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정신분석학자, 심리상담사를 만난 느낌이었다. 40대 중반의 어엿한 벤처기업 사장으로 잘 나가는 인생을 살고 있는 그는 누구보다 절망에 가까운 고비를 많이 맞았고 그때마다 고비를 기회로 전환시키며 진화했다.
"자신이 의심하는 만큼 목표는 빗나가게 돼있다. 긍정하는 만큼 더 많이 가능해진다." "항상 진화할 수는 없다. 한 단계 진화하려면 뒤로 조금 움츠렸다 다시 나가는게 자연의 이치다. 운동에서는 그걸 슬럼프라고 하지만 슬럼프는 거꾸로 보면 앞으로 나가기 위한 전조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한국에 처음으로 사격 첫 금메달을 안겨준 이은철(42). 그는 운동선수로는 드물게 벤처기업 사장이 돼 현재 IT 첨단분야의 신제품을 개발 중이다.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로 세계 정상에 올랐던 그는 똑 부러지는 사격 솜씨만큼이나 능수능란한 일처리로 벤처 대박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서 벤처기업 사장으로
현재 그의 회사는 분당의 파크뷰 건물 내에 있다. 사무실 입구에는 '실리콘밸리테크'라는 자신의 회사 이름 외에 미국의 3개 IT기업의 이름이 나란히 붙어있다. 한국에 진출하려는 미국 IT업체들의 인큐베이팅 역할을 겸하고 있다.
'실리콘밸리테크'는 통신장비, 보안 분야의 제품을 개발하고 있고, 특히 무선중계기에 사용되는 파워앰프에 회사 역량을 앞으로 집중할 생각이다. 올해초에는 국가로부터 '이노비즈' 인증을 받아 회사운영에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2005년 회사를 창립한 그는 매해 2배 이상의 성장을 이뤄내며 착착 꿈을 실현해가고 있다.
금메달 이후 목표 없어 방황 그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두 번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 중 한번이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난 이후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인생의 가장 정점이지만 그는 "목표가 없어지자 마치 칠흑같은 어둠 속에 혼자 팽개친 기분이었다"며 당시의 느낌을 털어놓았다.
당시 그는 지도자로 후배들을 양성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여건은 녹록치 않았다. 지도자가 되기에는 젊은 나이였고 자리도 나지 않았을 뿐더러 협회에서는 선수로 더 뛰어줄 것을 주문했다. 그는 결국 2000년 시드니올림픽까지 대표 선수로 활약했다. 84년 LA올림픽부터 무려 5년 연속 올림픽에 나가게 된 것이다. "당시 '번아웃(burn out) 상태였다. 목표가 없어지자 온 몸의 기력이 쇠진한 것을 느꼈다."
시드니올림픽이 끝나고 난 후 그는 과감하게 IT에 인생을 던져 보기로 결심했다. 소속팀이었던 KT에서 3급 정직원 신분까지 약속했지만 새로운 도전이 고팠다. 처음 찾은 곳이 '윈드 리버'라는 회사였고 이후 IP인퓨전 한국·대만 지사장으로 발탁됐으며 2005년 지금의 회사를 설립했다.
기대만큼 실망도 컸던 88올림픽 그의 인생에서 첫번째 막다른 골목은 88서울올림픽이었다. 당시 그의 실력은 지금 돌이켜봐도 인생 최고의 정점에 있었다.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인 87년 복사, 3자세, 공기총 등 분야를 막론하고 한국신기록과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수십번 작성했다. 당연히 주위에서, 매스컴에서도 금메달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예선탈락. 88년초부터 연습 성적이 하향점을 그리더니 결국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당시 그는 모 신문에서 난 그를 비꼬는 기사를 보고 자살까지 생각했다. 생전 처음으로 술을 입에 대봤다. "당시 나의 고민을 들어줬던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몰랐다"는 것이 그의 술회다.
스포츠·장학 재단이 궁극의 목표 그러나 그의 고향은 역시 운동, 스포츠다. 그는 현재 벤처기업 사장으로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장학재단, 특히 스포츠 재단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지금 돈을 버는 것은 그것을 위한 과정이다. 마지막 올림픽었던 시드니올림픽에서 만나 의남매를 맺은 강초현을 만난 것이 그의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 계기가 됐다. 어려운 소녀가장이지만, 밝게 살면서 운동도 열심히 하는 '초현'이를 보고 스포츠 장학재단을 머리 속에 그렸다.
그는 "내가 돈을 벌면 누구보다 잘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나는 재단 일에 몰두하고 싶다. 특히 운동하는 후배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