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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갓모닝] 731. 장충단공원의 가을
1958년 9월 가을이었다. 그해 봄 서울로 전학 간 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학교에 가기가 싫어졌다. 아침에 도시락을 싸서 학교가 아닌 근방 장충단공원으로 향했다. 당시 장충단공원에는 작은 폭포와 개울이 있었다.
공주 금강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모습을 지켜본 나로선 사람은 왜 태어나는지, 내가 존재하는 까닭은 무엇인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에 대한 물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비록 초등학교 학생이었지만 정신적으로 꽤 성숙했다.
그렇게 3, 4일이 지났을까. 학교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이 됐다. 학업을 계속할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어머니께 죄송했지만 학교를 그만 둘 참이었다. 그날도 아침에 학교를 간다며 집을 나섰다. 가방에는 여전히 도시락이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도시락을 먹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내가 자주 찾는 장충단공원은 지금은 장충체육관과 신라호텔이 들어선 쪽이었다. 항상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벤치를 찾아갔는데, 담임 선생님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길진아!” H선생님이었다. 학교에 계셔야 할 H선생님이 나를 만나기 위해 장충단공원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었다. 당시 한 학급은 70~80명의 학생들로 북적였던 시절인데 학생 하나가 학교에 며칠 안 나온다고 장충단공원까지 찾아오시다니.
H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네 마음, 아픈 것은 안다. 하지만 학교는 다녀야 한다. 야단은 치지 않을 테니 내일부터 학교에 꼭 나오거라. 학교는 졸업해야 하지 않겠니?” 그 순간 뜨거운 사제의 정을 느끼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친구들이 네가 장충단공원을 배회한다고 얘기해서 일부러 와 본 거야. 그런데 공원에 있으니까 학교에 가기 싫어지는데?(웃음)” H선생님은 내 어깨를 토닥이시고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셨다.
다음 날부터 나는 다시 학교에 갔다. 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었다. H선생님의 감사한 마음 때문이었다. 이듬해 초등학교 근처에 동대문야구장이 생겼다. 처음 야구장을 구경하러 갔다가 수세식 화장실에 놀라고 말았다. 화장실 변기에 달린 줄을 당기니 갑자기 물이 자동으로 시원하게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 화장실이 신기해 몇 번이나 구경을 갔는지 모른다.
그렇게 야구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자 경동고등학교 야구팀 팬이 되었다. 1960년 청룡기, 황금사자기, 화랑기까지 석권했던 경동고등학교의 간판선수는 타격왕 백인천 선수였지만, 나는 3루수 오춘삼 선수가 더 좋았다.
오춘삼 선수는 팬들에게 잘 대해 줬다. 중학생들에게도 뭔가를 더 챙겨 주고 싶어 했다. “너 이거 가질래?”라면서 당시엔 꽤 값이 나갔던 야구공을 사인까지 해 주며 내게 주었다. 그런 모습 때문에 더욱 오춘삼 선수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됐던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은 동대문야구장과 경동고등학교 야구팀 그리고 오춘삼 선수 덕분에 무사히 이겨 낼 수 있었다.
9월이 되면 장충단공원에서 나를 기다려 주셨던 H선생님과 경동고등학교 오춘삼 선수가 떠오른다. 60년이 흐른 지금, 내가 자주 갔던 장충단공원과 동대문야구장은 많이 변해 추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시절 내 마음속을 가득 차오르게 했던 두 사람을 향한 그리움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