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배구가 사상 초유의 위기에 직면했다. 남자부 정규시즌 개막일이 미뤄졌고, KOVO컵은 개막 하루 전날 외국인 선수 출전 불가(본지 단독 9월 13일, KOVO컵 개막 하루 전날 외국인 선수 출전 불가 통보…구단 "황당하다")가 결정됐다. 한국배구연맹(KOVO)은 대회 취소를 발표했다가 9시간 만에 재개를 알리는 촌극을 빚었다. 결국 현대캐피탈의 중도 하차로 대회는 파행 운영 중이다. 20년 넘게 배구계에 몸담은 단장, 사무국장, 구단 관계자를 통해 연맹의 '연속 범실'에 대해 문제점을 짚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KOVO컵 파행 운영과 2025~26시즌 일정 조정은 한국 배구의 행정력, 외교력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이번에 문제가 된 외국인 선수의 국제이적동의서(ITC) 발급은 대한배구협회 소관이다. 프로팀 B·C 국장은 "연맹이 협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FIVB와 소통했을 것"이라고 문제를 지적했다. A 단장은 "연맹과 협회가 서로 소통해야 하는데 앙숙 관계"라며 안타까워했다. 연맹 관계자는 "우리의 잘못된 부분"이라고 인정했다. B 국장은 "연맹에 잘못된 부분에 대해 중심을 잡을 인물이 전혀 없다"며 리더십 부재를 말했다. 일부 구단은 프로 선수가 모인 국군체육부대(상무)의 KOVO컵의 참가를 요청했으나 연맹은 '국제화' 명분으로 태국의 나콘랏차시마를 초청했다. 이는 연맹 고위층의 의견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B 국장은 "지금이야말로 총재의 리더십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덧붙였다. 3연임에 성공한 조원태 KOVO 총재의 임기는 내년 6월까지다. A 단장은 "연맹 일부 임원들이 총재의 눈치만 살핀다"고 지적했다. 실무 고위 책임자의 무능함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크다.
KOVO는 지난 12일 밤 FIVB로부터 영어 공문을 전달받았으나, 현대캐피탈에 한국어로 번역한 공문을 보냈다. 나머지 구단에는 이를 알리지 않았다. 관계자 D는 "FIVB로부터 받은 정식 공문과 한국어 번역 공문을 함께 보내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라며 "다음에 더 많은 제약 사항 등을 알게 됐다"라고 했다. E 사무국장은 "연맹이 사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려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감추려고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고 의구심을 품었다.
KOVO는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연맹 사무총장이 세계선수권대회가 진행 중인 필리핀으로 출국했다. FIVB 집행부를 만나 대화를 시도했지만 FIVB 입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D는 "일본과 달리 한국 배구의 외교력이 너무 떨어진다. 박기원 감독(태국 대표팀 감독)을 제외하면 국제배구계에서 특별한 역할 또는 소통 창구가 될 사람이 전혀 없다"라고 안타까워했다. C 국장은 "우리 배구 행정이 너무 우물 안 개구리"라고 지적했다. 지난 15일 남자부 5개 구단 단장은 KOVO 개최지인 여수에서 만나 대책을 논의했다. 다음 주에 7개 단장이 모여 다시 의견을 모으기로 했다. A 단장은 "이대로 넘어갈 순 없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B 국장은 "20년 동안 쌓아온 게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든다. 연맹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맹은 "이러한 일이 벌어진 원인에 대해 철저히 분석하고, 관련된 관계자들에 대해서도 후속 조치를 진행해 나갈 예정"이라며 "FIVB와 더욱 원활한 소통 채널을 만들면서 제도적인 보완책을 마련해 유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철저히 업무를 진행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