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섭외를 제작진의 손에만 맡겨두지 않고 직접 나서 동료 배우의 출연을 적극적으로 종용하고 있다. SBS '별에서 온 그대'에서 전지현이 김수현의 출연을 성사시킨 건 잘 알려진 이야기. '별에서 온 그대'의 대본을 받고 고민중이던 김수현이 전지현의 전화에 '오케이' 사인을 냈다. 전지현은 앞서 영화 '도둑들'을 통해 김수현과 맺은 인연을 적극 활용했다.
김희애도 JTBC 드라마 '밀회'에 일찌감치 캐스팅된 후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서 호홉을 맞춘 19세 연하 유아인에게 출연 제의를 했다. 다음달 방송을 앞둔 MBC 새 주말극 '호텔킹'에 출연하는 이동욱도 '절친' 이다해에게 '같이 해보자'고 제안했다. 유명 배우들이 직접 동료 배우 캐스팅에 힘을 쓰는건 한편으로 그만큼 작품에 대한 열의가 높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과거에는 연출자나 작가의 권위가 셌지만 요즘엔 배우의 힘과 영향력이 그에 못지 않다. 그런 시대변화의 한 현상"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김희애·전지현 연하남 캐스팅 직접 나서
JTBC '밀회' 제작진은 김희애의 도움으로 '최상의 캐스팅'을 마칠수 있었다. 여주인공으로 일찌감치 김희애의 출연이 확정된 상황에서 남자배우의 캐스팅이 관건으로 떠올랐던 상태. 40대 여성과 20대 남성의 멜로를 보여주는 드라마라 20대 천재 피아니스트 역의 남자 주연 배우가 누가 되느냐에 작품의 성패가 달려있었다. 제작진이 유아인을 남자주인공감으로 지목한후 연락을 시도했지만 쉽지 않아 김희애에게 부탁했다. 마침 전작인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서 유아인과 호흡을 맞춰본 김희애가 직접 전화를 해 캐스팅이 성사됐다는 후문이다.
김희애는 최근 진행된 '우아한 거짓말' 관련 인터뷰에서 "제작진이 유아인과 연락이 안된다면서 전화 한번 해달라고 부탁하더라. 사실 영화 촬영할 때 개인적으로 친해질 기회가 없어 걱정했는데 다행히 유아인과 연락이 금방 닿았다. 출연 의사를 물어보니 마침 이 드라마에 관심을 보였다고 해 또 한 번 호흡을 맞추게 됐다"고 말했다. 이동욱도 이다해에게 출연제안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다음달 5일 첫방송되는 MBC 주말극 '호텔킹'의 여자 주인공 자리를 부탁하기 위해서다. 두 배우는 2005년 SBS 드라마 '마이걸'에서 호흡을 맞춘 인연이 있다. 이동욱은 인터뷰에서 "이다해를 캐스팅하고 싶어했던 감독님의 제안에 직접 전화를 했다. 연락하자마자 '너 이 작품 할거야 말거야'라고 쏘아붙였다"고 캐스팅 비화를 밝혀 웃음을 자아냈다.
하정우는 영화계에서 알아주는 '캐스팅디렉터'다. 직접 연출까지 하는 배우인만큼 각 작품에 적합한 배우를 지목하고 캐스팅하는 데에도 두각을 보이고 있다.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의 출연이 스케줄 문제 등으로 무산됐을때 고수를 주연배우로 추천한 일 역시 유명한 사례 중 하나다. 미국에서 동갑내기 친구 고수를 직접 만나 '집으로 가는 길'의 출연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새 연출작 '허삼관매혈기'의 캐스팅 작업이 한창일 때도 하지원에게 러브콜을 했다. 평소 '꼭 같이 연기해보고 싶은 배우'로 꼽았던 하지원과의 만남을 직접 나서 성사시킨 셈이다. '러브픽션'에 출연할때도 공효진을 캐스팅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설경구도 '스파이'의 캐스팅이 진행중이던 당시 문소리에게 직접 출연을 제의했다. '박하사탕' '오아시스' 이후 11년만에 같은 작품에 동반출연할 기회가 설경구의 적극성 때문에 성사됐다.
▶배우의 영향력 증가냐 감독의 권한 상실이냐
전지현·김희애 등 톱배우들이 직접 나서 자신의 파트너를 찾는다면 '분명' 캐스팅 작업은 원할하게 돌아간다. 제작진 입장에서도 원하는 배우를 캐스팅할수 있으니 더할나위 없이 좋은 일. 하지만, 부작용도 고려하지 않을수 없다. 한 방송 관계자는 "제작진이 서로 친분이 두터운 배우들의 기세에 눌려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고 꼬집었다. 자칫 연출자의 파워가 약해지거나 촬영장에서 일의 집중도가 떨어질까 우려하는 눈치다.
하지만, 다행히도 현재까지는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편이다. 문화평론가 이호규씨는 "연기력과 인기 모두 어느 정도 궤도에 들어선 배우들이 자신들이 필요한 것을 감독에게 요구하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캐스팅 과정에 힘을 행사하는 건 배우가 단순히 연기에 집중하는 선에서 떠나 작품 전체를 책임질만큼 영향력이 커졌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감독의 영향력이 약해진 건 아니다. 감독과 배우가 함께 더 좋은 작품을 위해 캐스팅을 고민하는 것이지 절대 어떤 한 명의 영향력이 세거나 약해졌다는 식으로 바라볼 문제는 아닌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제작진과 배우간의 상호 신뢰가 바탕이 됐기 때문에 자연스레 배우의 캐스팅 참여가 이뤄지는게 아닌가 생각된다. 제작진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과거와 달리 촬영장 분위기 역시 한결 가벼워졌기 때문이 이런 일이 가능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배우들이 직접 나선 캐스팅에는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별에서 온 그대'를 제작한 HB엔터테인먼트 박민엽 이사는 "제작사 입장에서는 먼저 캐스팅된 배우가 다른 배우를 추천해준다면 고마운 일이다. 사실 제작진 입장에서도 캐스팅은 가장 고민이 되는 숙제다. 그런 부분을 주연배우가 나서서 해결을 해준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라며 "드라마는 배우와 제작진이 편안하게 호흡을 맞추기까지 한 달 여 시간이 걸린다. 특히 주연 배우들끼리 친분이 없다면 그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일단 배우가 직접 나서 캐스팅한다면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된다. 연기 궁합이 잘 맞아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SBS 드라마국 관계자도 "방송사의 입장에서는 배우가 직접 나선다면 정말 반가운 일이다. 여러가지 경우가 있지만 특히 작품을 홍보할 때 한 마디라도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낼수 있어 좋다"며 "또 해당 배우들이 그만큼 드라마에 큰 애착을 보이는 것으로 여겨져 반기는 눈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