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한일 관계 정상화를 이유로 내놓은 일제 강제징용 '셀프 배상안'(제3자 변제) 때문에 애꿎은 우리 기업들만 난처해졌다. 포스코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기부금을 출연하자 다른 기업들도 등 떠밀려 지갑을 열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포스코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40억원의 기부금을 납부했다고 15일 밝혔다.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 발표 이후 청구권 자금 수혜 기업들 가운데 처음이다.
포스코는 "과거 재단에 100억원을 출연하겠다는 약정서에 근거해 남은 40억원을 정부의 발표 취지에 맞게 자발적으로 출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포스코는 2012년 3월 이사회 의결로 재단에 100억원을 출연하기로 했으며, 2016년 1차 30억원, 2017년 2차 30억원 등 60억원을 이미 납부했다.
이번 정부 발표에 따라 유보했던 잔여 약정액 40억원을 출연해 재단과의 약속을 이행했다는 게 포스코의 설명이다.
지난 6일 정부는 2018년 대법원 배상 확정 판결을 받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국내 재단이 판결금을 대신 지급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일본의 피고기업(신일본제철·미쓰비시중공업)들은 배상 책임에서 빠져 피해자들을 철저히 외면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당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는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고 사죄할 사람도 따로 있는데 (제3자 변제 방식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동냥해서 (주는 것처럼 하는 배상금은) 안 받으련다"고 말했다.
최근 정부가 확고한 대주주가 없는 소유분산기업을 향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에 포스코를 시작으로 나머지 청구권 자금 수혜 기업들도 기부금 출연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한국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체결하면서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는 대신 5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을 받았다.
이 중 일부는 기업 지원 자금으로 쓰였는데 포스코의 전신인 포항종합제철에 전체 청구권 자금의 24%인 1억1948만 달러가 투입됐다. 청구권 자금 수혜 기업은 포스코를 비롯해 한국도로공사, 한국철도공사, 외환은행, 한국전력공사, KT, KT&G, 한국수자원공사 등 16곳이다.
이와 관련해 KT 측은 "정부의 방향성에 맞춰 요청이 있다면 기부금 출연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학계와 시민단체는 일본의 사죄 없는 제3자 변제를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날 한국역사연구회·역사학회·역사교육연구회 등 49개 단체는 성명을 내고 "사과와 배상에 대한 어떠한 보장도 없이 돈을 지급하려는 방안은 아무런 반성 없는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과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고 꼬집었다.
같은 날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주최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도 "정부의 해법은 용서와 화해는 물론 미래도 불러올 수 없다. 더 큰 갈등과 파국만 불러온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