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적성에 안 맞았어요. 아인이를 연기하면서 제 과거가 많이 생각났죠. 깨지면서 일을 하다 보니 이 일을 더 사랑하게 됐고 연기가 너무 재밌어졌어요. 고아인이 버틴 것처럼 저도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어요. 앞으로도 잘 버텨보려고요.”
배우 이보영이 또 한 번 인생 캐릭터를 만났다. “오랜만이라 너무 어색하다”는 말과는 달리 이보영은 특유의 밝은 모습으로 현장 분위기를 이끌어 나갔다. 고아인 캐릭터와는 정반대의 밝고, 귀엽고,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지난 26일 종영한 JTBC 주말드라마 ‘대행사’는 VC그룹 최초로 여성 임원이 된 고아인이 최초를 넘어 최고의 위치까지 자신의 커리어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우아하게 처절한 광고인들의 전투극이다. 이보영은 극 중 VC기획의 제작 상무 고아인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이보영을 만났다. 그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연기한 건 처음이다. 현장에서 많은 얘기를 나누고 상의하면서 다 같이 한땀 한땀 만들어가는 느낌으로 찍었다. 재밌게 찍은 만큼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시청률이 잘 나와서 감사하고 놀랍다”고 종영 소감을 전했다.
“현장에서 대사를 어떻게 해야 더 못 돼 보이고 소리를 어떻게 지를지 고민했어요. 싸울 때도 말을 너무 잘하더라고요. 저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안 될 때가 많은데 아인이가 해줘서 그 자체로도 재밌었어요.”
이보영이 연기한 고아인은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임원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 독설을 내뱉고 때론 얄미운 모습으로 시청자로부터 ‘현실에서 피하고 싶은 상사’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성공을 위해 달려 나가는 고아인을 미워하기보단 오히려 응원했다.
“아인이는 실력이 뛰어나니 이 말들이 넘어가지는 것 같아요. 그걸 버틴 팀원들도 대단하고요. 저랑 안 닮은 캐릭터를 연기하니까 재밌었어요. 실제로도 저렇게 막말하면서 전투력 있는 사람이 진짜 있나 싶었고요. 드라마 속 한 캐릭터라고 생각하면서 찍었죠.”
고아인 캐릭터를 하나씩 깨부수면서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게임처럼 생각했다는 이보영. 그가 생각한 고아인 캐릭터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는 “세지 않은데 센척한다. 겉으로는 강한데 속으로는 한없이 망가져 있다. 성공하기 위해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으면서도 공감하는 분들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보영은 이 작품을 ‘고아인의 성장기’라고 표현했다. 남과 협업하지 않던 고아인은 어느 순간 교류하는 방법을 깨닫고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방법을 배웠다.
“솔직히 이 캐릭터가 미워 보일 거라고 생각 안 했어요. 그래도 대신 등 긁어주는 기분이지 않았을까요. 속으로만 생각하던 걸 직접 하니 대리만족도 됐을 거고요. 초반에 감독님이랑 계속 고민을 했어요. 고아인을 시청자들이 응원하게 만들자고요. 이 친구가 잘되기를 바라는 시청자들의 응원이 따라오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첫 회 시청률 4.8%(닐슨코리아 전국 유료가구 기준)로 출발한 ‘대행사’는 최종회에서 16%를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이보영은 작가의 대본은 완벽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엔딩이 너무 완벽하다고 생각해요. 작가님이 첫 회식 때 A4용지를 들고 돌아다니시더라고요. 그 종이 안에는 캐릭터들의 전사가 빼곡히 적혀있었고요. 저한테는 안 주셨는데 대본에 충분히 나와 있었어요. 작가님이 출연진들을 다 찾아다니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셨죠.”
이보영이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대본을 봤을 때 재밌는 작품이다. 해보고 싶은 역할이라도 대본이 재미없으면 하지 않는다고. 그는 “확 꽂히는 신, 대사 있으면 따라가는 편이다. ‘대행사’는 9회 대본까지 받고 시작했는데 너무 재밌어서 하게 됐다. 다양한 걸 하고 싶은데 잘 안 들어온다. 전문직만 찾아서 하는 건 아닌데 계속하게 된다”며 웃었다.
이보영은 ‘대행사’의 고아인을 연기하며 힘들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데뷔 초 이보영은 현장에 가는 게 무서웠고 카메라에 둘러싸인 채 연기하는 게 두려웠다. 열심히 준비한 표정 연기는 맘대로 되지 않았고, 감독에게 혼이 날까 봐 겁을 냈다.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적성에 안 맞았어요. 물론 사회생활 하는 분들 다 그랬겠죠. 아인이를 연기하면서 제 과거가 많이 생각났어요. 깨지면서 일을 하다 보니 이 일을 더 사랑하게 됐고 연기가 너무 재밌어졌어요. 고아인이 버틴 것처럼 저도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어요. 앞으로도 잘 버텨보려고요.”
이보영은 드라마 ‘마더’, ‘마인’, ‘내 딸 서영이’, ‘너의 목소리가 들려’ 등 대표작이 많다. 이번 ‘대행사’로 대표작이 하나 더 추가됐다. 그는 “항상 생각하지만, 운이 되게 좋은 거 같다”며 “끝까지 잘 써주시는 작가님을 만났고, 잘 찍어주시는 감독님을 만났다. 최근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잘 만나는 것 같다”고 제작진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끝으로 이보영은 세상의 모든 고아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전했다. 이보영은 “아인이는 세상에서 뭐가 중요한지 모르고 사는 친구다. 중요한 건 저런 게 아니라 내 마음과 건강을 지키는 것”이라며 “나중에라도 뭐가 중요한지 알게 돼서 다행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인이처럼 살고 있을 거다. 나도 찍으면서 ‘아인이는 왜 이러고 살까?’ 생각을 했다. 현장에서도 ‘뭣이 중한디?’라는 말을 제일 많이 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끝으로 이보영은 계속해서 믿고 보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냈다. 올해로 데뷔 21년 차를 맞이했지만 갈수록 연기에 대한 애정은 늘어난다는 그다.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계속해서 등장한다는 게 감사해요. 선배들이 앞에서 길을 잘 닦아 놓으신 덕분이죠. 저도 저 나이까지 뭔가 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생기고, 더 오래 연기하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네요. 너무 감사할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