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새벽 4시. 사진작가 신특수(50)씨와 만나기로 한 시간. 가로수 나뭇잎에 비가 한두 방울 듣는다.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비다. 일기예보보다 조금 빨리 찾아왔다. 산을 오르고 사진을 찍는 게 어려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목적지는 강원도 화천군에 있는 용화산(875m)이었지만 비를 피하기 위해 일단 동쪽으로 가기로 했다.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출발하게 된 것이다. 비와 함께한 술래잡기가 시작됐다.
■남극, 한국의 겨울 산보다 쉽더라
신씨는 현재 대전국립중앙과학관 상설 전시관에서 국제 극지의 해(IPY·2007~2008년)를 맞아 남극·북극 사진전을 열고 있다. 지난 4월 21일부터 시작해 원래 이달 20일까지였지만 찾는 사람이 많아 다음달까지 한 달 연장하기로 했다. 신씨는 2002년 이후 남극과 북극을 세 번이나 오갔다. '100 한국의 명산'이라는 책을 출판하고 잠깐 쉬고 싶은 마음에 떠났던 남극과의 인연이 이번 전시회까지 이어졌다.
"남극은 엄청 추운 줄 알았어요. 영하 20도를 밑도는 날씨니 춥긴 추운 곳이죠. 그런데 한국의 겨울산에 비하면 이건 게임이 안돼요. 그래서 즐겁게 작업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든 거죠."
■백두대간을 담으려다 100명산을 먼저
차는 어느덧 홍천의 가리산을 지나고 있었다. 차 앞 유리엔 가늘고 굵은 빗줄기가 끊이지 않고 흘러내렸다.
"2002년에 '100 한국의 명산'을 출간했는데 막 인쇄에 들어가기 전에 혼쭐이 났죠. 세상에 가리산 사진을 빼먹었잖아요. 그래서 부랴부랴 사진을 찍기 위해 가리산을 찾았던 기억이 있어요."
신씨는 2002년 UN이 지정한 세계 산의 해 기념으로 산림청이 발주한 '100 한국의 명산'의 선정위원이기도 했다. 그가 한국의 산들을 잘 알게 된 것은 백두대간 덕분이다. 1995년 백두대간을 카메라에 담기 위한 산행에선 정작 사진을 몇 컷 얻지 못했다. 나무만 보고 숲은 못 본 격일까. 백두대간에 들어가 백두대간을 대하다 보니 진짜 백두대간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백두대간 작업 후 외국에서 활동하려던 계획도 접고 백두대간의 줄기를 담아내기 위해 수시로 산을 찾았다. 백두대간을 조망할 수 있는 주위의 산을 오르다 보니 덤으로 알려지지 않은 산들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아낼 수 있었다.
■무엇이든 다 찍을 수 있어야 자연도 담는다
신씨가 산에 관심을 가진 것은 중학교 시절. 고향인 광주에서 어머니와 함께 무등산을 바라보는 것이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고 한다. 병환이 있던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 함께 산을 오르기도 했다. 산에 오르면서 기록에 대한 욕심도 커져 마침 집에 있던 사진기를 가지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교 행사는 물론 기록이 필요한 일에 불려 다니기 시작했다.
이런 사진에 대한 열정 때문에 대학도 중도에 그만두고 1980년에 스튜디오를 차렸다. 하지만 2년 만에 스튜디오는 문을 닫고 신씨는 마치 도망치듯 산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새로운 마음으로 스튜디오를 다시 시작했다.
이번엔 대상을 가릴 것 없이 광고 사진에 몰두했다. 고객이 요구하는 것을 100% 만족시키자는 것이 그의 모토였다. 가구 사진을 제대로 찍기 위해 무려 1년간 가구 사진에 집착하는 근성도 보여 줬다.
"가구는 물론 자동차·굴삭기 등 다양한 상품을 찍었죠. 제품의 특징을 제대로 살려내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실력도 부쩍 늘었고. 다시 산을 찾았을 땐 자신감 덕분인지 여유롭게 산을 대할 수 있게 됐어요."
■대상의 특징을 포착하라
차는 이제 미시령을 넘었다. 설악산이 훤히 보인다. 비는 그쳤다. 아니, 그제서야 장마라는 술래로부터 도망친 것이다. 하지만 먹구름은 우리를 찾아 벌써 코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설악산을 오르기에는 무리일 듯싶었다. 잠시 설악산의 정기를 마신 후 다시 출발했다. 아무래도 산을 오르는 것은 힘들 듯싶어 차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평창의 고루포기산(1238m)이 제격이었다.
아직도 수해 복구가 덜 된 도로를 따라 고루포기산에 올랐다. 감자꽃은 지고, 배추는 이제 파종을 해서 절정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6월 초순에 감자꽃이 필 때나, 7월 초 배추가 한창 자랄 때면 정말 장관을 이루죠. 안개 머금은 아침 해를 배경으로 배추를 렌즈 안에 담으면 그 주름 하나하나까지 선명해 먹고 싶은 마음이 일 정도죠."
■비하인드 스토리를 찾아 산을 오르다
잠시 카메라를 꺼내 고랭지 채소밭을 담으려는 순간 비라는 술래는 우리의 옷깃을 적시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가' 하며 으름장 놓듯 뚝뚝 떨어지는 모양새가 제법 사납다. "예전에 백록담이 만수되는 모습을 담기 위해 장마철에 일부러 한라산을 찾았죠. 한 달이 넘게 비를 맞으며 백록담에 머물렀어요.
그런데 백록담이 바다처럼 으르렁거리고 안개가 너무 짙어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죠. 그래서 날이 개기를 기다려 다음날 아침 올랐더니 세상에, 그새 물이 다 줄어 버린 거 있죠. 어찌나 허전하던지 …."
하지만 지금은 그런 허전함이 없어졌다고 한다. 기다려 찾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냥 아무 때고 찾아가서 발견하게 되는 그 순간순간들을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산 사진은 내게 있어 취미예요. 너무 즐거우니까. 그래서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산에서 이야기를 찾는다고 한다. 이슬 한 방울이 떨어져 계곡으로 흐르고, 그것이 다시 시내가 되고, 강이 되는 모습을 담은 '한강'처럼. 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에도 그런 이야기를 담고 싶어 한다. 그가 들려줄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신특수 사진작가는?
2002년 산림청에서 발주한 UN이 지정한 세계 산의 해 기념 '100 한국의 명산' 출판. 1991년 UN 가입 기념으로 중요 무형문화재를 소개한 '천년의 소리여', 1999년 강원도 엑스포 기념 화보집 '설악산', 1998년 세계 섬 문화 축제 기념 출판물 '신비의 섬 제주', 1994년 서울 천도 600주년을 맞아 한강의 발원지인 검용소에서 하구언까지 600여 컷의 사진을 담은 '한강' 제작에 참여했다.
이외에 세계 물의 해 기념 '낙동강', 국립공원전, 백두대간전, 서호주 정부 초청 사진전, 남극·북극 사진전 등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