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박수성의 How are you] 역대 신인 최다승, 신인왕 김건우
선수와 스태프로 LG 유니폼을 각각 두 번씩이나 입었으며 LG 구단이 최초로 은퇴식을 열어준 선수는? 야구를 깨나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 질문에는 조금씩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그렇다면 좀 난이도가 낮은 질문으로, 역대 프로야구 신인 최다승을 거두고 1986년 신인왕에 오른 선수는? 바로 김건우(46)다. 역대 신인 최다승 기록은 2006년 한화 류현진이 경신을 시도했지만 결국 타이에서 멈췄고 김건우는 엄연한 공동 타이틀홀더다.'김건우'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불운'이라는 단어다. 인생의 고비마다 뜻하지 않은 악재가 항상 그를 멈추게 했고 그는 그때마다 때로는 방황하고 묵묵하게 인내하다 또다시 박차고 일어나고는 했다. 2000년 야구장을 완전히 떠난 그는 사회 초년병으로 좌충우돌하다 현재는 그렇게 그리던 야구장으로 다시 돌아와 있다. 리틀야구 전도사로서 일하고 있는 그의 직장은 강동구 리틀야구단과 김건우 야구심리연구소다.루키 시절 뜻하지 않은 홈개막전 선발대부분의 팬들이 '김건우'를 투수로 기억하고 있지만 86년 MBC에 입단할 때 그는 엄연하게 타자로 지명을 받았다. 한양대 4번이었고 타격 재질이 뛰어났다. 그러나 시즌 개막 전 진해훈련으로 떠난 전지훈련 기간 중 우연한 사건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전지훈련 간 지 며칠이 안돼 가져간 나무배트 열 자루가 모두 부러졌다. 김재박, 이광은 등 당시 선배들이 배트를 몇 개 더 줬지만 며칠을 못 버텼다. 마침 나무 배트 적응에 짜증이 났던 그가 3루 연습을 하고 있는데 1루에 뿌리는 공의 엄청난 속도를 유심히 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미즈다니 코치였다. 미즈다니 코치는 당시 김동엽 감독에게 투수 전향을 강력하게 권고했고 그는 이후 투수조에 끼어 연습을 시작했다.시즌 개막. 원정경기를 다녀온 후 4월 3일 홈개막전이었다. 당시 LG 투수진은 하기룡, 유종겸, 오영일, 정삼흠 등 쟁쟁했다. 당연히 그는 개막전 선발은 꿈도 못 꿨고 전날 동기였던 김태원과 한 잔까지 걸친 터였다. 그러나 플레이볼 1시간을 남긴 즈음 감독이 부르더니 깜짝 통보를 했다. "네가 긴장해 잠 못 잘까봐 얘기 안 했는데 오늘 선발은 너야!" '가운데만 보고 던지자'고 생각하고 공을 뿌렸고 청보 핀토스를 상대로 1안타 완봉승을 거뒀다. 그 해 성적이 18승 6패, 방어율은 1.81. 화려한 루키 시절이었다.불의의 교통사고1987년 9월 12일.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날이다. 12승 7패로 성적도 괜찮았고 팀도 상승세였다. 대치동에 사는 여자친구를 데려다 주기 위해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승용차가 덮쳤다. 오른쪽 다리와 양팔이 조각조각 부러졌고 여자친구도 크게 다쳤다. '교통사고'식 땜질 수술을 하는 바람에 이후 그의 팔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2년 공백 후 다시 마운드에 섰지만 구속은 10㎞ 이상 떨어졌고 변화구의 각은 무뎌졌다. 그해 성적은 3승 2패 2세이브. 그해부터 91년까지 기록한 승수가 모두 6승이었다. 그 중 90년에 기록했던 1승 1세이브는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록이다. 1승은 당시 6연패를 끊어주는 소중한 1승이었고 1세이브는 3연승을 완성하는 알토란같은 세이브였다. 교통사고만 없었더라면, 수술을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김건우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었다. 당시 그의 옆에서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던 여자가 아내인 정재연(45)씨다."타자를 했다면…?"선린상고 2학년 시절 그는 이영민 타격상을 받을 정도로 타격에 재능이 있었다. 게다가 어깨까지 강했다. 큰 모션 없이도 100m는 공을 보낼 정도였다. 당시 선린상고에 박노준 외에 투수 자원이 마땅히 없던 것이 그를 투수의 길로 이끄는 계기가 됐다.한양대 시절에는 타자만 하다 프로에 갔으니 그의 어깨는 싱싱했다. 86년 신인 최다승을 세운 것도 그 싱싱한 어깨가 원천이었다. 김건우는 87년 부상을 입은 후 투수로서 재기를 모색하다 이후 타자로 전향했다. 90년부터 타석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92년부터 본격적으로 타자로 변신했다. 92년 그는 시즌 초 최다안타 수위를 달릴 정도로 방망이에 불이 붙었다. 붙박이 4번 타자였다. 그러나 7월 12일, 장종훈과 충돌하면서 손목골절을 입는 불운이 찾아왔다. 93년에는 독한 마음을 먹고 강훈련을 하다 연습이 지나쳐 손등에 피로골절이 왔다. 참고 참던 그도 버틸 힘이 없었다. 94년 LG구단이 그에게 은퇴를 권유했고 그는 담담히 받아들였다.그러나 KBO 김건우 기록에는 97년에 7경기에 나와 11과 ⅔이닝을 던진 기록이 있다. 2군에서 주로 재활 선수들을 돌보던 그는 스스로 재활법을 터득했고 강해진 어깨를 발견했다. 97년 복귀했고 승·패·세이브는 기록하지 못했지만 마운드에 서는 게 너무 행복했다. 김건우는 "'투수 김건우'보다는 '타자 김건우'가 사실 더 애착이 간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을 왜 못 갔는지 후회가 된다"며 "타자에만 전념했다면 박재홍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싶다"며 회한에 젖어들었다. 박수성 기자 ▷ 높이뛰기 한국 기록자, 이진택▷ 이은철 “바로셀로나서 경기 후 실핏줄 다 터져…”▷ 사격선수 이은철 “금메달 이후 목표 없어 방황”▷ 장지영 “88년 이만기와 결승이 최고의 승부”▷ 약관의 천하장사, 장지영
2009.05.25 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