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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일반

온라인으로 말 그림 감상하세요

한국마사회 말박물관이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로 박물관 휴관이 장기화해 2021년 특별전 ‘옛 그림 속 말이 전하는 말(소장 회화전)’을 비대면 온라인 방식으로 개최한다. 개관 이후 동시에 공개되지 않았던 말박물관 소장 말그림 20점을 모두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박물관 관계자는 20일 “전통 회화에서 즐겨 다뤄온 소재인 말 도상의 다양한 상징과 의미를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 23일부터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에 따라 장기간 휴관해온 말박물관은 대중들이 온라인을 통해 전시를 감상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왔다. 2020년 10월에는 1차로 학예사와 진행자가 함께 상설전 유물을 하나씩 돌아보는 영상을 한국마사회 대표 유튜브 채널인 마사회TV에서 공개했다. 이어 12월에는 한국경마사 소개 동영상을 같은 채널에 선보였다. 이번 특별전은 평면인 회화 작품의 특성을 고려해 VR 대신 동영상으로 작품 세부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공재 윤두서와 그의 아들 윤덕희 부자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기마인물도' 2점을 비롯해 현재 심사정의 '유마도', 안중식의 '유하신마도', 지운영의 '준마도', 강필주의 '백락상마도' 등 수준 높은 솜씨의 회화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전시 작품 중에는 '격구도' '호렵도' '삼국지연의도'도 포함돼 있다. 가장 주목을 끄는 작품은 학산 윤재홍의 찬이 더해진 심사정의 '유마도'다. 고삐를 끌어당기는 인물과 버둥거리며 순응하지 않는 말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는 미국 메트로폴리탄뮤지엄에 소장된 한간의 '조야백' 같이 구중궁궐의 얽매인 속세보다 자유로워 지고자 하는 화가의 기세를 느낄 수 있다. 이들 마도는 예부터 말이 영웅·신하·인재 등을 상징한 까닭에 문인화가와 직업화가 모두 즐겨 선택했던 화제다. 특히 '기마인물도'는 실제로 관직에서 멀어진 남인집안이지만 그림 속에 관복을 입은 인물이 등청하거나 부임하러 가는 모습을 담아 출세·입신양명 등의 유교적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 나귀를 타고 가는 인물을 그린 작가 미상의 '탐매도'는 느리지만, 천천히 매화를 감상하며 은일(세상을 피해 숨어 삶)을 추구하는 도교적 사상을 담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다양한 말 그림과 그림에 담긴 숨은 뜻을 쉽게 풀이한 이번 온라인 전시는 모두 4편으로 나뉘어 마사회TV에서 오는 21일부터 순차적으로 선보인다. 영상 공개에 맞춰 감상평 댓글을 남긴 100명에게 추첨으로 스타벅스 커피 쿠폰을 주는 이벤트도 오는 6월 4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참여 방법은 마사회TV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고 전시 감상평 댓글을 남긴 후 인증하면 된다. 김두용 기자 kim.duyong@joongang.co.kr 2021.05.21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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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어디] 예술이 꽃 피는 남도의 끝 ‘해남’

1년 내내 날씨와 꽃 피는 장소에 따라 눈에 담을 거리들이 진득하게 이어지는 전라남도 해남이다. 옛부터 사계절 내내 보고 그림에 담아낼 것들이 넘쳐나는지, 해남은 남도 수묵의 고장으로 자리잡았다. 이를 알리고자 해남군은 행촌문화재단과 ‘예술과 함께 떠나는 남도수묵기행’을 기획, 계절에 따라 다른 해남을 맛볼 수 있는 색다른 ‘아트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투어에 따라 사찰에서는 주지 스님과 차를 우려내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수묵화가의 지도 아래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소음이 일절 없는 산 속의 암자에서 판소리 공연도 즐길 수도 있다. 지난 8일 다녀온 해남 예술의 성지는 ‘녹우당’에서 예술을 배우고, ‘대흥사’에서 수묵을 그리고, ‘일지암’에서 차 한 모금을 머금는 코스였다. 녹우당에서 공재의 ‘자화상’ 만나다 녹우당은 해남윤씨 고택의 당호이자, 600년 이상 이어온 대표적인 종가의 이름이기도 하다. 현재 녹우당 하면 고택과 박물관 일대를 말하기도 하지만, 본래 고택 사랑채의 이름이었다. 녹우당은 말 그대로 ‘녹색 비’라는 뜻인데, 고택 뒤편의 비자림에서 이는 바람소리가 빗소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비자숲은 뒷산의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해남윤씨 입향조의 유훈에 따라 500년 전부터 후손들이 가꾼 숲이란다. 녹우당은 보존이 잘 된 조선시대 건축 유산이기도 하다. 한때 아흔 아홉칸에 달하는 저택이었던 녹우당의 건축형태는 시대에 따라 중건하거나 보수해 현재 55칸 정도만 남아있다. 현재 녹우당의 주 건물로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헛간 그리고 안사당, 어초은사당, 고산사당 어초은 추원당이 남아 있다. 이 일대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성인 남자가 두 팔을 벌려 끌어안아도 채 손이 맞닿지 않을 정도의 몸통을 자랑하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보이는데, 수령만 500년이다. 이 은행나무는 입향조 윤효정이 아들 윤구의 진사시 합격을 기념해 심은 것이다. 이 나무를 왼편으로 끼고 길을 오르다 보면 왼편에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이 보이는데, 해남윤씨 후손이 이 터를 지키고 있는 곳이라 자유롭게 방문하기는 어려운 듯 했다. 이날은 양해를 구하고 녹우당이라는 글씨가 적힌 낡은 현판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세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윤효정은 해남의 대부호 해남정씨 정귀영의 사위가 되면서부터 이 곳에 터를 잡았다. 이후 해남정씨의 소유였던 엄청난 땅을 상속받고 강진 덕정동에서 해남 백련동으로 터전을 옮긴 것이라고 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남녀차별 없이 균분상속하는 것이 관습인 터라 처가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윤효정 이래 6대가 내리 문과에 합격해 호남의 대표적인 명문가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윤효정의 4세손, 공재 윤두서는 이 집안이 배출한 인물 중의 인물이다.공재는 조선 후기 회화의 개척자이자 조선 유일의 자화상 화가로 불리고 있다. 그의 대표 작품 역시 당시의 거울을 닦으며 확인해 자신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 ‘자화상’이다. 국보 240호인 ‘자화상’은 녹우당 일대에 위치한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 공재가 40대 후반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한 올 한 올 수염을 그려낸 섬세한 붓놀림이 금방이라도 입김에 흩날릴 것 같고, 사진을 찍은 것만 같은 꾹 다문 입과 깊게 패인 팔자주름 등 세밀한 묘사는 반백살(50세) 선비의 카리스마까지 느껴진다. 자화상을 두고 전시관 해설사는 “프랑스에 ‘모나리자’가 있다면, 한국에는 공재 선생의 ‘자화상’이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불교 간직한 전통문화예술의 보고, ‘대흥사’ 로마의 성바오로성당이 395년에, 성 베드로성당이 440년경에 각각 세워졌고, 해남 두륜산 아래 대흥사는 426년에 창건돼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1600년 동안이나 불교를 통해 가르침을 받고 위로를 받는 ‘산중절집’으로서의 역할을 해오고 있는 곳이다. 본래 두륜산을 ‘대둔산’이라고 부르기도 해서 사찰명도 대둔사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서산대사가 “만년을 허물어지지 않을 곳”이라며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전하게 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대흥사는 이후 사세가 계속 확장된 것은 물론 당대의 고승들을 배출한 명찰이 됐다. ‘남도수묵기행’에서는 역사 깊은 대흥사와 그 뒤를 든든히 지키는 두륜산을 바라보며 수묵체험을 할 수도 있다. 이날 수묵화가의 지도 아래 대흥사 대웅보전을 바라보며 그리는 서툰 그림 실력으로 부채에 그림을 그려 가져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더불어 대흥사에서는 템플스테이도 가능하다고 했다. 대흥사가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이 곳의 템플스테이는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에게까지 인기가 부쩍 높아졌다. 또 우리나라 다도문화를 중흥시킨 초의선사가 머물렀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대흥사에는 ‘한국의 다성’ 초의선사가 머물렀던 일지암이 있다. 두륜산 깊숙한 암자에서 초의선사는 차 이론서인 ‘동다송’을 집필하는 등 조선 후기 차 문화를 이끌었다. 동다송은 차의 효능과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책이다. 다시 말해 일지암은 오늘날 우리 차 문화의 발원지라고도 할 수 있다. 차는 삼국시대 불교문화와 함께 전래됐으나, 조선 유교문화에 밀려 겨우 명맥만 남아있던 것을 초의선사가 일지암에 차 나무를 심어 복원했단다. 굽이굽이 두륜산을 올라야 닿는 일지암은 깊고 고요하다. 한여름의 푸른 하늘과 산의 푸름이 눈 앞에 펼쳐지는 전부다. 이 풍광을 문의 네모난 틀을 통해 보는 광경이 작품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일지암 법인스님의 이야기와 함께 마시는 차 한 잔의 시간이 수묵여행의 피날레를 장식하니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기행이다. 해남(전남)=글·사진 권지예 기자 kwon.jiye@joongang.co.kr 2019.08.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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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문화와 말산업을 빛낸 인물 10명 뽑아보니

일간스포츠가 청마의 해를 맞이해 말산업 관계자 50명으로 부터 설문을 받아 한민족의 마문화와 말산업을 빛낸 인물 10명을 선정했다.이번 설문 참여한 사람은 국내 승마인·문화계·학계·말산업 실무자가 포함됐다. 설문 방법은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국내 말산업과 마문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을 한사람 당 세 명씩 추천을 받았다.말산업 관계자들로 부터 가장 크게 인정을 받은 인물은 고구려의 광개토태왕과 이건희 삼성회장이었다. 광개토태왕과 이건희 회장은 각각 25명으로 부터 공로를 인정받았다.광개토태왕은 한민족 역사상 유일한 정복군주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광개토태왕은 당시 앞선 기술로 무장한 개마대(철갑 무장을 한 기마대)를 앞세워 동아시아를 정벌하고 멀리 외몽고까지 세력을 넓혔다. 이건희 회장은 마문화의 가치를 인식하고 삼성이라는 브랜드에 승마의 가치를 접목해 유럽 시장을 석권한 것을 높이 평가받았다. 특히 이 회장은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때는 장애물에 삼성승마단을 출전시켜 단체저 8위에 오르며 기마민족인 한민족의 우수성을 알렸고 재활승마도 국내에 도입했다.이번에 선정된 마문화를 빛낸 인물들은 말과의 다양한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 고구려를 일으킨 동명성왕 주몽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말 관리사 출신 왕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군주로 평가받고 있는 세종대왕은 조선시대 말산업 최고경영자로 사복시에 말 품종 계량을 지시했을 정도로 마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단체로는 유일하게 KRA한국마사회가 이름을 올렸고 8준마로 유명한 태조 이성계도 한자리를 차지했다.또 마상무예 집대성을 지시한 정조대왕도 마문화를 빛낸 10인에 들어갔다. 군주와 장수 뿐 아니라 다양한 직군의 민초들도 이름을 올렸다. 조선시대 최고의 말장사인 김만일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제주도에서 1만여 마리의 말(당시 제주도 말의 50%)을 사육한 김만일은 임진왜란을 전후로 1300마리의 군마를 조정에 헌상했다. 화가 중에는 격구도로 유명한 이여성이 이름을 올렸다. 이여성은 격구도를 통해 한민족의 마문화중 하나인 격구를 생동감 있고 현실적으로 표현해 당시 문화를 기록했다. 드라마를 통해 이름을 알린 백광현도 있다. 조선시대 어의 백광현은 말 침을 기본으로 신의 경지에 오른 침술의 대가였다. 10위권 밖에는 화가 윤두서·독립운동가 이범석 장군·김유신·고선지·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자 등도 이름을 올렸다. 채준 기자 doorian@joongang.co.kr한민족 마문화·말산업에 기여한 인물 톱10------------------------순위 이름 득표------------------------ 1광개토대왕 251이건희 253주몽 144세종 105KRA한국마사회 96정조 87태조 78백광현 59이여성 49김만일 4------------------------------- 2014.02.0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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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마] 그림 속 말 이야기 27. 주례병거지도

▲오현미(40)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공재 윤두서는 말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했다. 물론 인물화나 다른 장르에서도 신묘함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지만 분야의 일등을 꼽으라면 단연코 말 그림일 것이다. 공재 스스로도 일찍부터 말을 좋아해 여러 준마들을 사육했고 아꼈다고 한다. 허나 조금 이상한 점은 정작 자신이 기르는 말을 타는 일은 드물었다는 점이다. 먼 길을 떠나는 자식들에게도 가문소유의 말을 타지 못하게 했고, 스스로도 여행길에서 빌린 말이 역마인 것을 안 순간 걸어서 다녔다는 일화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다. '주례병거지도'는 윤두서가 그린 그림으로 사실 감상용 그림은 아니다. 주나라 시대의 관제를 적은 책인 '주례'에 나오는 병거를 스스로 연구한 후 그 결과를 눈에 보이도록 그린 그림으로 일종의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볼 수 있다. 당쟁이 격하던 시대 권력 장악에 실패한 북인계 남인으로서 세상에 출사표조차 던지지 못했던 윤두서가 병법을 연구하고 국가체제를 연구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일이었을까? 이것은 출세 이전에 선비로서의 본분을 자각한 태도였을 것이다. 오히려 학문과 사상, 예술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자세를 지녔던 까닭일 것이다. 병거와 병거를 탄 병사, 병거를 끄는 네 마리 말과 갑옷에 대한 치밀한 묘사와 사실적 재현은 공재가 추구했던 실사구시적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그는 무엇이든 현실에서 관찰한 것을 토대로 삼고자 노력했다. 그가 두 전란을 겪은 조선을 통해 실패의 원인을 고민하고 그 해결책으로 접근한 부국강병책의 모델은 바로'주례'였고, 그가 고전 중의 고전인'주례'에서 배우고자 했던 것은 국가사회공동체였다. 공재에게 말은 함부로 타고 다닐 수 있는 호사스러운 취미의 대상이기보다 부국강병의 바탕이 되는 전투력 증강의 주요 자원이었던 것이다. 즉 말은 국가의 공공재로서 나라를 강하게 만들 근간으로서, 또한 그러한 근간이 되기에 우국충정의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던 동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공재가 말을 사랑했던 마음의 바탕은 조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양희원(34) KRA한국마사회 교관 그림은 4마리가 끄는 마차로 당대에는 현대의 탱크와 버금가는 위력을 가진 병기였다. 주나라 혹은 진나라 시대의 전차로 보이는데 이 말들은 4마리가 일체화 돼 있어 마차를 끌 수 있도록 고안돼 있다. 당시에는 사람이 말을 타는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기에 전차를 이용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이후에는 전차가 사라졌다. 전차에 비해 한사람이 한 마리의 말을 타고 전투에 나서는 기마대가 전술적으로 더욱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또 등자 등 마구의 발달이 전차의 도태를 가속화 시켰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그림처럼 4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는 없다. 과거 고려 조선시대에도 우리나라 여건상 4마리가 끄는 마차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말 한 마리에 짐을 지우는 형식으로 말이 활용됐다. 또 대량의 화물은 대부분 배로 운송했다. 도로상태가 좋았더라도 그림 같이 4마리가 끄는 마차가 활용됐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 그림처럼 네 마리의 말이 횡으로 연결된 마차를 운영할 경우 말들의 훈련 상태가 뛰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림처럼 4마리가 횡으로 위치한 마차는 각 말마다의 정해진 위치가 있어야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말의 습성 상 다른 말이 바싹 옆에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중간에 낀 두 마리 말들은 스트레스에 강해야 한다. 맨 위쪽의 말은 왼쪽에 다른 말이 오는 것을 허용해야 하고 아래쪽 말은 오른쪽에 다른 말이 접근하는 것에 불만이 없어야 한다. 그림 속 장군의 고삐는 찰턴 헤스톤이 주연한 영화 '벤허'에 나오는 벤허가 고삐를 잡는 방법(고삐를 펼쳐 양손으로 잡는 법)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러나 그림에서처럼 고삐를 잡아도 충분히 마차를 움직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말을 조정하는 것은 재갈을 자극하는 방법 말고도 다양한 수단이 있다. 말의 꼬리를 묶은 것은 기능성이다. 말 꼬리가 자연 상태로 있을 경우 마차의 진행을 방해할 수 있고 또 다른 말과의 접촉이 발생할 수 있다. 말의 품종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었던 몽고말 계열이다. 말들은 4마리 모두 속보 하고 있다. 비율상 말에 비해 사람이 커 보이는데 당시 사람과 말의 비율을 반영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상상도이기 때문이다. 2012.07.1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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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마] 그림 속 말 이야기 26. 소년행시의도

▲오현미(40)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遺却珊瑚鞭(유각산호편-산호채찍을 버리니)白馬驕不行(백마교불행-백마가 교만스럽게도 가지를 않는구나)章臺折楊柳(장대절양류-장대에서 버들가지를 꺾으니)春日路傍情(춘일로방정-봄날 길가의 정취로다) 위 시는 당나라 시인 최국보의 ‘소년행’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우리가 보는 겸재 정선의 '소년행시의도'에 적혀있는 화제의 본 출처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시서화 일체사상이 유행했다. 이는 시와 글씨와 그림을 하나로 보고 이들이 어우러지는 것을 최고로 치는 미학이 유행했다는 의미다. 이는 또한 선비들이 서로 모여 시짓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 쓰는 것이 놀이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도 하다. 이 그림 또한 소년행이라는 시의 의미를 담고 있는 그림이라하여 소년행시의도라 불린다. 본래 소년행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은 봄날의 유흥을 위해 말을 타고 술집을 향해 달리는 소년의 마음과 그 마음을 은유하고 있는 봄풍경이다. 시에 나오는 버들가지는 술집에서 손님을 끌기 위해 심어 놓는 나무이며 장대는 한나라 때 술집이 많은 동네로 유명한 곳이었다. 겸재의 소년행시의도에서는 의복을 갖춰 입은 소년이 화려한 색의 안장을 얹은 백마를 타고 장대가를 향해 가는 와중에 버드나무를 보는 장면으로 소년행을 그리고 있다. 산호채찍을 들 정도로 부유한 집 젊은이가 호기로 채찍을 버리자 말이 잘 가려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만을 보고는 이 젊은이가 과연 장대가를 향해 가는 것인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봄날을 노래하는 시를 바탕에 깔고도 버들가지에 푸른색을 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림을 오래 보고 있노라면 겸재가 어디에다 춘정을 그렸는지 서서히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버들가지를 보는 소년의 눈빛이다. 버드나무를 보고 있는 앳되고 젊은 소년의 눈에는 풍류와 유흥이 가득한 술집을 상상하는 즐거움으로 차 있다. 사대부이자 성리학자이기도 한 정선의 그림에서 춘정은 신윤복처럼 도발적이고 유혹하는 듯한 야릇함으로 표현되는 대신 의관을 단정히 하고 서책에 파묻혀있어도 어쩌지 못해 새어나오는 삿된(보기에 하는 짓이 떳떳하지 못하고 나쁜) 욕망 같은 것으로 표현되었다. 비록 말에 대한 표현에서 공재 윤두서의 철저한 관찰과 사생에서 오는 정확함은 결여돼 있지만 그림 자체를 두고 말하자면 뜻을 전달하고 표현하는 것에는 뒤지지 않는다. 겸재는 인왕산과 금강산과 같은 명산과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즐겨 그릴 때에도 실제 풍경을 보고 사생했지만 자신의 개성과 뜻을 한껏 담아 재구성해 그렸다. 그를 진경산수화의 창시자이자 완성자로 부르지만 겸재는 보이는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을 사실이라고 여기기보다 뜻을 전하는 것을 더 사실이라 여긴 사대부다. 그래서 겸재는 시의 어구에 상응하는 실제 봄풍경을 그리지 않고 소년의 눈빛을 통해 춘경을 표현한 것이다. ▲양희원(34) KRA한국마사회 교관 그림속 주인공은 백마를 탔는데 부자이거나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마는 희귀 했고 모색이 아름다워 권위와 부의 상징이었다. 일반적으로 백마의 경우 갈기나 꼬리가 흰색인 경우가 많은데 한국화에서는 갈기와 꼬리를 검은색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다.그림 같은 말이 현실에도 있을 수 있지만 확률은 극히 작다. 그림속 말은 측대보를 하고 있다. 측대보란 오른쪽 앞발과 오른쪽 뒷발이 함께 앞쪽으로 나가는 것을 말한다. 현재는 대부분의 말에 측대보를 가르치지 않고 마차를 끄는 말만 측대보 훈련이 진행된다. 하지만 과거 몽고병사들은 측대보를 훈련시켰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림에 나와있는 말의 측대보는 실수로 보인다. 작가가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이 아니라 상상으로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작가가 말의 걸음을 혼동해 실수했을 가능성이 높다. 말의 품종은 과거 조선·고려시대에 많이 볼 수 있었던 조랑말 계통인 것으로 보인다. 말은 사람과 다른 사물에 비해서도 작다. 그러나 비교적 얼굴이 길고 체형이 날렵한 것으로 보면 조랑말이 아닌 북방계통의 말일 가능성도 있다.정리=채준 기자 doorian@joongang.co.kr 2012.07.06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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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마] 그림 속 말 이야기 25. 류계세마도

◇오현미(40)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류계세마도'는 작자를 알 수 없는 그림이다. 몇 년 전 한 컬렉터가 일본으로 흘러 들어간 조선시대 유물과 그림들을 다량 수집해 다시 되찾아 온 적이 있었다. '류계세마도'는 그 당시 함께 한국으로 귀향한 그림으로 화풍과 기법으로 보아 윤두서의 실경 배경의 말그림 이전의 조선 중기 회화로 추정된다고 한다. 버드나무 가지가 드리워진 냇가에서 말을 씻기는 그림이라 하여 제목이 '류계세마도'이다. 버드나무 가지는 아직 풍성히 자라나지 않았고 다른 나무의 잎들도 무성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어느 봄날의 풍경일 것이다. 그림의 오른쪽에 배치된 바위와 구름 너머로 대갓집 지붕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집 소유의 준마들을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체구가 큰 준마 9마리를 목동 8명이 붙어 씻기고 있는 장면으로 목동들은 모두 바지를 벗고 말과 함께 물에 들어가 열심히 말들을 씻기고 있다. 중앙부에 위치한 흰 바탕에 얼룩무늬가 있는 말은 물에 들어가 씻는 것이 싫은지 두 귀를 뒤로 넘겨 고개를 쳐들고 저항하려 하고 있고 이를 한 목동이 제지하고 다른 목동은 그 틈에 등을 밀어주고 있다. 앞쪽 검은 말은 다 씻었는지 목동의 손에 이끌려 물 밖으로 나오고 있다. 물을 좋아하는 말들은 한 목동이 두 마리를 동시에 이끌고 있기도 하다. 왼쪽편이 목장인지 나머지 말 한 마리가 목동의 손에 이끌려 나무다리를 건너려 하고 있다. 말들이 하고 있는 다양한 자세며 동세에 대한 묘사가 아주 자연스럽고 훌륭하며 풍경에 대한 묘사 또한 중국에서 들여온 화본을 제대로 익힌 화풍을 구사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화원 소속의 프로 화가의 솜씨로 보인다. 회화에서 말은 주로 문인 사대부나 지배계층이 자신의 처지나 치세를 상징하는 소재로 많이 쓰인다. 특히 준마를 알아보는 백락이 있어 천리마가 존재한다는 백락의 천리마 고사처럼 말이 목동과 함께 나오는 그림은 인재를 알아보고 잘 등용하는 왕의 능력과 연관되기도 한다. 만약 이 그림의 주인이 왕이었다면, 그는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시대를 태평성대로 보지 않았을까 한다. 평탄한 시대의 말들은 군장을 하거나 전력질주하기 보다는 쉬고 있거나 씻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왕은 이 그림을 보면서 스스로를 태평성대 동안 신하들을 키우고 보살피는 덕이 많은 군주라고 여기며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즐기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양희원(34) KRA한국마사회 교관 한국화 말 그림 중에서 현실적인 그림이다. 과거에는 물을 퍼 올릴 수 있는 장치가 많지 않아서 직접 말을 끌고 냇가에 가서 말을 씻길 수밖에 없었다. 또 말 9마리에 사람이 8명이다. 그림에서 한사람이 두 마리 말을 잡아주면서 말을 관리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인데 말 두 마리를 한 사람이 동시에 씻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겁이 많은 말은 사람이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작은 소리에도 달아날 수 있다. 말이 만약 놀라서 달아난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장에서도 굴레가 풀린 말에 다시 굴레를 채우려면 전문가라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비된다. 말이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말 닦는 시간과 장소가 약속돼 있어서 마부들이 서로 협력해서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풍경은 말의 소유주가 한 명이거나 또는 군대·말을 사용하는 기관에 속한 말일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이 옷을 벗고 있는 것도 조선시대 혹은 그 이전의 말을 닦는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을 끌고 다리를 건너는 사람은 복장을 갖추었으나 정작 냇가에 있는 사람들은 전체 또는 하의를 벗었다. 말을 씻기기 위해서는 물에 들어가려면 어쩔 수 없이 옷을 벗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림 속의 장소는 한국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강하다. 점박이 말들은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는 있으나 비율이 9마리 중에 3마리나 될 정도로 흔하지는 않다. 또 말은 이전까지 보았던 조선시대 말보다는 확실히 크고 풍만한 느낌이다. 사람과의 비례로 봐도 이 말은 우리나라의 조랑말로 볼 수 없다. 최소한 경주마로 활용되고 있는 서러브렛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 정리=채준 기자 doorian@joongang 2012.06.29 17:35
생활/문화

[승마] 조선시대 그림 속 말은 입신양명할 인재 의미

한민족의 마문화 ①특급 익스프레스 기발 ②무력의 상징 기마대 ③귀족들의 놀이 격구 ④성공의 상징 말 그림 ⑤우리식의 말타기 말의 힘과 스피드·우람한 근육·충성심을 사랑하는 한민족은 말과 함께 융성했고 말은 행운과 성공의 상징이 됐다.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벽화·신라시대 부장품인 천마도· 고관대작의 무덤을 지키는 석마·기마인물형 토기 등 최고 권력자인 왕부터 민초에 이르기까지 말은 한민족의 생활에 녹아들었다. 한민족과 말 사랑은 오늘날까지 이어졌고 말은 여전히 행운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말은 행운과 성공의 상징 충·효·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조선시대에도 말은 행운·성공·고귀한 신분을 상징했다. 조선시대 말이 최고의 상징이 된 것은 성공한 영웅들에게는 충과 의를 상징하는 말 관련 고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 통일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의 백마·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팔준마', 중국 역사에서는 3황5제 중 하나인 복희씨가 나라를 세우는 데 공헌한 '용마' 한나라의 무제가 얻었다는 '천마'등의 고사가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말 관련 그림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을 붙였다. 말 한마리가 있는 그림은 장차 입신양명할 인재로, 사람이 관복을 입고 말을 타고 있는 경우 관직에 출사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또 묶여 있는 말의 경우에는 말은 충신을 고삐는 제왕과의 끈끈한 결속으로 해석했다. 덕분에 당시 지배층의 말 그림을 가치 있는 선물로 인식했다. 실제로 말그림은 소위 잘팔리는 그림이 돼 선물로 주고받는 판매용으로도 제작됐다. 국내에 전해지는 말 그림 중 천재화가 장승업의 '쌍마인물도' 윤두서의 '군마도' 이면구의 '유마도' 강필주의 '백락상마도' 등이 유명하다. ▲서민에 뿌리내린 말 그림 말은 서민들의 삶속에도 녹아들어 있다. 서민들을 삶을 그린 거장 김홍도와 신육복의 그림에도 말이 소재로 사용됐다. 김홍도의 '기마응렵도'·'노상과안'이 있고 신육복의 '해원전신첩'에는 봄놀이 가는 그림, 산사에 가는 그림에 말과 여인이 등장한다. 서민에 가장 접근한 말 그림은 무속도다. 대관령 성황당의 성황신도에는 말에 오른 산신이 등장한다. 외옹치 서낭당의 수부도에는 날개 달린 백마가 그려져 있다. 경북 봉화 쑥당마을에는 성황당에는 백마에 오른 장군 그림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말은 신성한 존재 또는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의 조력자로 인정받았다. 이밖에도 관우와 적토마가 등장하는 무속도도 널리 퍼져있다. ▲가장 오래된 말 그림은 5~6c 한민족의 말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5~6c기 무덤에서 출토된 벽화와 부장품이다. 1973년 경주 황남동고분 155호분(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는 말의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장니에 그려진 말 그림으로 가로 75㎝, 세로 53㎝로 자작나무껍질을 여러 겹 겹치고 맨 위에 고운 껍질로 누빈 후, 가장자리에 가죽을 대어 만든 것이다. 신라회화로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작품. 1935년 발굴된 고구려의 무용총은 중국 지린성 통구의 집안에 위치한 벽화고분으로 광개토왕릉비의 북서쪽 약 1km 지점에 있으며 각저총과 나란히 있다. 무용총의 널방 서쪽에 그려진 수렵도는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쓴 다섯 명의 말 탄 인물이 활시위를 힘껏 당기며 사슴과 호랑이를 쫓고 있는 모습이다. 채준 기자 [doorian@joongang.co.kr] 2011.01.28 16:09
스포츠일반

조선시대 미취업자들의 선호선물 말 그림

'은혜를 갚기 위해 김대감을 찾아오다'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도화서 화원 이명욱은 한 달가량 매달려 오던 그림 하나를 마무리해 배접한 뒤 비단에 곱게 싸서 집을 나섰다. 말복 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이명욱은 10리나 떨어진 한성부 판윤 집까지 한달음에 왔다. 한성부 판윤 김대감은 얼마 전 억울하게 송사에 휘말렸던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준 은인이었다.●말 그림 선물김대감은 이명욱을 반갑게 맞았다."어서 오게나. 부친은 건강하신가. 지난 송사 때문에 찾아온 모양이네만, 응당 할 일을 한 것뿐인데, 더운 날 어찌 이리 먼 걸음을 하였나? "야윈 얼굴의 이명욱은 김대감에게 들고 온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내밀며 말했다."아닙니다. 대감 덕분에 소인의 집안이 큰 화를 면했습니다. 제 부친의 억울함을 풀어주셨으니 그 은혜를 어찌 평생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감사를 표하고 싶었으나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고심하다가 대감의 막내 자제분께서 올해 대과에 응시하신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솜씨이지만 예부터 전시급제의 기원이 담겨 있다는 준마도 한 폭을 이렇게 준비해 왔습니다. 조선에서 말 그림으로 가장 유명하다는 공재 윤두서의 준마도를 보고 참작했으나 기량이 많이 부족해 올리기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김대감이 두루마리를 펼치니 과연 푸르게 흐드러진 버드나무 아래 8척의 백마 한 필이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준마는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해 그 오묘한 솜씨에 넋을 잃고 바라보던 대감은 몹시 흐뭇해 했다.●말의 상징적 의미는 고귀한 신분앞의 내용은 우리 조상들이 말 그림이나 말 문양에 어떤 뜻을 담아 사용하고 주고 받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 낸 가상의 이야기다. 그러나 예부터 출세·인재·장수·부귀 등의 의미를 가진 말 그림이 그려졌다는 것과 말 그림을 선물용·판매용으로 제작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재미있는 점은 몇 세기가 지나 일상생활에서 말을 찾아보기 힘든 오늘날에도 이러한 말의 상징적 이미지들은 우리 주위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런 이미지 대부분이 유럽이나 북미에서 만들어진 상품의 마크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전통적 말 문양과는 상징의 연원을 달리한다. 그러나 고대 동양에서 말의 소유가 지배계층의 특권이었듯이 서양에서의 기마문화도 기사나 귀족 등 상류계층이 향유한 문화였다는 점에서 높은 신분이나 지위를 드러내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상류계층을 지향하는 말 문양승마·기사(Knight)·폴로(Polo), 말이 도안된 가문의 문장이나 편자 등의 이미지를 마크로 하는 브랜드들이 오랜 시간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사람들이 이러한 디자인을 마크로 사용하는 브랜드의 상품을 착용하거나 사용함으로써 상류계층에 편입된 듯한 느낌을 받고, 그런 이미지를 타인에게 심어 주려고 하는 까닭이다.결국 기마문화의 아이콘들은‘상류사회’에 대한 동경과 지향을 대변하는 셈이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이탈리아산 자동차 페라리는‘Ferrari’라는 글자 로고보다 마치 중세 유럽 귀족가문의 문장을 연상시키는, 앞발을 든 말 문양 마크로 더 유명하다. 특히 전 세계 남성 운전자들의 로망이 된 이 마크는 페라리를 소유하고 싶은, 또는 그 파워와 스피드를 갈망하는 남성들을 겨냥해 남성용 화장품.의류.액세서리 등 다양한 장르의 상품으로 파생돼 부가적 이익을 남기고 있다.글=김정희 KRA한국마사회 홍보실 학예사사진=KRA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2010.03.19 11:42
생활/문화

소치 탄생 200주년 기념 특별전

밤송이 한가운데 자리 잡은 듯한 세 칸 초옥의 소탈함이 정겹다. 남종 문인화의 거장으로 유명한 소치 허련(1808~1893)의 ‘일속산방도’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문인화가 아니라 실경 산수화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 강진군 천개산 백적동을 실사했다. 소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소치 이백년, 운림 이만리’가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02-580-1284)에서 내달 1일까지 열린다. 말 그대로 ‘문자향 서권기’를 흠뻑 맛 볼 수 있다. 소치는 윤선도 고택인 해남 녹우당에서 윤두서의 화풍을 익힌 후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서화수업을 받았다. 산수는 물론 사군자·화훼·괴석·노송 등 모든 화목에 능통했고 이하응·민영익 등 당대 최고의 문인 예인들과 교유하며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특히 ‘허모란’이라 불릴 만큼 다수의 묵모란 작품을 남겼다. 스승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1856년에 낙향한 소치는 전남 진도 운림산방에 정착한다. 미산 허형, 의재 허백련, 남농 허건, 임인 허림, 허진 (5대주인)등으로 이어지는 운림산방의 화맥은 호남은 물론 한국 문인화의 산실로 우뚝 서있다. 이번 특별전에는 소치는 물론 운림산방 역대 주인들의 최고 걸작들이 모두 전시된다. 김형빈 기자 2009.01.07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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