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 정선아가 한국인 최초 엘사로 거듭났다. 뮤지컬 ‘겨울왕국’ 한국 초연에서 탄탄한 가창력과 섬세한 연기로 자신만의 엘사를 완성해 가고 있다.
지난 13일 막을 올린 ‘겨울왕국’에서 정선아는 아렌델의 여왕 엘사로 무대에 섰다. 대표 넘버 ‘렛 잇 고’를 부른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대는 컸다. 막이 내린 뒤 객석을 빠져나오는 관객들 사이에서는 “정선아는 미쳤다”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익히 알고 있던 가창력은 물론이고, 두려움에 눌려 있던 엘사가 조금씩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까지 노래와 연기로 빈틈없이 이어낸 무대였다.
‘겨울왕국’은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힘을 지닌 엘사와 동생 안나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자신의 능력으로 안나를 다치게 한 엘사는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해칠까 두려워 사람들과 거리를 둔다. 부모를 잃은 뒤 왕위에 오르지만 대관식에서 결국 힘이 드러나고, 엘사는 아렌델을 떠난다. 언니를 데려오기 위해 안나가 뒤를 쫓으며 두 자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정선아는 안나를 사랑하면서도 다가가지 못하는 엘사의 마음을 말투와 표정에 담았다. 안나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넬 때도 선뜻 마음을 열지 못했고, 가까워지려 하면 한발 물러섰다. 대사에서도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한 번씩 삼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동생을 밀어내는 행동에서도 차가움보다 다시 상처를 줄까 조심스러워하는 마음이 먼저 보였다.
이번 공연에서 유독 귀에 들어온 것은 뜻밖에도 초반 낮은 음역이었다. 그동안 정선아 하면 떠오르던 시원한 고음 대신, 낮은 톤으로 차분하게 깔리는 목소리가 먼저 귀를 붙잡았다. 정선아 특유의 또렷한 음색은 그대로인데 힘을 덜어내니 한층 부드럽고 쓸쓸하게 들렸다. 자신의 능력을 들키지 않기 위해 평생을 조심하며 살아온 엘사의 외로움과 압박감도 그 목소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읽혔다.
사진=정선아 SNS
대표 넘버 ‘렛 잇 고’는 그래서 더욱 강하게 다가왔다. 차분하게 눌러 부르던 낮은 음역에서 출발해 곡이 전개될수록 목소리는 점차 선명하고 시원하게 뻗었다. 앞선 장면에서 줄곧 감정을 삼키던 엘사가 홀로 남은 순간 처음으로 자신의 힘을 인정하고 풀어놓는 변화와 정확히 맞물렸다. 그 순간만큼은 정선아가 아니라, 그동안 상상 속에서만 그려왔던 엘사가 실제 무대에 서 있는 듯했다.
정선아는 2002년 뮤지컬 ‘렌트’의 미미로 데뷔한 뒤 20년 넘게 무대를 지켜왔다. 밝고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무대를 누비는 ‘위키드’의 글린다부터 화려함 뒤에 욕망과 불안을 감춘 ‘시카고’의 벨마 켈리, 삶의 중요한 선택 앞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흔들리는 ‘이프덴’의 엘리자베스까지 분위기가 전혀 다른 인물들을 꾸준히 소화해 왔다.
이번 엘사는 그 어느 쪽과도 닮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혼자가 되고, 마음조차 마음대로 내보이지 못하는 인물이다. ‘겨울왕국’을 보는 동안 글린다도, 벨마 켈리도, 엘리자베스도 떠오르지 않았다. 깊은 두려움을 안고 살아온 엘사 한 사람만이 무대에 남아 있었다.
데뷔 20년을 넘긴 배우에게는 이미 선명한 대표작과 배역이 여러 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정선아는 이번 ‘겨울왕국’에서 또 처음 보는 얼굴을 꺼냈다. 오래 봐온 배우에게 아직 낯선 모습이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그다음 얼굴까지 기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정선아의 엘사는 더욱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