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했다 싶습니다. 나이 서른넷, 영어 한 마디도 못하면서 공부하겠다고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으로 건너갔으니까요. 더구나 막 석사를 땄을 때는 IMF가 왔습니다. 못 견디고 결국 귀국했죠. 그러고 보니 교수가 될 때까지 딱 9년을 백수생활을 했었네요."
사람 좋을 것 같은 인상은 여전했다. 평생을 해온 '스포츠 머리'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돌고래 스파이커'가 아니라 어엿한 대학 교수님이다.
장윤창(49). 그는 한국 배구가 최고의 흥행을 구가하던 시절,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스타다. 강만수 보다도 여성들 사이에 인기는 더 높았다. 그는 그 이유로 "내가 불쌍해 보였나 봐요"라고 하지만 그는 배구팬들에게 항상 시원한 볼거리를 보여줄줄 알았던 원조 프로였다.
미국서 4년간 스포츠 경영학 공부
94년이었다. 93년 시즌 고려증권을 다섯번째 정상에 올려놓고 은퇴를 선택했다. 대부분 스타들이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선택하지만 그는 항상 공부가 하고 싶었다. 당시 경기대 손종국 총장의 추천서를 받고 날아간 곳이 경기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미국의 조지워싱턴 대학이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면 "피 땀 흘려 했다"고 할 정도로 그는 공부에 매달렸다. 4년간 공부해 스포츠 경영학 석사를 땄다. 그 때 IMF가 터졌다. "800원대 하던 달러가 1800원까지 치솟았습니다. 학비 등 경비가 3배는 더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박사까지 하고 싶었지만 결국 짐을 쌌죠."
귀국 후 한국체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고 2003년 꿈에 그리던 교수가 됐다. 경기대 체육학과에서 4년째 학과장을 맡고 있는 그는 학부 2과목, 석사과정 1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학생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그의 강의는 항상 학생들의 인기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받은 사랑만큼 돌려드려야죠." 학교 밖에서 그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가 더 있다. 전·현역 스포츠 스타들과 함께 만든 봉사단체 '함께 하는 사람들'(함사모)의 회장으로 봉사활동에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고 있고 일주일에 또 4번은 장스클럽(장윤창 배구스쿨)에서 직접 지도도 한다.
둘 다 한국으로 돌아온 직후인 99년 시작해 10년을 계속해 오고 있다. 배구로 받은 사랑을 돌려드리고 싶다는 생각에서다다.
회원이 5000명에 달하는 '함사모'의 봉사활동은 규모가 크다. 매달 한번씩 불우 이웃을 대상으로 자장면 나눔 활동이나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상반기에는 '희망 마라톤', 후반기에는 '일일 호프' 등을 열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단체들을 돕고 있다.
"10년째 회장 장기집권이라 물려줄 때가 됐는데 물려받으려는 후배가 없네요." 그는 그러나 전혀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타고난 성실성 그는 자신의 장점으로 끈기와 집념을 꼽는다. 인창고 2학년때 국가대표가 돼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의 기록을 갖고 있는 그의 가장 무기는 엄청난 탄력이었다. 그 원동력이 바로 성실성이었다.
그는 10㎏에 달하는 모래조끼를 입고 하루 3000번씩 줄넘기를 하며 체력을 키웠다. '스카이 서브' '백어택' 등 화려한 기술의 배경에는 이처럼 숨은 노력이 있었다.
15년 가까이 대표 선수로 뛰면서 조그만 잡음 하나 없었다.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막무가내식 대시도 많이 받았지만 절제로 이겨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진짜 한눈 팔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은퇴할 때 돌이켜보니 내가 뭘 했나 싶기도 했다. 운동밖에 몰랐고, 오죽하면 술·담배를 시도해볼 시간도 없었다"고 했다.
현역 지도자 생각은? "네버!" 그는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인터뷰 동안 몇번 "코트로 돌아올 생각은 없는가?"를 물었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안정된 교수직을 버릴만큼 현장에 대한 욕심은 없습니다. 밖에서 보면 분명히 잘 보이는 측면이 있지만…. 선수겸 코치로 7년동안 뛰어 지도자로서 어느정도 경험은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배구에 대한 관심이 사라질리 없다.
지난해 올림픽 본선에 남녀대표가 모두 탈락한 책임을 지고 배구협회 이사직을 그만뒀지만 애정어린 조언은 계속하고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다.
그는 "현재 한국 배구의 문제는 열매만 따먹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재료가 있어야 맛깔난 음식을 만들고 파이를 더 키울텐데 재료인 꿈나무를 키우는데는 공을 안들이고 현실에만 안주하고 있습니다"라며 한구 배구의 현실에 일침을 가했다.
'스카이 서브' 국내 원조
장윤창은 '스카이 서브'의 국내 원조로 유명하다. 80년대 중반과 90년대초 그가 서브를 넣기 위해 공을 통통 튀기고 있으면 관중석은 그의 호쾌한 스카이 서브를 기대하며 들썩들썩했다.
당시 외국 선수들도 별로 시도하지 않던 스카이 서브를 트레이드마크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대학 시절인 81년이었다. 중동 원정을 떠났을 때 몇차례 실전에서 적용해본 스카이 서브의 정확도와 위력은 생각보다 높았고 국내에 들어와 더 가다듬은 후 써먹기 시작했다.
83년은 고려증권과 현대자동차써비스가 동시에 창단되면서 실업배구가 흥행에 날개를 단 시기였다. 그 해 바로 장윤창이 고려증권에 입단했다. 센터와 라이트를 번갈아 보면서 87㎝에 달하는 엄청난 서전트 점프를 무기로 코트를 휘저었다.
80년대 장윤창-강만수(현대)-강두태(럭키금성)의 거포 싸움은 최고의 흥해카드였다.
한국배구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고려증권은 1988년 모기업의 부도로 팀이 해체되지만 당시 멤버는 현재 남녀배구 현장에서 큰 파워를 형성하고 있다.
이성희(당시 세터)는 여자배구 GS칼텍스, 박삼용(레프트)은 KT&G, 어창선은 흥국생명 감독으로 있어 여자배구에서는 막강 파워다. 또 유중탁(센터)은 명지대 감독, 정의탁(센터)은 평촌고 감독, 이경석(세터)은 경기대 감독 등으로 남자배구를 지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