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에 기생하는 언론의 펌프질과 밴드웨건 효과로 불어난 거품 모두 쏠림 현상을 조장하고 있다. 이기는 편이 내 편이라고 여기는 사회심리에 편승한 ‘대세론’은 객관(?)적인 통계와 수치를 들먹이며 ‘언더독’의 승리 가능성을 배제해 버린다.
야구에도 물론 ‘대세론’이 있다. 많은 이들이 정규 시즌에서 각각 100승 이상씩 거둔 뉴욕 양키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월드시리즈에서 맞붙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2004년 메이저리그가 그랬다.
그 해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보스턴 레드삭스는 양키스와 월드시리즈의 경선 격인 아메리칸리그챔피언십시리즈(ALCS)에서 격돌했다. ‘웬수’에 가까운 두 라이벌의 피할 수 없는 숙명적 대결이었다.
1차전부터 삭스 팬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양키스의 4번 타자 마쓰이 히데키가 5타점으로 맹활약한 반면, 삭스가 2004년 시즌을 위해 작심하고 영입한 투수 커트 실링은 3이닝 동안 6실점을 내주며 맥없이 물러났다. 실링의 찢어진 오른 발목 건초가 원인이었다. 삭스는 2차전과 3차전도 연달아 패했다. 보스턴 펜웨이파크로 옮겨 진행된 3차전은 말 그대로 난타전이었지만 삭스는 4회초에 불펜이 무너지며 8-19로 대패했다.
2004년 10월 17일 일요일. 4차전을 기다리는 보스턴의 아침은 적막 그 자체였다. 거리에는 개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카톨릭 신자가 다수인 매사추세스주의 수 많은 아침 미사에서는 삭스를 위한 기도가 빠지지 않았다. 일 년 동안 간직했던 꿈이 허망하게 사라질 때 생기는 좌절감(야구는 물론, 인생 자체가 싫어지는 그 자괴감)에 너무나도 익숙했던 삭스 신자들의 간절한 기도는 지극히 소박했다.
‘주여, 제발 오늘 하루만 이기게 해주소서.’
솔직히 삭스 팬들은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역사상 첫 3경기를 내리 진 팀이 4연승으로 시리즈를 역전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고, 20세기 초부터 내려온 ‘밤비노의 저주’ 역시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세론’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신에게 최소한의 자존심이라도 지키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86년간 우승을 못 한 레드삭스를 신념과 신앙으로 일편단심 응원하는 보스턴 팬들은 밴드웨건 팬들로 오염된 양키스 팬들과는 실존적으로 완전히 다른 부류의 인간들이다. 도널드 트럼프 같은 유명인들이 팬덤을 이룬 양키스를 그냥 좋아하면서 심리적인 신분상승을 느끼는 덜 떨어진 속물들은 의외로 많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뉴욕에서 살지도 않고, 야구의 규칙도 제대로 모르는 사이비들이 수두룩하다.)
일부 언론에서는 벌써부터 양키스와 카디널스의 월드시리즈에 대한 예측들이 서슴없이 흘러나왔고, 양키스 팬들은 월드시리즈 표를 예매한다고 오두방정을 떨어댔다.
홈팬들 앞에서 ‘싹쓸이’를 당할 수 없다는 각오로 나온 삭스는 4 차전에서 양키스와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하지만 9회말로 접어들었을 때 삭스는 3-4로 뒤지고 있었다. 월드시리즈까지 3 개의 아웃만을 남겨둔 양키스 락커룸에서 샴페인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삭스의 선두 타자가 볼넷을 얻어 걸어나갔다. 삭스의 테리 프랑코나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이 발 빠른 데이브 로버츠를 대주자로 기용했다. 그러자 펜웨이파크 관중은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양키스의 마무리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는 로버츠의 타이밍을 빼앗기 위해 견제구를 계속 뿌려댔고, 셋업 포지션에서 공을 쥔 채 한없이 뜸을 들였다. 삭스 팬들에게는 영원보다 더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리베라의 투구와 함께 로버츠는 2루를 향해 달렸다. 피치아웃이 미트에 걸리자마자 나온 포수의 반사적인 송구는 빠르고 정확했다. 하지만 로버츠의 손은 유격수 데릭 지터의 태그보다 반 박자 앞섰다. 2루심이 양 팔을 벌려 ‘세이프’를 선언하자, 보스턴 전체가 열광했다. 미친 환호에 화답이라도 하듯 타석의 빌 뮬러는 곧바로 중전 안타로 동점을 만들어냈다. 그 순간 영적 감각이 발달한 삭스 팬들은 알 수 있었다. 신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팽팽하게 이어지던 접전은 결국 12회말 보스턴 4번 타자 데이비드 오티스의 끝내기 투런 홈런으로 마무리 됐다. 환희에 찬 보스턴은 광란의 축제를 연상시켰다. 새벽 3 시가 돼서야 인터뷰를 마친 오티스에게 보스턴 기자들은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몇 시간 후, 두 팀은 5 차전을 위해 다시 펜웨이파크에서 재회했다. 역전의 역전을 거듭한 5 차전 역시 다음날 새벽으로 넘어갔다. 14회말 2 사 1·2 루에서 오티스는 다시 적시타를 뽑아내며 5시간 49분짜리 경기에 화려한 마침표를 찍었다. 삭스 팬들은 마치 같은 영화를 이틀 연속으로 본 기분이었다.
어느새 화요일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삭스 팬들 중 일요일 아침 이후 잠을 제대로 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벌어질 6차전을 기다리며 그 누구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뉴욕에서 열린 6차전은 1차전에서 동네북처럼 두들겨 맞은 실링의 ‘복수혈전’이었다. 실링은 양키스의 첫 6타자를 내리 아웃으로 잡았고, 4회에서부터 7회까지는 연달아 10명의 양키스 타자를 저지했다. 그러자 양키스타디움은 도서관처럼 조용해졌다. 삭스 팬들은 그날 밤 그 침묵에서 느꼈던 희열을 아직도 기억한다. 6차전의 실링은 완전히 다른 선수였다. 첫 등판부터 절뚝거리며 마운드에 오른 그는 호투가 아닌 ‘혈투’를 선보였다. 경기 시작부터 구장 내 모든 카메라는 실링의 오른 발목에서 흐르는 피에 집중돼 있었고, 이닝이 지날수록 실링의 양말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 갔다. 훗날 실링은 당시에는 오히려 통증보다 피가 많이 고인 신발이 벗겨질까봐 걱정이 됐다고 회고했다. 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을 투혼을 보여 준 실링은 그날 7이닝 동안 99개의 공을 던져 1실점으로 양키스를 묶으며 승리 투수가 됐다. (아직도 남는 의문 하나. 왜 그날 양키스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실링을 상대로 번트를 한 번도 대지 않았을까? 오만한 스타 군단의 자존심 때문이었나?)
삭스는 바로 다음 날 열린 7차전에서 10-3으로 양키스를 대파하며 야구 역사를 다시 썼다. 4일 동안 4연승을 거둔 삭스의 질주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정확히 일주일 후 월드시리즈 마저 4연승으로 ‘싹쓸이’한 보스턴 레드삭스는 86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단체경기이면서도 개인기를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야구는 다른 스포츠와 달리 미묘한 ‘뉘앙스’가 많다. 살아 있는 예술 작품처럼 경기 중에도 늘 개별 선수들의 세세한 몸짓과 표정의 ‘뉘앙스’를 읽는 묘미가 야구의 쏠쏠한 재미이기도 하다. 4차전 9회말 무사 1루에서 대담한 리드를 잡고 있던 로버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마치 그 후에 일어날 모든 기적들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예언자와 같았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로버츠의 그 도루가 결국 그 시리즈의 변곡점이었고 새로운 역사의 시발점이었다.
‘대세론’이라는 큰 문은 이 세상 그 어떤 ‘언더독’에게도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기회를 포착하면 위험을 감수하고 과감하게 질주해야 비로소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길이 드러난다. 현실은 늘 픽션보다 희한하다. 역동적인 승부의 세계에서 ‘대세론’ 따위는 허상에 불과하다. 세상의 어떤 가치는 야구보다 위대하고, 우리 모두보다 거대하다.
2004년 보스턴 레드삭스가 일궈낸 성과가 그런 것이었다. 역사상 전례가 없는 반격과 대역전은 우리에게 결코 미래는 과거의 인질이 될 수 없다는 진실을 일깨워 줬고, 그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해줬다. 무엇이 가능한지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상상도 못했던 길을 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진정한 희망은 구호나 레토릭이 아닌 구체적인 체험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2004 년 ‘대세론’을 뒤집은 반전 드라마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어쩌면 답은 의외로 야구가 가진 민주적인 요소들에서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야구는 모든 선수들에게 시간의 제약 없이 각자의 페이스에 맞게 공을 다룰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질주력에 의존하는 축구나 키가 필수조건인 농구와 달리, 야구는 신체조건의 특별한 구애 없이 각자의 능력을 지닌 선수들이 참여할 수 있다. 언론과 집회의 자유 역시 보장된다. 경기 중에도 선수들은 수시로 서로 소통할 수 있고, 필요하면 더그아웃이 아닌 마운드에서 모여 회의까지 진행한다. 그라운드 곳곳에 배치된 심판 6명은 공정한 승부를 보장한다. 설령 판정이 석연치 않으면 ‘어필’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마지막으로, 야구는 개인 혼자서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그 아무리 뛰어난 스타의 활약도 훌륭한 팀플레이를 꺾을 수는 없다. 그래서 야구는 예측하기 어렵고 많은 것을 가능케 하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바라는 민주주의의 메타포인 야구는 선거와도 유사하다. 적절하게 때리고, 타이밍에 맞춰 달리고, 불필요한 에러를 범하지 않는 쪽이 반드시 승리한다. 그래도 야구가 더 솔직하다. ‘개입을 해야 아무도 지지 않는다’는 좌파들과 ‘개입하지 않으면 모두가 이긴다’는 우파들이 립서비스를 일삼는 선거와 달리… 야구는 누군가는 반드시 패자가 된다는 진리를 인정한다.
선거를 앞둔 정객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 과연 이번 대선에서 ‘대세론’을 뒤엎는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정말 상상력이 궁핍한 질문이다. 야구나 역사를 제대로 아는 이들이라면 그 물음에 이렇게 답할 것이다. 진부한 ‘대세론’ 따위 개도 안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