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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대 경기에서 이례적 ‘세리머니 자제’…아스널 MF는 도대체 왜 그랬나

잉글랜드 대표팀 중원의 핵심인 데클런 라이스(아스널)가 A매치에서 득점 후 세리머니를 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영국 매체 ‘스포츠 바이블’은 8일(한국시간) “라이스가 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 세리머니를 하지 않은 이유와 주장 완장을 거부한 이유를 설명했다”고 전했다.같은 날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와의 유럽축구연맹(UEFA) 네이션스리그B 2조 조별리그 1차전에서 2-0으로 이겼다.이날 라이스는 전반 11분 혼전 상황에서 오른발 슈팅으로 아일랜드 골망을 갈랐다. 라이스는 득점 직후 양 손바닥을 펴 보였다. 세리머니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라이스는 그저 자신을 향해 다가온 동료들과 포옹을 하며 기쁨을 나눴다.경기 후 라이스는 ‘비인 스포츠’와 인터뷰에서 “놀라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득점을) 축하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면서 “나는 아일랜드 가족이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더 이상 여기 계시지 않는데, 내가 축하를 하면 그분들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았다. 내 아버지도 여기에 계셨다”고 전했다.라이스는 아일랜드 연령별 대표팀을 거쳤다. 아일랜드 성인 대표팀에서도 A매치 3경기를 소화한 바 있다. 대표팀 간 경기에서 이례적으로 세리머니를 자제하는 동작이 나온 배경이다.그는 “득점한 것은 기분이 좋았지만, 다시 경기에 복귀해 더 많은 골을 넣는 데 집중하고 싶었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잉글랜드 대표팀 동료인 잭 그릴리시(맨체스터 시티)는 이날 팀의 두 번째 골을 넣었다. 그릴리시 역시 아일랜드 연령별 대표팀에서 뛴 바 있다. 아일랜드 21세 이하(U-21) 대표팀까지 거쳤다.하지만 그릴리시는 라이스와 다르게 골 뒤풀이를 즐겼다. 그릴리시는 “경기 전에도 말했지만, 나와 데클런은 (아일랜드에 관해) 나쁘게 말할 것이 없다. 우리 둘 다 여기서 뛰는 시간을 즐겼다. 확실히 그랬다”면서 “가족 중에 아일랜드인이 많으므로 나쁜 감정은 전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잉글랜드 대표팀은 오는 11일 오전 3시 45분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핀란드와 네이션스리그B 2조 조별리그 2차전을 치른다.김희웅 기자 2024.09.08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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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자기 만의 이유가 있지”..성자와 죄인의 땅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원맨’ [오동진 영화만사]

킬러 액션 영화의 대가로 불리는 리암 니슨의 신작 ‘원맨’은 의외로 시대배경이 1974년인 작품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북아일랜드 사태와 관련이 있으며 극중 사건이 벌어지는 곳은 벨파스트에서 떨어져 있는, 듣도 보도 못한 ‘글렌 콜름 킬’이란 해변 마을이다. 아마도 가상의 공간으로 보인다. 주인공 핀바 머핀(리암 니슨)은 브로커 로버트 맥큐(콤 미니)에게 청부를 받아 사람을 죽이고 마을 숲 속 깊은 곳에 묻는다. 숲 속은 그가 사람을 묻고 심은 나무로 가득하다. 핀바가 죽인 사람은, 어떤 인간들인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과거에 무엇인가 안 좋은 일을 벌였거나, 아니면 핀바처럼 누구를 죽여서 원한을 샀거나, 안 좋은 일에 엮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다.그게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사연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얘기까지 영화가 풀어 낼 시간은 없어서였을 것이다. 하드 보일드 시나리오의 제1 법칙은 불필요한 이야기는 초반에 싹 다 걷어 낼 것, 제2법칙 가능하면 본론으로 직진할 것, 제3법칙 곁가지 얘기들은 과감하게 생략할 것이다. ‘원 맨’은 그 점에 충실한 작품이다. 핀바가 어떤 과거를 가진 남자인지는 그저 짐작할 뿐이지만 그가 이 외진 마을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심성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그게 또 위장이나 위선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언제 어디선가 마가렛이란 이름의 아내와 살았는데 이미 고인이 됐고 지금은 옆집 여자 리타(니암 쿠삭)에게 마음을 살짝 빼앗긴 상태이다. 리타의 남편은 지금 병으로 죽어 간다. 핀바는 가르다(GARDA 아일랜드 경찰조직) 소속의 빈센트(시아란 힌즈)와 종종 사격술 내기를 하며 소일 거리로 돈을 따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핀바를 점잖고 좋은 남자라고 생각한다. 핀바도 이제 살인청부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한다. 그는 이웃 여자 리타에게서 정원 가꾸는 일을 배우며 살 생각이다. 그러나 세상과 사람들이 그런 그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1974년이라면 북아일랜드 역사에 가장 잔혹한 기간에 속한다. 1972년의 일명 ‘블러디 선데이사태(영국군의 총격으로 의해 북아일랜드인 14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1981년 바비 샌즈가 단식 투쟁으로 굶어 죽을 때까지 거의 10년간 온 사방에서 영국군의 학살과 IRA의 보복 폭탄 테러가 끊이지 않았던 때였다. 북아일랜드 사태는 1969년 벨파스트 봉쇄로 영국국교계 영국 이주민들이 가톨릭계 북아일랜드 거주민 지역을 봉쇄하고 탄압하면서 시작됐다. 북아일랜드인들의 독립 투쟁은 한편으로는 영국과 또 한편으로는 같은 민족인 (남)아일랜드와 벌여야 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순수하고 타당했으나 IRA라는 무장 군사 조직이 개입하면서 폭력의 순환 고리를 끊어 내지 못했다. 영화 ‘원맨’ 역시 그 와중에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영화에서 핀바 머핀의 대척점에 서있는 IRA 테러리스트들, 특히 그들의 리더인 도이렌(케리 콘돈)은 자신의 행동에 다 이유가 있어서라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숭고한 목적의 방향과 경계가 상실된 상태이다. 모두들 다 이유가 있지만 그 회오리 안으로 들어 가면 죽고 죽이는 살육 외에는 별로 남는 게 없다. 영화의 이런 아우라는 사실 원제를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원제는 ‘성자와 죄인의 땅’이다. 성자와 죄인은 서로 대립하는 척 하지만 같은 곳에서 공존하고 있으며 누가 성자이고 누가 죄인인지 어떤 때는 그 관계가 마구 뒤집히기도 한다는 것이다. 1970년대의 북아일랜드가 그랬다. 성자와 죄인이 같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정, 그 기구한 이야기들을 ‘원맨’은 하드 보일드 액션의 이야기로 축약해 낸다. 그 상징성이 꽤 여러 생각을 갖게 만드는 영화다.북아일랜드 출신인 리암 니슨은 독립영웅이자 배신자였던 마이클 콜린스 전기 영화에 나온 배우였지만 우연찮게 자경단 류의 영화(범죄조직을 사법당국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처단하는 내용)인 ‘테이큰’(2008)에 출연한 이후 지난 16년간 수없이 많은 액션영화에서 총을 쏘고, 몸싸움을 하며, 주먹을 날리는 연기를 해 왔다. 리암 니슨은 1952년생, 72세이다. ‘테이큰’의 속편인 2편(2012)에서 그는 이런 식의 대사를 한다. “이제 그만 좀 하자. 지긋지긋해.” 그때 그의 말은 자신이 액션연기를 계속 하는 것이 지긋지긋해졌다는 말처럼 들렸다. 리암 니슨은 아무리 늙었어도 여전한 액션 스타이다. 그가 이번에 들고 나온 영화는 사연 많은 북아일랜드 사태 때의 살인극이다. 그때 정말 저런 일들이 많았을 것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2024.09.05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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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틱은 추모의 상징 ‘포피’를 왜 거부할까?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지난 11월 11일은 영국의 현충일인 ‘리멤브런스 데이(Remembrance day)’였다. 이날 저녁 런던의 로열 앨버트홀에서는 참전용사를 추모하는 ‘페스티벌 오브 리멤브런스’가 열렸다. 찰스 3세, 윌리엄 왕세자 부부 등 왕실 인사와 리시 수낵 총리를 비롯해 주요 정치인이 참석한 이 국가적인 행사를 BBC가 생중계했다. 특히 올해는 정전 70주년을 맞은 한국전쟁의 전사자들을 가장 먼저 추모했다. 또한 한국전의 참전용사이자 영국의 유명 오디션 프로그램인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2019년 우승한 콜린 새커리(93세)가 아리랑을 한국어로 불러 눈길을 끌었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영국은 1921년부터 참전 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포피를 다는 전통이 생겼다. 1, 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시작한 포피는 규모가 커져 현재는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이 참전한 모든 전투에서 희생한 이들을 추모하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 포피를 둘러싼 갈등도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를 구성하는 브리튼 바로 옆에는 아일랜드라고 불리는 섬이 있다. 12세기부터 무려 700여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아일랜드는 1922년에 독립,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탄생했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총 32개 카운티 중 26개만 독립에 성공했다. 17세기 초 북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남부에서 이주한 신교도가 많은 아일랜드 북쪽에 위치한 얼스터 지방의 6개 카운티는 지금도 영국이 지배하고 있다. 여기가 바로 북아일랜드다.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와 영국의 영향을 받은 가톨릭교도와 신교도 간의 갈등이 뿌리 깊은 지역이다. 가톨릭교도는 아일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공화주의자들로, 남북이 합쳐진 통일 아일랜드를 꿈꾼다. 그에 반해 신교도들은 자신을 영국인(British)과 연합주의자(unionist)로 인식한다. 영국 왕에 충성하는 이들은 북아일랜드가 영국(UK)에 남기를 희망한다.1960년대 말부터 1998년까지 이들이 벌인 갈등을 ‘The Troubles(북아일랜드 분쟁)’이라고 부른다. 남북 아일랜드의 통일을 목표로 하는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왕당파의 군사조직인 얼스터 의용군과 영국 정부군 등이 분쟁에 참여했다. 분쟁은 주로 북아일랜드와 수도인 벨파스트에서 벌어졌으나,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으로 확산된 적도 있다. 특히 필자가 학부 공부를 하던 1990년대에는 IRA가 런던에서 폭탄 테러를 종종 일으켰다. 한번은 수업 시간에 발표를 해야 하는데, 테러로 인해 지하철역이 폐쇄되어 지각한 적도 있었다. 당시 필자가 사과와 함께 IRA 핑계를 대니, 교수님과 동료 학생들이 모두 너그럽게 이해해 준 기억도 난다.분쟁 기간 중 1972년 1월 30일 북아일랜드의 데리(Derry)에서 벌어진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사건이 특히 유명하다. 영국 공수부대원의 일부가 시위 중이던 비무장 가톨릭교도를 항해 사격을 한 것이다. 이로 인해 14명이 사망했고 십수 명이 다쳤다. 이 사건 이후 북아일랜드 분쟁은 더욱더 격화된다. 전설적인 밴드 비틀즈의 멤버 4명은 모두 아일랜드 혈통을 갖고 있는데, 이 중 특히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각각 이 사건을 다룬 노래를 발표해 분노를 표출했다. 1998년 벨파스트 협정이 체결되며 북아일랜드 분쟁은 종결됐지만, 30여 년에 걸친 무력 충돌의 결과로 350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다. 선덜랜드, 위건, 웨스트 브로미치 등에서 뛰었던 미드필더 제임스 맥클린은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진 북아일랜드의 데리 출신이다. 맥클린은 “포피가 단순히 1, 2차 대전 희생자들에 관한 것이라면 (포피 셔츠를) 매일 입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포피는 영국군이 관여해온 모든 갈등에 관한 것”이라며 포피 셔츠 착용을 거부했다. 그는 북아일랜드 분쟁에 참여한 영국군을 지지할 수 없다는 아일랜드인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다. 일부 영국인들은 맥클린의 이러한 소신을 지지했다. 하지만 포피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는 상대팀 서포터스뿐만 아니라 일부 홈 팬들로부터도 오랫동안 야유를 받았다. 심지어 맥클린은 살해 위협을 받은 적도 있다.리멤버런스 데이 행사는 북아일랜드에서도 매년 열리지만, 현재도 대부분의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와 공화당원은 추모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다. 한편 아일랜드 공화국은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아일랜드인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7월 자체적인 국가 기념일을 가진다. 영국의 주요 축구팀 중 유일하게 포피 셔츠를 거부하는 클럽이 있다. 바로 스코틀랜드의 명문 클럽 셀틱이다. 아일랜드의 가톨릭 유산을 바탕으로 설립된 셀틱은 전쟁에서 희생된 군인들을 존중하지만, 어떠한 정치적 또는 종교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중립적인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맥클린과 달리 포피 착용에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 아일랜드 출신 선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북아일랜드 출신의 마틴 오닐 감독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일랜드 대표팀에서 주장을 맡았던 로이 킨이다. 특히 킨은 지도자에서 물러난 후 스카이 스포츠 방송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포피를 꾸준히 착용해 고향 팬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포피는 영국을 포함해 많은 나라에서 존경과 기억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복잡한 역사와 정치적 요인으로 인해 지역과 사람에 따라 포피는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에 빨간색 포피 대신 평화를 상징하는 하얀색 포피를 다는 이들도 최근 늘어나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진정한 추모는 ‘강요’나 ‘의무’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참여할 때 포피는 비로소 추모의 상징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2023.11.1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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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미 시네뷰] ‘이니셰린의 밴시’ 타인을 위한 ‘열린 방’ 하나 쯤은

최근 ‘손절’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 단어의 어원은 주식시장에서 쓰이던 ‘손해(損害)를 보더라도 적당한 시점에서 끊어낸다’는 데서 나온 것이었지만, 순우리말 '손(手)을 끊는다‘로 바뀌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요즘 불편한 관계는 유지하기보다 쉽게 손절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그렇게 한다고 행복해지느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절친이었던 두 사람이 관계를 끝내기 위해 말로만 손을 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손가락을 끊어버리는 영화가 최근 개봉했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 볼피컵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골든글로브 영화 부문 작품상(뮤지컬·코미디), 남우주연상(뮤지컬·코미디), 각본상까지 수상한 ‘이니셰린의 밴시’다.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남우조연상, 각본상, 음악상, 편집상 등의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비록 무관에 그쳤지만 한 영화에서 배우 부문 후보가 네 명이나 나온 것으로 봐도 연기 면에서는 의심할 바가 없는 영화다. 재기 넘치는 영국의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인 마틴 맥도나가 연극으로 상연됐던 원작을 바탕으로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한 블랙코미디다. 이 영화는 영국이 물러난 후 일어난 아일랜드 내전 시기, 평온하고 아름다운 가상의 어느 외딴 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를 치며 우유를 팔아 살아가는 파우릭(콜린 파렐)이 평생 절친이었던 콜름(브렌든 글리슨)에게서 갑자기 그들의 우정을 끝내자는 절교를 선언받게 되면서 서로에게 놀라운 결과를 초래하는 이야기다. 매일 펍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그들의 관계가 악화되자 조용했던 섬마을 사람들 모두가 당황스러워한다. 심지어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케리 콘돈)도 콜름을 찾아가 파우릭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권유하는가 하면, 파우릭은 그와 친한 말썽꾸러기 도미닉(배리 키오건)에게도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하지만 콜름의 태도는 점점 더 완강해질 뿐이다. 도대체 갑자기 왜 태도가 돌변했는지를 캐묻는 파우릭에게 바이올린 연주자이며 작곡을 하는 콜름은 “그냥 자네가 지루해서 싫어졌어”라면서 이제 남은 생을 작곡과 연주에만 몰입하려고 하니, 시시한 대화나 나누는 관계를 유지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말한다. 이해가 안 된다며 자꾸만 집에 찾아오는 파우릭에게 콜름은 자꾸 경고를 무시하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자신의 왼손 손가락부터 잘라버릴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 영화는 많은 상징을 담고 있다. 작품성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한 마디로 불친절한 영화다. 우선 콜름이 관계를 손절하고자 하는 이유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타인이 의사를 분명히 했는데도 본인이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자꾸 콜름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파우릭에게도 공감하기 쉽지 않다.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하기 위해 아일랜드인들이 목숨을 다해 힘을 합쳐 싸웠는데, 1932년 경 영국이 물러나자 아일랜드 내전이 발생한 상황이 시대 배경인 것으로 보아 어제의 형제가 오늘의 적이 되는 상황의 알레고리(풍유)로 보인다. 어쩌면 이처럼 공감되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사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밴시’는 죽음을 부르는 아일랜드 전설 속 마녀다. 이 영화에는 마녀 같은 존재인 맥코믹 부인(쉴라 플리톤)이 수시로 등장하며 사람들의 일을 예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목에 ‘밴시’가 있는 것은 우리 모두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끌려 간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루어가는가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이며 작가인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은 닫힌 방에 들어가 고립돼 있는 세 사람이 서로의 갈등이 극에 달해 “타인들은 지옥이야”라고 외치는 말로 유명하다. 이 영화에는 성모상이 가끔 화면에 등장하기도 하고 성가가 OST로 사용되는 등 가톨릭 인구가 많은 아일랜드의 종교적 분위기가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닫힌 방’에서처럼 타인들이 지옥임을 강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은 가슴 한 켠에 자신과는 다른 타자를 이해하는 ‘열린 방’을 마련하면서 성숙해져 가는 것은 아닐까. 황영미(영화평론가, 시네라처연구소 소장) 2023.03.1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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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축구 역사상 가장 오래 저주받았던 클럽

2022~23시즌 영국 런던에 위치한 프로축구팀은 총 17개다. 이 중 7개 팀이 프리미어리그(EPL)에 속해 있다. 그렇다면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는 프로축구팀이 몇 개나 있을까? 2개 팀이 있다. 너무 적은 팀 숫자에 놀란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런던 인구가 900만이 넘는 데 비해, 에든버러는 50만에 불과하다. 스코틀랜드의 전체 인구도 550만밖에 안된다. 에든버러가 연고인 두 팀은 하트 오브 미들로디언(Heart of Midlothian)과 하이버니안(Hibernian)이다. 두 클럽은 각각 하츠(Hearts)와 힙스(Hibs)라는 애칭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치열한 라이벌 관계인 하츠와 힙스가 맞붙는 에든버러 더비는 세계 축구 역사상 가장 오래된 더비 중 하나다. 에든버러 더비는 스코틀랜드 제1의 도시 글래스고우에 위치한 셀틱과 레인저스의 올드 펌 더비와 유사점이 많다. 힙스와 셀틱은 아일랜드에서 이주한 가톨릭 이민자들이 창단한 클럽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감자 마름병이 아일랜드를 덮친다. 주식이었던 감자 수확은 급속히 줄었고, 당시 아일랜드를 지배하던 영국은 얼마 남지 않은 감자마저 본국으로 빼돌렸다. 이렇게 대기근을 겪는 동안 100만명이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었다. 생존을 위해 해외로 나간 이들도 100만명에 달했다. 해외로 이주한 아일랜드인 중 그나마 사정이 조금 괜찮은 사람들은 미국, 캐나다 등 멀리 떨어진 신대륙으로 떠났다. 가난한 이들은 멀리 갈 뱃삯이 없어 가까운 영국으로 갔다. 스코틀랜드로 건너간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글래스고우에 주로 자리 잡았다. 일부는 좀 더 동쪽으로 이동해 에든버러에 정착했다. 에든버러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치열한 대립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에든버러 성이 있다. 성에서 남동쪽으로 500m 내려오면 카우게이트(Cowgate)라는 유서 깊은 거리가 있다. 국내에 고급 위스키의 대명사로 알려진 발렌타인도 19세기 초반 카우게이트의 한 상점에서 탄생했다. 오늘날의 이 거리는 오락의 중심지로 클럽과 술집이 밀집해 있어, 관광객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다. 하지만 19세기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카우게이트에 자리 잡을 때, 이곳은 빈민가였다. 이민자들은 에든버러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 1875년 하이버니안 FC를 창단한다. 하이버니안은 라틴어로 아일랜드인을 뜻한다. 초창기의 클럽은 가톨릭 교인만 선수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지역사회의 반발을 샀다. 아울러 당시에는 아일랜드 클럽과 경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까지 있었다. 곤경에 빠진 힙스를 도와준 클럽은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의 라이벌이 될 하츠였다. 하츠는 규정을 무시하고 1875년 크리스마스에 벌인 힙스와의 첫 경기에서 1-0으로 이겼다.힙스는 초기의 곤란을 극복한 후 스코틀랜드 축구에서 입지를 굳혀 나간다. 힙스는 1887년 스코틀랜드의 동부 해안에 위치한 클럽으로는 최초로 스코티시 컵(잉글랜드의 FA컵에 해당)에서 우승했다. 아울러 클럽은 당시 잉글랜드 최강이었던 프레스턴 노스 앤드도 물리쳤다. 힙스의 전성시대는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였다. 당시 ‘The Famous 5’라고 불리는 5명의 전설적인 공격수와 함께한 클럽은 1부리그에서 3번 우승했다. 또한 힙스는 1955년 영국팀으로는 최초로 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로피언컵 원년 대회에 참가해 4강에 들기도 했다. 힙스 팬들에게 널리 알려진 전설적인 저주도 클럽이 탄탄대로를 걷는 것 같았던 50년대에 시작했다. 당시 힙스의 회장은 해리 스완이었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비(非) 아일랜드계 최초의 클럽 회장이기도 했다. 스완은 클럽의 뿌리에서 아일랜드를 제거하려고 한다는 의심을 받던 인물이었다. 힙스의 홈 구장인 이스턴로드는 1950년대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에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이스턴로드 스타디움의 사우스 스탠드에 위치했던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하프 문양이 제거됐고, 공사가 끝난 후에도 복구되지 않았다. 그 이후 힙스는 스코티시 컵 우승에 연달아 실패한다. 이에 팬들은 아일랜드의 집시 여인이 클럽에 저주를 내렸다고 믿게 된다. 힙스는 1902년 스코티시 컵을 우승한 이후 2016년까지 결승에 10번 나갔으나, 10번 다 준우승에 머문다. 거듭된 불행에 ‘hibsed it’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한다. 영광에 가까이 왔으나 바로 직전에 망쳐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예문을 들면 다음과 같다. Arsenal only needed to win 1 game out of their last 5 to be a champion, but they hibsed it and finished second(아스널은 챔피언이 되기 위해 마지막 5경기 중 1경기만 이기면 되었지만, 그들은 망쳤고 결국 2위에 머물렀다). 2015~16시즌 중 힙스는 아일랜드 하프가 포함된 클럽의 엠블럼을 홈구장의 웨스트 스탠드 정면에 설치했다. 2016년 5월 21일에 열린 스코티시 컵 결승전에서 힙스는 레인저스를 만나 선제골을 넣으나, 두 골을 허용해 역전당한다. 하지만 후반 35분과 추가시간에 터진 극적인 골에 힘입어, 힙스는 3-2로 재역전승했다. 저주에서 114년 만에 벗어난 것이다. 다음날 힙스 선수단은 지붕이 없는 오픈 톱 형태의 이층 버스를 타고 에든버러 거리에서 퍼레이드를 벌였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15만이 넘는 팬들이 모였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3.03.01 07:34
스포츠일반

폭염에 로리 매킬로이는 왜 모자를 쓰지 않았나

올림픽에 참가한 골프 스타 로리 매킬로이가 모자를 쓰고 나오지 않아 눈길을 끌고 있다. 비도 오고 날도 더워 모자 없는 매킬로이가 더 눈에 띄었다. 두 가지 해석이 나왔다. 매킬로이가 스폰서인 나이키가 아닌 모자를 쓰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마이클 조던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드림팀으로 출전하면서 리복 로고를 국기로 가리기도 했다. 마이클 조던은 나이키의 후원을 받는 선수다. 다른 하나는 국적 시비에 휘말리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북아일랜드인인 매킬로이는 올림픽에 잉글랜드로도 아일랜드로도 출전할 수 있는데 고심 끝에 아일랜드로 참가했다. 아일랜드 국가를 상징하는 모자를 쓰면 북아일랜드의 신교도가 분노할 수 있기 때문에 아예 모자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추측은 모두 틀렸다. 실제 이유는 정치적인 것도, 경제적인 것도 아니었다. 매킬로이는 “나는 머리가 작다. 나이키에서 제작해주는 모자를 썼는데 올림픽에서는 작은 모자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도쿄의 날씨는 매우 덥다. 매킬로이는 "플로리다에 살아서 더운 날씨에 적응됐는줄 알았는데 이 곳 날씨는 상당히 힘들다. 그러나 스폰서 로고를 달지 않는 라이더컵에서도 모자 없이 경기했기 때문에 별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매킬로이는 또 "이전에 올림픽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회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경기해보니 다르다. 나의 의견이 틀렸고 그래서 행복하다. 가능하면 2024년 파리 올림픽에도 나가고 싶다"고 했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sung.hojun@joongang.co.kr 2021.08.01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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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랩소디]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세운 명문 클럽, 셀틱 FC

유럽인들 중에서 한국인과 유사한 민족은 누구일까? 어떤 사람들은 이탈리아와 한국이 비슷하다고 말한다. 같은 반도 국가에, 날씨도 비슷한 편이고, 흥분 잘하는 국민성을 예로 든다. 하지만 아일랜드인이 한국인과 공통점이 더 많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두 나라 국민은 자기 민족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 강대국에 끊임없이 시달려온 역사로 인해 두 민족에게는 한(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악조건 속에서도 두 민족은 뛰어난 문화를 발전시켰고, 음주가무를 즐기는 국민성도 비슷하다. 발전 과정은 다르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선진국으로 도약 한 점도 두나라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우리 조상 중 상당수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국으로 이주했듯이, 아일랜드도 뿌리 깊은 이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난 칼럼에서는 스코틀랜드로 이민 간 아일랜드인들이 설립한 하이버니안 FC에 대해 알아보았다. 라틴어로 아일랜드 섬을 의미하는 하이버니아(Hibernia) 말고도, 아일랜드 이민자들과 연관된 대표적인 이름이 바로 셀틱(Celtic)이다. 켈트족(Celts)과 관련된 유물은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서 발견된다. 이들은 기원전 3세기에 아일랜드와 영국을 포함해 알프스 산맥 북쪽의 유럽 대부분을 점령했다. 멀리는 동쪽의 터키 지역까지 진출했다. 기원전 1세기 줄리어스 시저의 로마 군대는 켈트족과 대대적인 전쟁을 벌여, 이들을 격파했다. 로마와의 전쟁에 패한 켈트족들은 영국 쪽 섬지방으로 이동했다. 기원전 55년부터 로마 제국의 라틴족은 여러 번 영국을 침공해 켈트족과 전쟁을 벌였고, 현재의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역을 점령했다. 전쟁에 패한 켈트족은 북쪽이나 주변 섬 등의 오지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 제국은 결국 5세기 초반까지 약 400년 동안 스코틀랜드 지역을 제외한 브리튼(Britain) 섬을 다스렸다. 라틴족이 철수한 이후, 독일에서 건너온 게르만족의 한 파인 앵글로 색슨(Anglo-Saxon)이 브리튼 섬을 침공하면서 잉글랜드가 형성되었다. 그에 반해 켈트족은 아일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지역에 자리 잡은 변방 종족이 되었다. Celt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형용사가 Celtic이다. 오늘날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등이 포함된 셀틱 국가들의 언어와 문화를 의미한다. Celtic이라는 단어가 셀틱(Seltic)혹은 켈틱(Keltic)으로도 발음되기에, 도대체 어느 발음이 맞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 맞다. S로 시작하는 발음은 불어 Celte에서 유래했다. 또한 영어의 발음 규칙에 의하면 알파벳 c 다음에 e 혹은 i가 오면 S로 발음한다. 영어 단어 cell, cereal, circus를 발음해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 언어 역사학자들은 K 발음이 단어의 어원인 고전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더 잘 반영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현대 영어에서는 K 발음이 좀 더 널리 쓰인다. 단 미국프로농구(NBA)의 보스턴 셀틱스 등 스포츠팀에 한해서는 S 발음으로 사용된다. 1840년대 대기근의 영향으로 아일랜드를 떠나 스코틀랜드로 이주한 이민자들의 상당수는 글래스고우에 정착했다. 1875년 에든버러에서 설립된 하이버니안 FC에서 영감을 받은 이들은 1887년 이민자들의 빈곤을 돋기 위한 기금 모금 수단으로 축구팀을 설립한다. 이 팀은 셀틱 FC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뿌리인 켈트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셀틱은 이후 승승장구하며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명문 클럽으로 자리 잡았다. 셀틱은 1965년부터 1974년까지 9시즌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고, 또한 영국 클럽으로는 최초로 1967년 유로피언 컵(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에서 우승하는 영광을 누렸다. 단일 시즌에 자국의 1부 리그 우승, FA 컵과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하면 트레블(Treble)이라고 말하는데, 셀틱은 유럽 클럽 최초로 1966~67시즌에 이를 달성했다. 셀틱을 이야기할 때 ‘아덴라이 평원(The Fields of Athenry)’이라는 현대 민요를 빠뜨릴 수 없다. 대기근을 배경으로 한 이 노래의 가사는 마이클과 메리 부부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있다. 마이클은 굶주린 가족을 위해 옥수수를 훔치다 감옥에 갇힌다. 호주로 유배 가기 전날 마이클은 메리를 위로하면서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 달라고 부탁한다. 메리는 남편을 실은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가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는 1990년대 들어 아일랜드 축구대표팀과 셀틱 FC의 응원가로 채택되어 현재까지 널리 사랑받고 있다. UEFA 유로 2012에서 당시 최강 스페인과 붙은 아일랜드는 실력 차를 실감하며 0-4로 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일랜드 팬들은 자국의 예선탈락이 확정적인 후반 38분부터 종료 휘슬이 울린 후까지 '아덴라이 평원'을 열창해 전 세계 많은 축구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독일 방송국의 해설진은 '아덴라이 평원'이 울려 퍼지는 동안 현장의 감동적인 모습을 시청자에게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독일 축구 중계팀과 아일랜드 팬들의 합작으로 만들어낸 이러한 수준 높은 장면은 시청자와 현장을 하나로 묶는 품격 있는 방송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수준의 중계는 단순히 방송 기술의 향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축구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이러한 중계를 국내에서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초창기 셀틱의 팬들은 스코틀랜드에 정착한 아일랜드 이민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하지만 셀틱의 성장과 더불어 유럽, 북미, 오세아니아 등에 사는 아일랜드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팬으로 가세한다. 아울러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팬들까지 등장한다. 현재 셀틱은 전 세계에 걸쳐 200개가 넘는 서포터스 클럽을 거느린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다. 이정우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1.01.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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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랩소디] 유럽의 흑인, 아일랜드인들이 창단한 하이버니안 FC

사회 풍자가 담긴 수작을 여러 편 만든 알란 파커(Alan Parker) 감독은 1991년 ‘더 커미트먼트(The Commitments)’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지미 레빗은 노동자 계급의 젊은 음악가들로 구성된 소울(soul) 밴드를 만든다. 소울 음악은 흑인들의 대표 음악 장르다. 밴드를 구성하던 중 멤버 중 하나가 지미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소울 음악을 하기에는 너무 피부가 하얀 것 아니야?” 그러자 지미는 이렇게 답한다. “아일랜드인들은 유럽의 흑인이다(The Irish are the blacks of Europe).” 평화로운 에메랄드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나라, 아일랜드에 사는 사람들은 왜 이러한 말을 들었을까? 아일랜드는 선진국으로 인정받지만, 불과 30년 전만 하더라도 유럽의 최빈국이었다.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로서, 처절한 고난의 역사를 겪어왔다. 이에 많은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위해 낙후되고 억압된 아일랜드를 떠났다. 세상의 많은 이민자가 겪었듯이 아일랜드 이민자들도 때때로 환영받지 못했고, 새로 정착한 사회에서는 차별과 편견에 시달렸다.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인들은 오랫동안 사회·경제적 사다리의 밑바닥에 있었다. 이들은 또한 흑인들처럼 음악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아일랜드인의 해외 이주는 중세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1700년대 이후로 1000만 명에 가까운 아일랜드인들이 고향을 떠났다. 현재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아일랜드인 혈통 인구가 80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현재 아일랜드 공화국의 인구는 500만 명이 채 안 된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국민이 조국을 떠났는지 알 수 있다. 1840년대 감자 마름병(potato blight)이 유럽 대륙을 휩쓸다, 아일랜드에 상륙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의 주식이었던 감자 수확이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당시 이들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은 얼마 남지 않은 곡식마저 본국으로 빼돌렸고, 아일랜드는 1845년부터 1849년까지 대기근(The Great Famine)을 겪었다. 이 기간 아일랜드에서는 무려 100만 명이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너도나도 해외로 나가는 배에 몸을 실었고, 이렇게 떠나간 인구만 100만 명에 달했다. 몇 년의 대기근 동안 아일랜드의 인구는 약 25% 감소했다. 해외로 떠난 이들 중 그나마 사정이 좀 괜찮은 사람들은 미국·캐나다·호주 등 먼 곳으로 떠났다. 당시 이들을 실은 선박은 낡고 조잡했으며, 식량조차 부족해 많은 이민자가 목적지에 닿기 전 질병과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이에 이들을 실은 선박을 관선(coffin ship)이라 부르기도 했다. 비싼 장거리 뱃삯을 마련하지 못한 이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영국으로 이주했다. 스코틀랜드로 이주한 아일랜드인은 주로 글래스고우에 자리 잡았으나, 일부는 에든버러에 정착했다. 특히 에든버러 성 근처의 카우게이트(Cowgate) 거리에 많은 아일랜드인이 모였고, 이곳은 ‘작은 아일랜드(Little Ireland)’로 불렸다.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에든버러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1875년 하이버니안 FC를 창단했다. 하이버니아(Hibernia)는 고전 라틴어로 아일랜드 섬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이버니안(Hibernian)은 아일랜드 사람을 뜻한다. 초창기 하이버니안은 가톨릭 교인만 선수로 뛸 수 있었고, 아일랜드 색채가 너무 강했다. 이에 따돌림과 편견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 클럽은 스코틀랜드 지역사회에 빠르게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 힙스(Hibs)라는 애칭으로도 알려진 하이버니안은 영국 축구 클럽(British football club, 잉글랜드·웨일즈·스코틀랜드의 축구 클럽을 의미) 역사에도 선구자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로피언 컵은 1955~56시즌에 처음 시작되었다. 초창기 유로피언 컵에 참가하는 팀은 프랑스의 축구 잡지 르퀴프(L'Equipe)가 선정했다. 이에 첼시가 잉글랜드를 대표해 참가자격을 얻었으나,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이러한 클럽 대항전이 자국 리그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첼시의 참가를 불허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챔피언이었던 애버딘(Aberdeen)도 같은 이유로 참가하지 않았다. 현재의 챔피언스리그나 유로파 컵에 참가하려면 자국 리그에서 얻은 성적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하지만 초창기 유로피언 컵에 초청받은 클럽들은 지금처럼 자국 리그에서 거둔 성적을 엄격하게 보지 않았고, 각 클럽이 가지고 있는 대표성과 권위에 가중치를 부여했다. 이에 따라 전 시즌 자국 리그 5위에 그쳤던 힙스가 유로피언 컵에 참가할 수 있었다. 힙스는 결국 유로피언 컵에 참가한 영국 최초의 클럽이라는 영예를 가지게 되었다. 비록 대타로 참가했지만, 원년 대회에서 4강에 들며 영국 축구의 자존심을 지켰다.힙스는 영국에서 셔츠 스폰서십을 도입한 최초의 1부 리그 클럽이기도 했다. 힙스는 1977년 의류업체 벅타(Bukta)와 스폰서십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TV 방송국은 "스폰서가 새겨진 셔츠를 입으면 경기를 중계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이에 힙스는 스폰서 로고가 없는 '방송용 셔츠'를 따로 만들기도 했다. 힙스의 영향으로 스코틀랜드에 퍼져 있던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이후 셀틱 FC, 던디 하이버니안(1923년 던디 유나이티드로 이름 변경) 등을 설립한다. 이정우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1.01.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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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IS] 리암 니슨 "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 해명

인종 차별 논란에 휩싸인 할리우드 배우 리암 니슨이 직접 해명에 나섰다. 리암 니슨은 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ABC '굿모닝 아메리카'에 출연해 "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 일은 이미 40년 전에 벌어진 것"이라며 "만약 지인이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더라도 나는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단지 친구가 끔찍한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번 발언으로 상처 받은 이들이 있다는 말에는 "폭력은 폭력을 낳고, 편견은 또 다른 편견을 부른다"라고 이야기했다. 앞서 리암 니슨은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와 신작 '콜드 체이싱' 홍보 인터뷰 중 지인이 흑인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한 적 있다고 말하며 "1주일 정도 펍 같은 곳에서 흑인이 나에게 덤비길 원했다. 그래서 그를 죽일 수 있도록 말이다"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인터뷰가 공개된 후 인종 차별 논란이 불거졌고, 예정된 영화 홍보 일정이 취소되는 등 파문이 커져갔다. 리암 니슨은 북아일랜드 출신으로, 지난 2014년에도 "우리는 모두 인종차별적 모습을 갖고 있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박정선 기자 park.jungsun@jtbc.co.kr 2019.02.07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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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몰리 스위니’, 내달 대학로 눈빛극장에 올라

아일랜드의 극작가 브라이언 프리엘의 연극 '몰리 스위니(Molly Sweeney)'가 무대에 오른다. 극단 유랑선은 다음달 3일부터 9일까지 대학로 눈빛극장에서 올해 가을 정기 공연으로 '몰리 스위니'를 선보인다. 40년 만에 개안 수술을 받아 시력을 회복한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이야기로 그 근간에는 침략과 독립의 역사 속에서 겪어야 했던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작가의 질문이 담겨 있다. 식민과 전쟁의 경험에서 비롯된 아일랜드인의 정서가 우리와 유사한 점이 많아 감동의 폭이 크다. 보이는 세계에서도, 과거의 세계에서도 추방된 여주인공의 삶을 통해 경계를 살아가는 인간을 엿본다. 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 2012.08.0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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