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3일 서울 잠실에서 열린 LG 트윈스-KIA 타이거즈의 경기. 벤치에 앉아있던 팀 내 최고참 투수에게 등판 준비 지시가 떨어졌다. 소속팀 LG가 1-10으로 뒤져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그는 9회 초 마지막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사실상 필승조를 아끼기 위해 투입된 것.
베테랑 투수는 실망한 기색 없이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임무를 다했다. 경기 후 라커룸에서 쉬고 있는 그에게 경헌호 투수 코치와 김광삼 불펜 투수 코치가 다가와 "쉬어야 하는데 등판시켜서 미안하다"고 했다. 패배가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그를 올린 건 예우를 다하지 않은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베테랑 투수는 오히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LG 김진성(37)은 "어렵게 얻은 기회다. 마운드에서 어깨를 풀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며 "최대한 많은 경기에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김진성은 방출의 설움을 세 번이나 경험했다. 2004년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에 입단한 뒤 1군 무대를 밟지 못하고 2006년 방출됐다. 2010년 넥센 히어로즈(키움 히어로즈)에 육성 선수로 입단했지만, 역시 1군 데뷔를 하지 못한 채 짐을 쌌다. 김진성은 2011년 입단 테스트를 거쳐 신생팀 NC 다이노스에 입단, 서른 살부터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는 2013년 1군 데뷔 후 이듬해 25세이브를 거두며 뒷문을 지켰다. 2015년부터 3년 연속 두 자릿수 홀드를 올렸고, 2017년에는 중간 계투로 10승 고지까지 밟았다. 지난해 42경기에서 2승 4패 1세이브 9홀드 평균자책점 7.17의 부진 속에 세 번째 방출을 경험했다.
30대 후반 나이에 실직한 가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김진성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9개 구단 단장이나 감독, 코치, 스카우트에게 직접 연락했다. 김진성은 "다들 '너 정도 커리어(470경기 32승 32패 67홀드 34세이브 평균자책점 4.57)라면 영입하겠다고 연락하는 팀이 있을 테니 기다리라'고 하셨다. 하지만 난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연락이 닿지 않으면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때 차명석 LG 단장이 손을 내밀었다.
LG는 지난해 불펜 평균자책점 1위 팀이다. 마무리 고우석, 셋업맨 정우영이 뛴다. 신예 이정용과 좌완 김대유까지 탄탄하다. 김진성의 시작은 추격조였다.
요즘 그는 승부처에서 자주 등판한다. 지난 1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전 1-1로 맞선 6회 초 선발 김윤식에 이어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해 1이닝 무실점으로 기록했다. 타선이 6회 말 결승점을 뽑으면서 시즌 3승째를 달성했다. 3일 롯데전에서는 1-0으로 앞선 6회 등판해 1이닝을 삼자범퇴로 처리 시즌 6홀드를 기록했다. 3일 기준으로 35경기(평균자책점 3.71)에 등판했을 만큼 마당쇠 역할을 하고 있다. 팀의 리드 여부, 점수 차에 관계 없이 기분 좋게 마운드에 오른다. 그는 "NC 불펜의 주축일 땐 이런 상황에서 내가 등판할 때가 아닌지 생각하곤 했다. LG에선 전혀 그러지 않는다. 이번 방출을 통해 밑바닥까지 떨어져 봤다. 생각이 긍정적으로 많이 바뀌었다"라고 했다. 이어 "어떤 상황에서 등판하든 자존심이 상한 적이 없다"라고 덧붙였다.
류지현 LG 감독은 시즌 초반 "김진성 덕에 마운드를 아꼈다"고 하거나 "(점수 차가 큰 상황에서 내보내)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중요한 상황에서 그를 투입했다"는 말을 더 많이 한다.
팬들 역시 김진성에게 고마움을 표현한다. 역대 48번째 500경기 출장을 달성한 김진성은 지난달 22일 팬들로부터 생애 처음으로 '커피차' 선물을 받았다. 한쪽에는 "(김)진성 선수 LG에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성)공적인 영입이에요"라는 삼행시가 적혀 있었다. 김진성은 "LG에선 야구만 잘하면 엄청나게 사랑받는 것 같다"면서 "'성공적 영입'이라는 평가는 조심스럽다. 팀 성적이 잘 나와야 그런 평가가 가능하다"고 겸손해했다.
김진성은 2020년 NC에서 뛸 때 한국시리즈 사상 최초로 6경기 연속 등판을 기록했다.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총 6과 3분의 2이닝을 던지면서 무실점, 3홀드를 기록했다. 1994년 이후 정상에 오르지 못한 LG 역시 한국시리즈 우승이 목표다. LG에서 야구 인생 2막을 연 그는 "LG에 입단할 때 '잘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직은 그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 같지 않다"면서 "팀이 한국시리즈에 오르면 온몸을 다해 던질 것"이라고 자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