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올림픽 첫 메달이 나왔던 1992 알베르빌 대회. 당시 한국은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메달을 획득하며 겨울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존재감을 떨쳤다. 이어진 1994년과 1998년, 2002년 대회에선 쇼트트랙에서만 메달이 나왔고 2006 토리노 때는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메달을 수확했다. 2010 밴쿠버 대회와 2014 소치 대회는 '피겨여왕' 김연아(28·은퇴)가 가세해 피겨스케이팅에서 메달을 획득하며 사상 처음으로 3종목 메달 획득에 성공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메달은 여전히 쇼트트랙에서 나왔고, '효자 종목'이라는 명함 아래 쇼트트랙 의존도는 점점 커졌다. '빙속여제' 이상화(29·스포츠토토)나 '장거리 간판' 이승훈(30·대한항공) 역시 스피드스케이팅의 '메달 기대주'로서 올림픽 때마다 많은 부담을 안고 경기에 나섰다. 그나마 피겨스케이팅은 김연아 은퇴 이후 메달에 대한 기대가 아예 사라졌다. 자연스레 한국 겨울올림픽 메달 판도는 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 양대 산맥으로 굳어졌다. 겨울올림픽의 메달밭 설상 종목은 명함도 내밀기 힘들었다. 기술과 인프라가 갖춰져야 결과가 나오는 썰매 같은 종목은 경쟁에 끼기도 어려웠다.
2018 평창겨울올림픽은 이런 '빙상 편중'에서 탈피해 한국 겨울스포츠의 가능성을 증명한 뜻깊은 대회가 됐다. 금메달 갯수보다 값진, 종목의 다양화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시작은 썰매였다. 대회 전부터 막강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던 스켈레톤 세계랭킹 1위 윤성빈(24·강원도청)이 설날 아침 한국 썰매 역사상 첫 금메달을 안겼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선수 최초로 이 종목 금메달을 목에 건 윤성빈은 압도적인 레이스로 '최강'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함께 뛴 김지수(24·성결대)도 6위에 올라 4년 뒤 베이징에 대한 기대를 키웠다. 여기에 대회 마지막날인 25일, 원윤종(33) 전정린(29) 김동현(31·이상 강원도청) 서영우(27·경기BS경기연맹)가 뛴 봅슬레이 남자 4인승 대표팀도 은메달을 획득하며 썰매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우리처럼 4년 정도 지원한다면 다른 종목도 메달을 딸 수 있을 것"이라는 이용(41) 봅슬레이·스켈레톤 총감독의 말처럼, 2018 평창겨울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내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고 집중적인 투자와 지원을 받은 덕이 크다.
투자와 지원 덕분에 꽃핀 재능은 또 있다. 한국에 설상 종목 최초의 메달을 안긴 '배추보이' 이상호(23·한국체대) 역시 평창을 준비하며 체계적인 지원을 받았다. 2014 소치 대회까지만 해도 이상헌(43) 코치 홀로 스노보드 알파인 대표팀을 지도했지만, 불과 4년 사이에 외국인 코치를 포함해 5명의 코치진이 꾸려졌다. 덕분에 이상호는 스노보드 남자 평행대회전에서 값진 은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스키 58년 역사상 첫 메달리스트로 기록에 남게 됐다.
이번 대회 최고의 화제 종목으로 떠오른 컬링도 폐회식날 열린 결승전에서 스웨덴을 꺾고 은메달을 획득, '아시아 최초' 행렬에 동참했다. 비인기 종목으로 꼽혔던 컬링은 '팀 킴(Team Kim)' 열풍을 이끌며 이번 대회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첫 경기부터 세계 최강 캐나다에 승리를 거두더니 스위스, 스웨덴, 영국 등 강팀을 잇달아 제압하며 승승장구한 '팀 킴'의 활약은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관심을 모았다.
이들의 메달은 단순히 '사상 처음', '아시아 처음'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값진 것이 아니다. 체격 차이, 장비 차이, 그리고 인프라 차이 등으로 인해 이제껏 유럽과 북미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종목들에 도전장을 내고 메달을 따내 '가능성'을 증명했다는 점이 가장 큰 소득이다. 물론 이들의 메달이 일회성 성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선 앞으로도 지속적인 노력과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도 함께 증명했다.
전통의 메달밭인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도 제 몫을 해냈다. 쇼트트랙에서는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가 나왔고 스피드스케이팅도 금메달 1개, 은메달 4개, 동메달 2개로 풍성한 성적을 거뒀다. 특히 스피드스케이팅은 김민석(19·성남시청) 차민규(25·동두천시청) 김태윤(24·서울시청) 등이 단거리와 중거리에서 예상치 못한 메달 릴레이를 벌여 2010 밴쿠버 대회 이후 또 한 번의 '황금세대'의 탄생을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