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는 '팬덤'으로 돌아간다. 산업의 수요자인 팬은 단순 방관자가 아니다. 야구를 해석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팬들은 프로야구라는 문화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팬들의 열성이 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다른 스포츠와 달리 야구는 관중과 선수들의 경계선이 애매모호하다. 플라이볼을 잡으려는 선수와 팬들의 손은 뒤엉키며 서로의 영역을 왕왕 넘나든다. 그래서 야구규칙에는 ‘관중방해’(Fan Interference)라는 항목이 있을 정도다.
2003년 10월 14일 리글리필드에서 내셔널리그챔피언십시리즈(NLCS) 6차전 경기가 열렸다. 5차전까지 3승을 거두고 플로리다 말린스에 3-0 으로 이기고 있던 홈팀 시카고 컵스는 1945년 이후 첫 월드시리즈 진출까지 불과 5개의 아웃만 남겨 놓고 있었다. 8회초 1사 2루 풀카운트에서 타자가 친 파울볼이 왼쪽 외야석으로 날아갔다. 컵스 좌익수 모이세스 알루는 달려가 펜스에 뛰어올라 관중석으로 글러브를 뻗었다. 동시에 10여 명의 팬들도 파울볼을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공은 한 청년의 손을 맞고 관중석 안으로 튕겨졌다. 잡을 수 있었던 아웃을 놓치자 알루는 격한 반응을 연출하며 관중석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많은 시선이 알루의 수비를 방해한 팬에게 쏠렸다. 초록색 폴라넥을 입고 안경을 낀 앳된 얼굴의 청년은 컵스 모자와 헤드폰을 낀 채 덤덤히 자리에 앉았다. 그의 독특한 차림새가 수 많은 관중 속에서도 도드라졌다. 그 청년이 바로 본의 아니게 야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팬이 돼버린 스티브 바트만이다.
심판은 공이 관중석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며 ‘관중 방해’를 선언하지 않았다. 컵스의 감독과 더그아웃은 판정에 항의하지 않았고 경기는 재개됐다. 와일드 피치와 연이은 안타로 스코어 3-1에 1사 1·2루가 됐다. 후속 타자가 친 내야 땅볼이 문제였다. 동네 야구에서도 병살타로 처리될 땅볼을 유격수 알렉스 곤살레스가 글러브에서 떨어트렸다. 어처구니 없는 실책으로 1사 만루가 됐고, 말린스의 데릭 리는 2루타를 쳐내며 동점을 만들었다. 포문이 열린 말린스는 컵스의 마운드를 두 번 갈아치우며 8회초 공격에서 무려 8득점하며 승기를 잡았다.
그런데… ‘스티브 바트만 사건’을 다룬 많은 이야기에서 이상하게도 간과하거나 왜곡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3-3 동점에서 컵스 선발 투수 마크 프라이어가 강판당하고 구원투수가 올라왔을 때까지만 해도 관중들은 바트만에게 크게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있었다. 지은 지 백년 가까이 된 리글리필드에는 대형 전광판이 없어 관중 대부분은 ‘문제의 그 팬’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중계방송에서도 구원투수가 웜업 투구를 할 때, 바트만이 ‘방해’한 파울볼이 아닌 유격수 곤살레스의 실책을 반복해서 슬로우모션으로 재생했다. 물론 경기 종료 후에는 바트만이 파울볼을 건드리는 장면이 미국의 모든 방송을 도배했지만.
불과 20분만에 3-0 스코어가 3-8로 뒤집히자, 컵스 팬들은 사나워졌다. 망연자실함이 분노로 승화하며 팬(fan)이 패내틱(fanatic·광신도)으로 돌변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날 밤 광신도들은 아주 어두운 곳으로 갔다. 관중석 곳곳에서 휴대전화들이 울리기 시작했다. TV 중계를 보던 지인들 전화였다. 컵스의 승리를 고대하며 모여있던 구장 밖의 팬들은 왼쪽 외야석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X새끼(Asshole)!"라고 외쳐댔다. 구호는 순식간에 구장 안 모든 관중에게 불길처럼 옮겨갔다. 맥주와 음식물이 바트만을 향해 날아갔다. 결국 바트만은 보안요원들의 도움으로 ‘변장’을 하고 구장을 빠져 나갔다. 이성을 잃은 관중의 민낯은 추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희생양을 찾은 군중의 폭력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 날, 시카고 선타임스는 문제의 외야석 관중에 대한 기사에 바트만의 신상을 공개했다. 언론의 만행이었다. 훗날 선타임스측은 7 차전이 남은 상태에서 하루짜리 가십기사에 바트만의 신상 공개를 결정하는 데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고 자백했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6차전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익명의 팬에 불과했던 바트만은 그 기사로 인해 직장과 거주지까지 세상에 알려져 컵스 광신도들의 협박대상이 돼 버렸다. 급기야 바트만의 집에는 경찰들이 배치됐다.
하이에나처럼 몰린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은 쇄도했다. 바트만은 사생활을 보호해달라며 언론의 자제를 당부하며 친구를 통해 컵스와 컵스팬들에게 보내는 자신의 진심어린 사과문을 발표했다.
바트만에 대한 사회적 린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미국 전역의 각계각층에서 바트만을 조롱하며 공격해댔다. 하나같이 수치심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예의도 없어 보였다. 일리노이 주지사가 "바트만은 증인보호프로그램에 들어가야 한다"고 농담을 하자, 플로리다 주지사 젭 부시는 "언제든지 바트만의 망명을 받아주겠다"며 희희덕거렸다.
세상의 모든 야구팬은 야구장에서 공을 잡기를 바란다. 특히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에서 그런 행운의 기회를 마다할 이는 없다(‘바트만 파울볼’을 주운 익명의 팬은 그 공을 경매에서 10만 달러에 팔았다. 그 공은 시카고 팬들이 보는 앞에서 폭파됐다). 야구팬 바트만이 공을 잡기 위해 내민 손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바트만은 평범한 인생을 살고 싶은 보통 사람이었다.
‘스티브 바트만 사건’을 살펴보면 의아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왜 7차전 경기가 치뤄지기도 전에 시카고 팬들은 ‘염소의 저주’가 개입했다고 속단했나? 그런 자기실현적 예언 때문에 컵스는 7차전에서 역전패를 당했나? 왜 사람들은 유격수 곤살레스의 실책이 아닌 바트만의 손이 컵스의 포스트 시즌을 망쳤다고 믿었나? 설령 그 수 많은 플레이들 중에서 바트만의 ‘방해’가 컵스의 월드시리즈 진출을 막은 유일한 원인이라고 치더라도, 팬 하나에 무너지는 팀이 어떻게 우승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날 헤드폰을 낀 채 자신을 향한 비난을 무시하고 별 반응 없이 앉아 있던 바트만의 의연함이 성난 군중을 더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얌전한 모범생 같은 바트만이 나약하고 만만하게 보여 화풀이의 제물로 삼기에 적합했는지도 모른다.
명백한 사실은 ‘스티브 바트만 사건’에서 유일하게 품격을 지킨 인물은 바트만이었다. 그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 바로 사과했고, 그 어떤 거액의 광고 제안이나 방송출연 요청도 거절했다. 심지어 어느 플로리다 고급 리조트에서 받은 6 주짜리 패키지 상품권은 자선단체에 기부해 버렸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언론의 추적을 피하며 ‘조용한’ 삶을 살고 있다.
얼마 전 컵스는 바트만에게 2017년 개막전 시구를 제안하기 위해 조만간 그와 접촉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 언론은 월드시리즈 챔피언 컵스와 팬들이 이제는 바트만을 용서할 때가 됐다고 보도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얘기다. 용서를 구할 이들이 용서를 하겠다니. 아니 주객이 전도돼도 한참 된 것 같다. 용서가 아니라 사과를 한다 해도 이미 14년이나 늦지 않았나? 컵스의 제안에 대해 아직 바트만은 그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고 있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스티브 바트만 사건’은 어쩐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가해자들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서슴없이 해대는 대한민국에서 요즘 조기대선 바람까지 불어 집단정신에 사로잡힌 이들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03년 NLCS 는 이제 과거의 일이다. 응원하는 팀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 시리즈에서 뛰었던 선수들은 거의 다 은퇴했다. 확실한 사실은 팬들이 선수들보다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이다. 선거도 마찬가지다. 몇 년 후면 사라질 정치인들에게 열성적인 지지를 보내는 심정에도 나름 이유가 있겠지만, 이성을 잃은 군중심리에선 애잔함까지 느껴진다.
‘스티브 바트만 사건’은 사회심리학적으로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면, 그 광기는 관중 개개인의 삶에 축적된 불만에서 싹텄는지도 모른다.
많은 팬들은 인생의 결핍과 실망을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승리로 보상받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런 어리석음은 자칫 다수의 횡포로 변해 인권유린으로 이어진다. 2003년 NLCS 결과를 오직 바트만의 ‘방해’로 탓할 수 없듯이, 야구에서 또 정치에서도 지지하는 대상의 ‘승리’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다. 그러니 삿대질 하며 핏대를 올리기 전에 한번만 생각해 보자. 바트만 같은 희생양을 만들면 과연 누가 득을 보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