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하는 진동 때문에 공연을 제대로 볼 수 없다면 그게 제대로 된 공연장인가. ‘연뮤덕’(연극 뮤지컬 팬을 뜻하는 말)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마니아층이 두텁고 나날이 업계는 성장하고 있는데, 어째서 관객들은 옆사람, 앞사람이 메모장에 필기를 하는 것으로도 관람에 방해를 받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공연을 봐야 하는 걸까.
최근 한 매체 기자가 뮤지컬을 보러 갔다가 결국 보지 못 하고 나온 일이 있었다. 메모하는 게 불편했던 옆자리 관객이 공연장 관계자와 제작사 관계자를 대동해 메모를 하지 못 하게 하려했고, 결국 자리 이동을 권유받은 기자가 이를 거부하고 퇴장했기 때문이다. 관련 내용이 보도된 이후 일부 ‘연뮤덕’들은 “필기를 하면 진동이 느껴진다”, “필기를 하면 고개를 숙이게 돼 뒷사람의 공연 관람에 방해가 된다”는 등의 주장을 했다.
작은 소음이나 불빛에도 민감한 공연장의 환경을 고려해 관객들이 최대한 미동 없이 공연을 봐야 한다는 걸 일명 ‘시체관극’이라 부른다. 기침이나 재채기 같은 불가피한 소음은 최대한 장면이 끝난 뒤 암전에서 내고, 관람 시 뒷사람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옆사람을 치지 않기 위해 다리를 꼬지 않고, 겨울철엔 패딩 등 서걱거리는 소리가 날 수 있는 외투를 입지 않거나 입었더라도 타인에게 피해가지 않게 벗어서 잘 간수하는 등이 공연장에서 요구하는, 혹은 ‘연뮤덕’들이 자발적으로 지키는 공연장 예의인데, 이것이 지나치다는 조롱의 의미로 ‘시체관극’이란 말이 붙여졌다.
공연을 위해 지불하는 비용은 평균 10만원 내외. 대형 뮤지컬들의 경우는 15만 원을 넘는 경우도 허다하다. 몸을 조금 움직이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서비스(문화)를 제공하는 이들이 받는 금액치곤 비싸지 않은가. 비싼 가격과 상대적으로 엄격한 관람 문화는 연극, 뮤지컬을 마니아층의 전유물로 만들어간다는 비판도 많다. 공연장 에티켓이 지금과 사뭇 달랐던 시절을 살아온 부모님을 모시고 공연장에 가는 게 무섭다는 의견은 SNS 공간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몇 달 전 친구와 함께 뮤지컬 ‘물랑루즈’를 보러 갔다. ‘물랑루즈’는 프랑스의 댄스 공연장 물랑루즈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물랑루즈는 치맛자락을 잡고 다리를 쭉쭉 들어 올리는 격렬한 ‘프렌치 캉캉’으로 유명한 곳. 뮤지컬 ‘물랑루즈’는 실제 물랑루즈의 이런 과감하고 화려한 분위기를 반영해 본격적인 공연 시작 전 화려하게 치장한 배우들이 나와 관객들 앞에서 농염한 춤을 보여준다.
바로 그 때였다. 뒷자리에 앉은 여성이 친구의 등을 두드리며 “안 보여요”라고 말한 건. 그날이 그 친구의 첫 뮤지컬 관람이었던 터라 시작 전부터 “엄청 정숙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걱정을 했던 상황. 앉아만 있었는데도 안 보인다며 컴플레인을 하는 뒷자리 관객 탓에 “그렇게 유난스럽진 않다”며 친구를 안심 시켜줬던 것이 머쓱하게 됐다. 수술까지 받을 정도로 허리가 좋지 않은 친구는 앉은 키와 머리가 큰 죄로 러닝타임 내내 엉덩이를 의자 끝에 붙여 반쯤 누운 자세로 공연을 관람해야 했다. 그걸 보며 괜히 친구를 뮤지컬 보자고 끌고 왔나 싶은 죄책감이 들어 공연에 잘 집중하지 못 했다.
뮤지컬의 본고장 미국의 브로드웨이, 영국의 웨스트엔드와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브로드웨이 극장에 가서 놀랐던 건 개안 수준으로 시야각이 좋았던 공연장. 앉은 키가 작은 탓에 어떤 장르, 어떤 작품을 보든 늘 시야 일부를 포기해야 했는데, 브로드웨이 극장은 그런 게 없었다. 앉자마자 공연장 곳곳이 뻥 뚫려 보였다. 앞에 덩치가 큰 백인 남성 관객이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관람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시차에 적응을 못한 탓에 공연 중간 두어 번 까무룩 잠이 들어 고개가 앞으로 고꾸라지기도 했는데 아무도 컴플레인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 눈이 마주친 한 관객은 그렇게 시끄러운 와중에 잠이 든 게 신기했는지 재밌는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주인공이 나올 때는 환호 소리가 들렸고, 머리 위로 인형들이 지나다닐 때는 아이들의 탄성이 들렸다. 그조차 공연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졌고, 즐거웠다.
웨스트엔드도 마찬가지다. 맥주 등 주류와 음식물을 공연장 입장 전 바에서 판매한다. 인터미션 때는 직원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와 판매하기도 한다. 이런 자유로운 공연 환경은 오페라, 클래식 등의 공연에서 배척 받았던 하층민과 여성을 껴안았던 뮤지컬의 태생을 떠올리게 한다. 본래 뮤지컬은 ‘시체관극’이라는 조롱이 어울리지 않는, 자유롭고 문 턱 낮은 예술이었다.
이런 관용이 국내 공연계에 이식되지 못 한 건 역시 환경적인 요인이 크다. 많은 ‘연뮤덕’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의자 한 열이 붙어 있어 누군가 움직일 때마다 그 열에 앉은 모든 이들이 움직임을 느껴야 하는 소극장의 불편한 의자, 한 번 착석하고 나면 화장실 등에 가기 위한 이동이 어려운 좁은 좌석 간격, 그럼에도 나날이 치솟기만 하는 티켓 가격 등 현재 국내의 많은 공연장들은 관람객들을 위한 최소한의 편의도 제대로 보장하지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연극의 경우 등받이가 없는 벤치형 좌석을 설치, 늦게 들어온 관객들은 앉을 자리를 찾지 못 하고 빈공간에 엉덩이를 비벼 넣어야 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중예술의 미덕은 대중과 함께한다는 데 있다. 어떤 예술이든 세상에 내놓은 뒤에는 대중의 것이다. 대중이 그것을 관람하는 것까지가 대중예술의 완성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세상에 어떤 서비스도 재화도 20만 원에 육박하는 금액을 받으며 관객에게 최대한 미동 없이, 조용한 속삭임도 없이, 정숙하며 엄숙하게 있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공연을 보며 타인에게 최대한 피해가 없도록 하는 것은 관객의 당연한 매너겠지만, 쾌적한 공연 환경을 관객의 배려와 매너에만 의존하는 공연계의 태도는 분명히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래서야 대학로는 100년이 지나도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가 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