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넘어서도 거포 본능을 이승엽. 박병호는 그의 등 뒤를 보며 걸어간다. 사진=KT 제공 "'넘어섰다'는 표현은 빼주세요."
'국민 거포' 박병호(36·KT 위즈)가 '국민 타자' 이승엽(46·은퇴)이 갖고 있던 홈런 기록 한 가지를 자신의 손으로 바꾼 뒤 남긴 말이다.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내심 뿌듯한 마음은 감추지 못했다.
박병호는 지난 21일 수원 NC 다이노스전 5회 말 타석에서 김태경의 포심 패스트볼(직구)을 당겨쳐 좌월 솔로 홈런을 때려냈다. 시즌 20호 홈런. 이로써 박병호는 KBO리그 역대 최초로 '9년 연속(미국에 진출한 2016~2017년 제외) 20홈런'이라는 대기록을 해냈다. 지난해 이 부문 종전 1위였던 이승엽(8년 연속)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이날 신기록을 세웠다.
박병호는 경기 뒤 "(단일 시즌) 20홈런이라는 기록 자체는 대단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동안 꾸준히 홈런을 쳤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최초 기록에 내 이름을 올린 것이기 때문에 기분이 좋다"며 담담하게 소감을 전했다. 이어 "지난 2년(2020~2021) 동안 성적이 안 좋았던 나에게 '다시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큰 (FA) 계약을 해준 KT 구단에 보답할 수 있어 다행이다. 내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 도움을 주는 김강·조중근 드 타격 코치님에게도 감사하다"고 했다.
박병호는 이승엽에 이어 한국야구 '홈런왕' 계보를 이은 선수다. 그런 이유로 홈런 기록에 관해서는 함께 거론될 때가 많다. '9년 연속 20홈런'을 달성도 이전까지 이승엽과 타이기록이었기에 더 주목받았다.
박병호는 손사래를 치며 이승엽과의 비교를 거부했다. 그는 "이승엽 선배는 그저 대단한 선수다. 함께 이름이 거론되거나 '따라가고 있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와, 내가 정말 많이 컸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더니 "홈런 기록과 관련해서는 이승엽 선배를 논외로 해야 한다. 그만큼 압도적이다. 내가 선배를 '넘어섰다'는 표현도 안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병호 이승엽은 홈런이 왜 '야구의 꽃'으로 불리는지 증명한 선수다. 그는 데뷔 3년 만인 1997년 첫 홈런왕에 올랐고, 2003시즌엔 56홈런을 때려내며 아시아 단일시즌 신기록(당시 기준)을 세웠다. 야구장은 연일 신기록 기념구 공을 잡으려는 '잠자리채 부대'로 가득 찼다. 국제대회에서도 수차례 극적인 홈런을 때려내며 국민에 감동을 안겼다.
KBO리그 개인 통산 최다 홈런(467개)도 이승엽이 보유하고 있다. 이 부문 2위(413개·21일 기준)에 올라 있는 현역 거포 최정(SSG 랜더스)은 "이승엽 선배는 일본에서도 많은 홈런(159개)를 쳤다. 내가 만약 467홈런을 넘어서도 역대 최고 홈런 타자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도 박병호처럼 단지 기록만으로 이승엽과 견주어지는 걸 바라지 않았다.
박병호도 이승엽에 버금가는 홈런 기록을 남길 수 있다. 18일 뒤면 만 서른여섯 살이 되는 그가 홈런 타이틀을 차지하면, 종전 래리 서튼(현재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보유한 역대 최고령(만 35세) 기록을 깰 수 있다. 통산 6번째 홈런왕에 오르며 현재 공동 1위(5회)인 이승엽을 다시 한번 넘어설 수도 있다.
박병호는 "나는 그저 선배가 걸어간 길을 따라갈 뿐"이라고 했다. 이승엽은 우리 나이로 마흔 살이었던 2015시즌에도 26홈런을 쳤다. 박병호도 롱런이 목표다. 그는 "이번에 KT와 계약하며 '3년 후에는 은퇴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슬펐다. 결국 40대에도 이승엽 선배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주려면 계약 기간 내 성적이 중요할 것이다. 장타력이 떨어질 수 있겠지만, 체력 관리를 잘해서 오래 선수 생활을 하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