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도화서 화원 이명욱은 한 달가량 매달려 오던 그림 하나를 마무리해 배접한 뒤 비단에 곱게 싸서 집을 나섰다. 말복 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이명욱은 10리나 떨어진 한성부 판윤 집까지 한달음에 왔다. 한성부 판윤 김대감은 얼마 전 억울하게 송사에 휘말렸던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준 은인이었다.
●말 그림 선물
김대감은 이명욱을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게나. 부친은 건강하신가. 지난 송사 때문에 찾아온 모양이네만, 응당 할 일을 한 것뿐인데, 더운 날 어찌 이리 먼 걸음을 하였나? "
야윈 얼굴의 이명욱은 김대감에게 들고 온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내밀며 말했다.
"아닙니다. 대감 덕분에 소인의 집안이 큰 화를 면했습니다. 제 부친의 억울함을 풀어주셨으니 그 은혜를 어찌 평생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감사를 표하고 싶었으나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고심하다가 대감의 막내 자제분께서 올해 대과에 응시하신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솜씨이지만 예부터 전시급제의 기원이 담겨 있다는 준마도 한 폭을 이렇게 준비해 왔습니다. 조선에서 말 그림으로 가장 유명하다는 공재 윤두서의 준마도를 보고 참작했으나 기량이 많이 부족해 올리기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김대감이 두루마리를 펼치니 과연 푸르게 흐드러진 버드나무 아래 8척의 백마 한 필이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준마는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해 그 오묘한 솜씨에 넋을 잃고 바라보던 대감은 몹시 흐뭇해 했다.
●말의 상징적 의미는 고귀한 신분
앞의 내용은 우리 조상들이 말 그림이나 말 문양에 어떤 뜻을 담아 사용하고 주고 받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 낸 가상의 이야기다. 그러나 예부터 출세·인재·장수·부귀 등의 의미를 가진 말 그림이 그려졌다는 것과 말 그림을 선물용·판매용으로 제작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재미있는 점은 몇 세기가 지나 일상생활에서 말을 찾아보기 힘든 오늘날에도 이러한 말의 상징적 이미지들은 우리 주위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런 이미지 대부분이 유럽이나 북미에서 만들어진 상품의 마크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전통적 말 문양과는 상징의 연원을 달리한다. 그러나 고대 동양에서 말의 소유가 지배계층의 특권이었듯이 서양에서의 기마문화도 기사나 귀족 등 상류계층이 향유한 문화였다는 점에서 높은 신분이나 지위를 드러내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상류계층을 지향하는 말 문양
승마·기사(Knight)·폴로(Polo), 말이 도안된 가문의 문장이나 편자 등의 이미지를 마크로 하는 브랜드들이 오랜 시간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사람들이 이러한 디자인을 마크로 사용하는 브랜드의 상품을 착용하거나 사용함으로써 상류계층에 편입된 듯한 느낌을 받고, 그런 이미지를 타인에게 심어 주려고 하는 까닭이다. 결국 기마문화의 아이콘들은‘상류사회’에 대한 동경과 지향을 대변하는 셈이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이탈리아산 자동차 페라리는‘Ferrari’라는 글자 로고보다 마치 중세 유럽 귀족가문의 문장을 연상시키는, 앞발을 든 말 문양 마크로 더 유명하다. 특히 전 세계 남성 운전자들의 로망이 된 이 마크는 페라리를 소유하고 싶은, 또는 그 파워와 스피드를 갈망하는 남성들을 겨냥해 남성용 화장품.의류.액세서리 등 다양한 장르의 상품으로 파생돼 부가적 이익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