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셰린의 밴시’스틸. 사진제공=월트컴퍼니코리아 최근 ‘손절’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 단어의 어원은 주식시장에서 쓰이던 ‘손해(損害)를 보더라도 적당한 시점에서 끊어낸다’는 데서 나온 것이었지만, 순우리말 '손(手)을 끊는다‘로 바뀌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요즘 불편한 관계는 유지하기보다 쉽게 손절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그렇게 한다고 행복해지느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절친이었던 두 사람이 관계를 끝내기 위해 말로만 손을 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손가락을 끊어버리는 영화가 최근 개봉했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 볼피컵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골든글로브 영화 부문 작품상(뮤지컬·코미디), 남우주연상(뮤지컬·코미디), 각본상까지 수상한 ‘이니셰린의 밴시’다.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남우조연상, 각본상, 음악상, 편집상 등의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비록 무관에 그쳤지만 한 영화에서 배우 부문 후보가 네 명이나 나온 것으로 봐도 연기 면에서는 의심할 바가 없는 영화다. 재기 넘치는 영국의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인 마틴 맥도나가 연극으로 상연됐던 원작을 바탕으로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한 블랙코미디다.
이 영화는 영국이 물러난 후 일어난 아일랜드 내전 시기, 평온하고 아름다운 가상의 어느 외딴 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를 치며 우유를 팔아 살아가는 파우릭(콜린 파렐)이 평생 절친이었던 콜름(브렌든 글리슨)에게서 갑자기 그들의 우정을 끝내자는 절교를 선언받게 되면서 서로에게 놀라운 결과를 초래하는 이야기다. 매일 펍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그들의 관계가 악화되자 조용했던 섬마을 사람들 모두가 당황스러워한다.
심지어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케리 콘돈)도 콜름을 찾아가 파우릭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권유하는가 하면, 파우릭은 그와 친한 말썽꾸러기 도미닉(배리 키오건)에게도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하지만 콜름의 태도는 점점 더 완강해질 뿐이다. 도대체 갑자기 왜 태도가 돌변했는지를 캐묻는 파우릭에게 바이올린 연주자이며 작곡을 하는 콜름은 “그냥 자네가 지루해서 싫어졌어”라면서 이제 남은 생을 작곡과 연주에만 몰입하려고 하니, 시시한 대화나 나누는 관계를 유지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말한다. 이해가 안 된다며 자꾸만 집에 찾아오는 파우릭에게 콜름은 자꾸 경고를 무시하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자신의 왼손 손가락부터 잘라버릴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니셰린의 밴시’스틸. 사진제공=월트컴퍼니코리아 이 영화는 많은 상징을 담고 있다. 작품성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한 마디로 불친절한 영화다. 우선 콜름이 관계를 손절하고자 하는 이유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타인이 의사를 분명히 했는데도 본인이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자꾸 콜름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파우릭에게도 공감하기 쉽지 않다.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하기 위해 아일랜드인들이 목숨을 다해 힘을 합쳐 싸웠는데, 1932년 경 영국이 물러나자 아일랜드 내전이 발생한 상황이 시대 배경인 것으로 보아 어제의 형제가 오늘의 적이 되는 상황의 알레고리(풍유)로 보인다. 어쩌면 이처럼 공감되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사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밴시’는 죽음을 부르는 아일랜드 전설 속 마녀다. 이 영화에는 마녀 같은 존재인 맥코믹 부인(쉴라 플리톤)이 수시로 등장하며 사람들의 일을 예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목에 ‘밴시’가 있는 것은 우리 모두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끌려 간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루어가는가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이며 작가인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은 닫힌 방에 들어가 고립돼 있는 세 사람이 서로의 갈등이 극에 달해 “타인들은 지옥이야”라고 외치는 말로 유명하다. 이 영화에는 성모상이 가끔 화면에 등장하기도 하고 성가가 OST로 사용되는 등 가톨릭 인구가 많은 아일랜드의 종교적 분위기가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닫힌 방’에서처럼 타인들이 지옥임을 강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은 가슴 한 켠에 자신과는 다른 타자를 이해하는 ‘열린 방’을 마련하면서 성숙해져 가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