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의 새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절벽 위에서 한 소녀가 사라지고 소녀의 행방을 쫓는 현수(김혜수)의 이야기를 그린다. 추리물의 외양을 썼지만, 추리물이 아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는 드라마 장르의 작품이다. 주인공 현수 역을 맡은 김혜수는 별달리 큰 사건이 없는 이 영화의 서사를 홀로 꿋꿋하게 이끌어나간다. 커다란 눈부터 좌절과 체념 사이의 걸음걸이까지, 섬세한 표현으로 감정 연기를 펼친다.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그는 극장을 나가는 관객의 마음까지 아름답게 만든다.
투자가 잘 되지 않았던 이 영화의 진가를 알아본 이가 김혜수다. 그 덕분에 투자를 받아 하나의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 이토록 이 영화에 애정을 담은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이 이 영화를 찍으며 상처를 치유했듯, 관객 또한 그러길 바랐다고. 상처를 남겼던 개인사까지 먼저 털어놓은 그는 "이런 영화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김혜수
-후배들에게 먼저 연락해 캐스팅에 도움도 주는 등 미담이 많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건가. "솔직히 나쁜 놈도 마음 속으론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할 거다. 나도 이왕이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늘 모순이 많다. 언행일치하는 사람도 아니다. 일관되게 마음 가는 데로 산다. 어느 순간 자유를 갈망하고, 없던 개념이 생기고 이건 아니다. 마음 움직이는 데로 간다. 물론 즉흥적이거나 기분이 좌우되는 것과는 다르다. 책임감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왕이면 좋은 걸 사람들이 많이 알았으면 한다. 내가 알고 있는데 모른 척 지나가고 싶지 않다."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은 듯하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 좋은 사람을 늘 발견하고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보면서 힘을 얻고 용기를 얻는다. 강인해 보이기도 하겠지만 나도 나약한 인간이다. 난 늘 내가 혼자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원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큰 운이었던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순천댁이 '네가 남았다'라는 대사를 보고 펑펑 울었다. 나이가 들수록 많은 것들이 깊게 느껴지고 소중한 것들이 많아진다. 내밀하게 느끼는 것들이 소중하다. 하나하나 만나는 인연들이 감사하고 소중하다."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하는 이유가 있나. "싸이월드 시절에 그런 걸 재미있어했다. 그냥 그 자체가 재미있다. 이번엔 전작 드라마 때문에 홍보팀에서 계정을 만들어줬는데, 넘겨받아서 해봤더니 재밌더라."
-정말 오래 연기했다. "배우는 피폐해지는 직업이다. 과연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부담감이 든다. 나는 나를 좋아한다. 자기애가 심한 게 아니라 그냥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기를 할 때는 내가 싫다. 한계를 직면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하고 조용히 은퇴하자'는 생각도 했다. 가진 것에 비해 잘 해왔다는 생각도 솔직히 든다. '그만하자. 이러다 죽겠다' 싶기도 하다."
-은퇴를 생각하면서도 연기를 하게 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원동력이 아니라 관성이다. TV에서 우연히 '밀양'을 본 적 있다. 2017년 쯤이었다. 극장이 아닌 TV로 보니 또 다르더라. 거기 나오는 배우들이 너무 위대하게 느껴졌다. '연기는 저런 배우들이 해야지. 그동안 수고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밖에 나가 찬바람을 쐤는데 마음이 정리됐다. '늘 나는 왜 20%가 부족할까'란 생각을 했었는데, 괴로운 게 아니라 마음이 심플하게 정리됐다. '그래 수고했다. 누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돼. 나에게 내가 의미를 부여하면 돼'라고 생각했다. 새벽 세시였다. 저렇게 훌륭한 배우들이 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나더라. 그리고 얼마 있다가 '국가 부도의 날' 시나리오를 봤는데 또 피가 거꾸로 도는 거다. '밀양'을 그때 TV에서 봤을 때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걸 자연스럽게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도치 않은 순간에 확실히 그 감정을 느꼈다. 근데 너무 치사하게 몇개월 사이에 '이것까지만 하고 은퇴하자'는 생각을 했다.(웃음)"
박정선 기자 park.jungsun@jtbc.co.kr 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