하게도, 그 일련의 과정들이 전처럼 아프지만은 않았다. 몸은 고될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피로하지는 않았다는 소리였다. 숨을 죄이는 압박감도, 잠시의 쉼조차 죄악처럼 여겨지는 강박도 몸을 움츠렸다. 나는 여로의 말대로 남의 얘기를 보는 것처럼 나를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고, 놀랍게도 멀리서 내 일상을 관조하는 방식으로 일상을 보내는 것은 놀랍게도 힘듦을 둔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숨이 막힐 때면 여로가 말한 성 안으로 숨어들었다. 성을 찾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이라도 시험에서 벗어난 대화를 하거나, 여로가 준 문학책을 펼치면 어느새 안온한 성은 내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그리곤 아주 간단하게, 내게만 허용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다. 성은 추상적인 사고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각하고 나니, 종종 성에 있는 것을 현실에서도 볼 수 있었다. 방법은 생각보다 아주 간단하다. 내 의지만 있으면 되었으니까. 어느 날 점심시간, 나는 성에서만 볼 수 있던 것을 눈앞에서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충동적인 생각은 아니었고, 그냥 어떤 강렬한 욕구였다. 여로가 준 책에서 다시 한번 음식을 요리하는 부분이 나왔던 것이다. 음식의 색채와 향기, 맛까지 아주 상세하게 묘사된 걸 보고 나니 그 생각은 꽤 강렬해졌고, 나는 한결이 하자는 대로 점심시간을 10분 남겨두고 식당으로 가서 영양보충식이 아닌 일반식을 골랐다. 이성을 많이 거치지 않고 나온 행위인데도, 나는 그 행위를 딱히 후회하지 않았다. 책에서 본 산딸기 콩포트를 보고, 교칙을 어겨 기숙사에서 여로와 산딸기를 나눠 먹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던 것처럼.
한결의 놀란 시선을 여상히 넘겨버린 나는 일반식으로 나온 호밀빵을 토마토수프에 찍어 먹었다. 음식은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별로 맛이 없었다. 형태 있는 것들을 먹으면 으레 그랬듯이 역시 어딘가는 거북했고, 입에 남는 껄끄러운 감각들이 달갑지는 않았다. 그게 이제껏 일반식을 꺼린 이유이기도 했다. 불편한 느낌을 품은 채 오래 앉아 있고 싶지 않아 나는 대부분 색도, 맛도 없는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애초에 음식에 큰 욕심이 없기도 했고. 그러나, 그 강렬한 빨간 색만큼은 음식이 내게 남긴 불쾌한 기억만큼 나쁘지 않았다. 맛에 색채를 입힐 수 있다면 그런 모양이 아닐까. 맛이라는 존재 자체를 오랜만에 느껴서인지, 마음 어딘가에서 글자들이 현실과 만나고 있는 것인지, 검은 활자들이 눈앞에서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 색채를 느끼고 있다는 기분만은 어딘가 섬세하다. 부드럽고, 다정한 그, 여로에게서 풍기는 어떤 것… 산딸기를 먹었을 때 느낀 감정들이 착각이 아니라는 걸, 홀로 천천히 복기하자 확신할 수 있었다. 급하게 음식을 먹는 한결의 페이스에 맞춰 훈련된 대로 빠르게 음식을 넘겨야 했지만, 나는 꽤 오랫동안 입에 남은 그 토마토의 잔향을 품고 있었다. 적어도 그것이 남아있는 동안은, 여로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그런 생각을 했다. 음식을 거부해야 했던 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것들이… 애초에 정상적이지 못했다고. 뼈를 깎는 노력이라며 칭찬받기도 하지만, 조금이라도 태블릿을 들여다볼 시간을 벌기 위해 식사 시간을 최소화하고, 이따금은 식사 중에도 음식이 아닌 화학식이 적힌 태블릿을 봐야 했던 행동들이, 건강하지 못했던 것 같다는… 그런 생각들. 호밀빵과 토마토 수프는 다정한 기억이었다. 조금 슬픈 결론이 있었지만, 함께 느낄 수 있던 것은 꽤 달콤했다. 색채와 향기, 어떤 것을 느껴도 틀릴 수 없다는 자유. 그곳에서 비롯된, 나는 이것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위험하면서도 달큰한 예감. 여로에게 그것을 말하자 여로는 기쁜 감정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 지배자의 존재를 토로했을 때처럼,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린 것은 덤이었다. “잘 하고 있구나. 기특하네.” … 기특… 뭐? “… 너 내가 너랑 같은 학년이라는 건 알고 있지?” 이따금 여로는 동생을 대하는 듯한 행동으로 나를 대했다. 아니, 물론 나이만으로는 동생이 맞지만. 그렇게 말하니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가 옳은 일을 했을 때 칭찬하는 모양새 같았다. 머리를 서슴없이 쓰다듬는 것도 그렇고. 여로의 뇌리에선, 내가 열 살쯤 어리게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그게 뭐가 중요해. 네가 나보다 어리다는 게 중요하지.” “어리다고… 나 내년에 성년이야. 어리긴 뭐가 어려.” “나이만을 얘기하는 건 아냐. 세계를 갓 깨고 나온 거면 어린 게 맞지.” 여로는 그리 말하며 호숫가 옆에 나 있는 어린 묘목을 가리켰다. 하늘이 유독 보랏빛을 띠었던 날이다. 여로와 나는 두 번째로 산책을 나와 있었다. 시험 기간에 개인적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건 분명 엄청난 리스크였지만, 이미 산책을 하기 위해 그 시간만큼 잠을 포기했으므로 그리 큰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원래라면 아낀 시간만큼 문제를 하나라도 더 풀었을 테지만, 이미 작은 성을 하나 만들어 놓고, 그것을 가만히 풍화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세계를 깨고 나왔다는 게 정확히 뭔데? 지금껏 시간을 보낸 건 나이를 먹었던 게 아니란 소리야?” 나는 제법 익숙한 어투로 물었다. 그는 내가 어떤 질문을 하든 친절하게 받아주었고, 내가 세계를 벗어난 질문을 할 때마다 기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다정한 시선에 덩달아 용기를 얻어서, 나는 작은 성에서는 어느새 꽤 말 많은 학생이 되어있었다. 세계의 선생님들이 나를 조용하고 유순한 아이라 평가내린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해석하기에 따라 다를 거야. 다만 내가 본 게 맞다면, 너는 지금껏 이런 방식의 사고를 해본 적이 많이 없겠지. 세상보다는 너를 보고, 네 의문이 향하는 곳으로 몸을 돌리는 것. 너는 지금껏 세상에 맞춰 성장해 나갔을 뿐이야. 너에게 너를 맞추어 성장하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 어리다고 표현한 거고.” “음, 그럼 너는? 너는 말마따나 그렇게 성장한 게, 그 반대의 경우보다 많아?” 멈칫. 어떤 질문을 해도 고민하지 않고 답해주던 여로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곧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자연스레 내 발걸음을 따라왔지만, 나는 잠시간의 그 간극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글쎄… 확실하게 답해주긴 어렵네. 말했잖아, 원래 자기 자신에 대해선 잘 보이지 않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 간극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었다. 나는 그 침묵이 자신에게 온전히 향하고 있었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여로도 자신을 보는 순간이 필요하구나. 그의 말들은 모두 자기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기반으로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 짧은 순간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좀 의외네. 새삼… 넌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게 살아? 비단 이 작은 성뿐만이 아니라, 내 세계에서도 넌 모범적인 모습으로 있었잖아.” “작은 성에서의 내가 온전하다면, 그 외부의 세계에서도 완전해. 대부분의 아이들이 제 작은 성을 구축할 시간도 없이 세계에 던져져서 문제지.” 너처럼 말이야. 여로는 그 대목을 이야기하며 옅게 미간을 찡그렸다. 여로의 표정은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양해졌다. 그래, 다채롭다고 표현하고 싶다. 웃고, 미간을 찡그리고, 슬픈 표정을 짓는 여로는, 내가 성숙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눌러버린 것들을 대변해 주는 듯했으니까. 다만 나는. 그가 하는 말에 잠시 가슴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거침없이 나아가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한다. 여로는, 아이들 대부분이 세계에 ‘던져진다’고 했다. 그러나 적어도 내겐 그 피동 표현을 대입할 수 없었다. 그래, 언젠가는 대면해야 했다. 누군가에게라도 고해할 필요가 있기도 했고.
심장을 옥죄어 숨을 쉬기 어렵게 하고, 미칠 듯이 몰려오는 후회에 잠겨 죽게 하는 것은, 학문으로 몸을 혹사시킬 때는 잊고 있던 수치였다. 다채로워진다는 것은 곧 다양한 감정들을 감내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학문에는 색이 없다. 찬란한 빛깔도 없지만, 스멀스멀 목을 죄이는 검은 것들을 견뎌낼 필요는 없었다. 다만 세계 밖으로 나오니 잊은 것들이 찬란과 함께 나를 덮쳤다. 내 과거의 죄악이 다시금, 내 발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여로가 이야기하는 것은 타의에 의해 학문을 걷게 되는 아이들의 이야기였다. 다만 나는…. 저런 말들이 닿을 자격까지는 없다. “… 솔직히 말하면, 나는 딱히 외압에 의해 뛰어들게 된 건 아니었어.” 문맥에서 벗어난 흐름은 여로의 다정을 차마 기만할 수 없어서 자아낸 것이었다. “그냥, 더 좋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속죄할 수 없으니까, 저절로 세계에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된 거지. 그건 세계에 내맡겨지는지도 모르는 채 사고를 훈련하는 아이들과는 달라.”
거기까지 얘기하는데도 얼굴을 들기가 힘들었다. 수치란 그런 것이다. 과거도 과거의 일로 치부할 수 없게 하는 깊은 수치. 그것은 가슴 속에 언제나 잠재되어 있었다. 지금까진 학문으로 사슬을 감싸고 있었을 뿐, 사라진 게 아니라는 소리다. 그런 것들을 숨기고 저 다정한 말들을 받을 수는 없었다. 차마 거기까지는 양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학문은, 세계는… 어떻게 보면, 방탕아를 교화하기 위한 길이기도 해. 나를 교화하기 위해 스스로 세계에 뛰어든 게 나야. 뛰어든 지도 오래돼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고, 너로 인해 벗어나게 된 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네가 방금 말한 안타까운 이들은… 결코 아니야.” 같은 세계에서 같은 지배를 받고 있다 해도, 자의로 그곳에 뛰어든 것과 타의로 뛰어들게 되는 것은 달랐다. 나는 고해하듯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으며 토로했다. 내 결함도 여로가 감싸줄 것이라는, 그런 오만한 생각에서 비롯된 고해는 아니다. 오히려 여로는 나를 빠져나오게 한 다정한 사람이었으므로, 그 앞에서는 조금이라도 솔직한 존재로 남아있고 싶은 서툰 심리였다. “학문은 힘든 길일지 몰라도… 어쩌면 방탕아를 양지로 인도하는 길이기도 하잖아. 그렇기에 나는 세계에 있어야 했어. 형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아주 오랜만에 고향에 있을 형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족들을 실망 시킬 수가 없다는 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명제이기도 했다.
완전고결한 인간은 없다. 단지 속죄하며 번복하지 않기 위해 가시밭길을 나아가는 인간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조금은 고결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 또한 후회라는 고통스러운 감정에 몸부림치는, 그런 속죄자 무리 중 하나일 뿐이었다. 지나간 죄는 돌이킬 수 없으므로, 더이상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어느 정도 체념을 하고 고해한 것과 다르게, 여로의 얼굴에는 실망이나 혐오의 빛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오히려 여로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타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났을 때의 그 반가움과 닮아 있었다. “너는 나와 닮았어. 그것도 엄청.” 다만 어딘가, 그때처럼 슬픈 얼굴. 여로는 나와 저 자신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신을 제 눈으로 보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순간은 정말 그게 가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 내가 여로와 닮았다고? 어떻게? 내 눈에 여로는 거의 완벽한 존재였다. 세계에서가 아니라, 성 속에서 봐도 그랬다. 잔뜩 초라하고 남루한 나와 비교하기엔, 그쪽이 너무나 아까울 정도로.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내 고해보다 훨씬 더 깊은 감정을 품은 듯한 여로의 말이 먼저였다. “너는 나를 가끔 아무런 결함도 없는 존재로 보는 것 같은데, 속죄하고 있는 죄의 크기는 내가 더 클지도 몰라. 예컨대 네가 속죄의 길을 가는 수도자면, 나는 수도자가 되기도 전에 고해실에서 나오지 못할걸.” 아, 또다. 여로의 푸른 눈에서 배어 나오는 저 슬픔이, 오늘은 유독 짙었다. 죄라는 단어를 주제로 얘기를 꺼낸 걸 후회하게 될 정도로. 나는 그 말이 나온 순간, 그의 손을 잡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견딜 수가 없었다. 고도의 비유가 들어간 여로의 말이 난해하게 느껴져서도, 여로가 일순간 자신을 나와 비교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그 담담한 말에,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자기혐오의 감정이 배어 있는 듯해서. 그 외로운 감정이 얼마나 아픈지를 알기에, 잔뜩 낡은 남루한 손이라도 뻗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죄의 경중을 따지자는 게 아니잖아.” 결국 나는 비판적인 어조와는 반대로 여로의 왼쪽 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다행히 여로는 눈을 크게 뜰 뿐, 내 손을 뿌리치거나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잡은 내 뜻을 알고 있다는 듯이, 옅게 웃음 지을 뿐이었다.
“맞아. 지금 죄의 크기를 따지자는 건 아냐. 솔직히 얘기하면,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여길 수만 있다면 말이지. 여로는 머뭇대며 제 옷깃을 잡은 내 손끝을 조금 더 확실히 고쳐 잡았다. “네 말대로, 세계가 방탕아를 양지로 이끌 수 있는 것도 맞지. 다만 그렇다고, 세계가 옳은 곳이 되는 것은 아니야.” 여로가 무채색의 건물을 눈짓하며 말했다. “네가 방탕아의 길에서 벗어나고자 세계에 뛰어들었다고 해보자. 하지만 그 길에서 네가 겪은 모든 혼란들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건 아니야. 설령 어느 죄에 대하여 속죄가 필요하다 한들 그것은 피해자를 위한 것이어야지, 너 자신을 괴롭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속죄가 될 수 없어.” 내가 괴로운 것에서 오는 자기 위안은 될지 몰라도. 여로의 어조는 조금 냉소적이었다. 거기에 조금 몸을 움츠리자, 여로는 예의 그 미소를 짓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다정한 손길로.
“그리고, 내가 네 이야기를 전부 아는 건 아니지만… 남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숨김없이 밝힐 수 있는 이들은, 대부분 진정한 죄인이 아니야. 오히려 너무 선해서, 미숙해서 저질러 버린 실수의 죄책감이 죄악으로 변해 자신을 해치고 있을진 몰라도. 짐작건대, 아마 네가 저지른 죄에 피해자가 있다 한들, 그건 너 자신일걸.” 아마 객관적인 시선에서 보면 널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없을 거야. 보통 자기 자신에게 죄를 지은 자를 죄인이라 매도하진 않으니까. 여로는 그리 덧붙이며 손을 얼굴에서 가슴으로 끌어내렸다. 저런 걸… 성호를 긋는다고 하던가. 아주 오래전 있었던 종교의 의식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무의식중에 종교의 색채가 밴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의중이 궁금해 홀린 듯 따라 하는데, 여로 거의 혼잣말을 하듯이 내뱉었다. “속죄의 방법은 절대 같을 수가 없잖아. 네가 세계에 뛰어드는 것으로 속죄하고자 했다면, 나는 다른 방식으로 벌을 받고 있어.” 분명 들릴 듯 말 듯 한 조용한 어조였는데, 문장 하나하나가 심장에 박혔다. 지독하게 슬픈 심장으로 얘기해야 저런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슬픔의 무게를 그 자체로 견디지 못했고, 차라리 그 슬픔의 근원을 좇았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내 입으로 죄인임을 고해하는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얘기했으면서, 왜 정작 같은 행위를 하는 자신에게는 그런 말을 해주지 않을까. 나는 그 순간 여로의 흠결을 봤다. 그의 말마따나, 흠결은 부족함이 아니라 상처였다.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듯, 완벽하다고 상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 완벽한 모습도 여로가 말하는 다른 형태의 속죄일 수 있겠다고… 아득하게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여로의 능력보다 그저 여로라는 인간이… 궁금했다. 그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저 푸른 눈의 슬픔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리고 내게 낙인처럼 박힌 날것의 원죄를 보더라도… 저리 다정한 목소리로 날 대할 수 있을지.
“거기 학생들. 여기서 뭘 하는 거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애상감에 젖어 있던 그때, 바람을 타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번호가 들리자 나는 움찔거리는 몸을 애써 억누르고 몸을 돌렸다. … 아, 망할. 나는 차라리 욕을 하고 싶었다. 분자생물학 선생님이, 산책하는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건-” “저녁을 다 먹었으면 자습실로 올라가야지, 왜 여기 있는 거죠?” 선생님이 날카로운 어조로 따져 물었다. 따지고 보면 저녁 시간에 운동장을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었으므로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날카로운 추궁에 어깨가 계속 작아져 제대로 된 항변 하나 하기도 어려웠다. 애초에 변명을 꺼내놔야 하는 일도 아닌 것 같고. “죄송합니다. 과식을 해버려 탈이 나지 않도록 잠시 걷는다는 게, 조금 길어져 선생님의 눈에 든 모양입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삼켜가며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 냈다. 세계 속에선 과도하게 예를 차린 문장들이 차라리 안전하다. 생물학 선생님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고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분명 무거워야 하는데,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정신 차리고 집중하세요. 시험 기간에 전학생 데리고 이러고 있는 거,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는 여로에게 눈길을 준 것은 덤으로. 전학생이라 분위기를 못 읽었다는 판단하에 지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주의하겠다고 머리를 숙이자 그제야 떠나간 선생님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포인트도 깎지 못하는 일에 왜 난리일까. “두 번 정신 차리면 아예 뼈도 못 추려서 걷지도 못하겠다, 그치.” 그때, 여로가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며 이야기했다. 선생님에게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는 절망감에 싸이기도 전에, 그 말장난이 웃겨서 소리죽여 웃어버렸다. 모범생의 가면이 부서지고 있는데도 느낀 건 위기감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수험생에겐 당연한 말을 하고 있는데도, 그냥 거기에 코웃음을 치고 싶었다. 나는 그 이질적인 것들을 알았다. 그것은 억누르고자 했던 방탕아의 기질이었다.
[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세계에서>는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③ 속죄자 무리 (1)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