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후가 지난 10일 일본전에서 3회 다르빗슈 유로부터 좌전 안타를 때려낸 장면. 간결한 자세로 153㎞의 패스트볼을 가볍게 받아쳤다. MLB닷컴 캡처 한국 야구대표팀이 제5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허망하게 마무리했다. 한국은 2라운드(8강) 진출에 실패한 뒤 치른 13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중국전에서 22-2, 5회 콜드게임 승리를 거뒀다. 너무 늦은 승리였다.
대표팀을 이끈 이강철 감독은 통한의 반성문을 썼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그는 “제가 부족했다. 국민들께 정말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함께 자리한 이정후(25‧키움 히어로즈)도 “결과가 이래서 국민께 죄송하다. 우리의 기량은 세계적인 선수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발전하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긴 인터뷰가 끝나 무렵 이정후는 “이번 대회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꼽아달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지난겨울 (시속 150㎞ 이상의) 빠른 공을 치기 위해서 많이 준비했다. (WBC는) 그걸 시험할 무대였다. (한국보다 기량이 뛰어나지 않은) 다른 팀과의 경기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고, 일본과 경기할 때 헛스윙 없이 대처한 게 수확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선발) 다르빗슈 유로부터 안타를 친 장면도 그랬지만, 첫 타석에서 우측으로 간 파울 타구가 더 기억에 남는다”고 떠올렸다.
이정후는 2023 WBC 4경기에서 타율 0.429(14타수 6안타), 5타점, 4득점을 올렸다. 한국 타선에서 가장 돋보인 성적이었다. 특히 일본전 4-13 참패 속에서 유일하게 멀티히트를 쳐냈다. 특히 2-0으로 앞선 3회 두 번째 타석에서 다르빗슈의 시속 153㎞의 패스트볼을 가볍게 잡아 당겨 좌전안타를 쳐낸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메이저리그(MLB)에서 11년을 뛴 다르빗슈는 지난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소속으로 16승(8패) 평균자책점 3.10을 기록한 특급 투수다. 37세 나이에도 빅리그에서 파워 피처로 꼽힌다. 그런 투수의 패스트볼을 통타한 순간이 이정후에겐 최고였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정후는 앞선 1회 다르빗슈로부터 때린 파울(컷 패스트볼)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시속 140㎞의 컷 패스트볼을 잡아당긴 타구였다. 스트라이크존 앞에서 휙 꺾이는 공을 쫓아가 배트에 맞혔고, 타이밍이 늦지 않아서 만족한 것 같았다. 오히려 스윙이 간결하고 빠르게 돌아서 우측 파울이 됐다.
이정후는 지난해 142경기에서 타율 0.349, 23홈런을 기록하는 등 타격 5관왕(타율, 출루율, 장타율, 타점, 안타)에 올랐다. 타격의 최정점에 선 그는 폼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KBO리그투수들보다 더 빠른 공을 던지는 빅리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준비 자세부터 임팩트까지의 과정이 더 간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1월 초 일찌감치 미국으로 떠나 폼을 수정했다. 뒤통수 근처에 형성했던 톱 포지션(배트를 잡은 두 손의 위치)을 얼굴 높이로 낮췄다. 이동발(좌타자의 오른발)을 당겼다가 앞으로 내딛는 동작도 최소화했다. “타격왕이 굳이 폼을 바꿀 필요 있느냐” “WBC를 앞두고 모험을 거는 거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이정후는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평가전에서 좋은 타구가 나오지 않아도 끄떡없었다.
이정후는 단기간에 새 폼을 정립한 것 같았다. 다르빗슈로부터 우측 파울을 치기 전에도 좋은 타구를 계속 날렸다. 타격 훈련 때도 우측 파울 타구가 자주 나왔다. 더 빠른 공에도 대처할 수 있는 타이밍을 잡았다는 의미다. 그가 ‘우측 파울’을 최고의 타구로 꼽은 이유다.
이정후는 일본 기자로부터 “아버지(이종범 LG 코치)처럼 일본에서 뛰고 싶은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일단 한국에서 더 잘해야 한다. 올 시즌이 끝나고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미국에 가서 도전하고 싶은 것이 제 바람“이라고 답했다.
한국이 2라운드, 결승 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정후의 MLB 체험은 한 경기(일본전)로 끝났다. 그러나 파울 하나로도 그는 자신감을 얻었다. 한국의 참패 속에서 이정후가 쏘아올린 희망 한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