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디트로이트는 메이저리그의 동네북이었다. 그해 아메리칸리그 한 시즌 역대 최다인 119패(43승)를 당했다. 승률이 고작 0.265에 불과했다. 개막 후 9연패로 시즌을 시작해 1년 내내 졸전이 이어졌다. 선발투수 마이크 마로스는 9승21패를 기록했다. 1980년 브라이언 킹맨(당시 오클랜드·8승20패) 이후 23년 만에 나온 '시즌 20패 투수'였다. 마로스에 가려졌지만 신인 제레미 본더맨의 성적도 최악에 가까웠다. 19패(6승)를 기록하면서 혹독한 데뷔 시즌을 보냈다.
본더맨은 2001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26번 지명(오클랜드)을 받은 오른손 투수다. 수준급 선발 자원인 C.J. 윌슨(5라운드), 리치 힐(7라운드)보다 먼저 이름이 불렸다. 2002년 8월 삼각 트레이드로 디트로이트 유니폼을 입었고, 이듬해 곧바로 빅리그에 데뷔했다. 디트로이트 구단 수뇌부는 마이너리그 상위 싱글 A에서 뛰고 있던 본더맨을 2003년 개막전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시켰다.
기대가 악몽으로 바뀌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로스와 함께 '동반 20패 투수'가 될 뻔했다. 앨런 트란멜 감독과 밥 클럭 투수코치는 신인이었던 본더맨의 투구 이닝을 170이닝으로 제한했고, 시즌 말미에 불펜 투수로 기용해 시즌 20패를 막았다. 1973년 윌버 우드(24승20패)와 스탄 반센(이상 시카고 화이트삭스·18승21패) 이후 처음으로 한 팀에서 20패 투수가 2명 나오는 불상사를 피했다.
불운과 부진이 겹쳤다. 본더맨은 6이닝 이상을 소화한 15경기에서 5승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19패 중 8번은 퀄리티스타트(선발 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를 달성하고도 패했다. 하지만 좌절은 없었다. 2003년 '경험'을 바탕으로 디트로이트 중심 투수로 성장했다. 2004년부터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따냈고, 2005년에는 개막전 선발로 나섰다. 2006년엔 월드시리즈 무대까지 밟았다. 그는 2006년 10월 지역 언론과 인터뷰에서 "항상 빅리그에 있길 원했다. 내가 배울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기 때문이다"며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해했다"고 말했다. 결과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패배를 바라보는 태도는 고영표도 비슷하다. 고영표는 8일까지 11패(5승)를 기록해 팀 동료 돈 로치와 함께 리그 최다패 투수다. 201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1라운드 지명을 받은 유망주. 1군 데뷔 3년 만에 선발로 풀타임 시즌을 소화 중이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녹록하지 않다. 6일 수원 SK전(7이닝 2실점)에서 승리하기 전까지 무려 84일 동안 승리가 없었다. 그 기간 12경기에서 8패만을 기록했다.
위축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SK전 이후 그는 "패배를 하면서 독기와 오기가 생겼던 것 같다. 득점 지원은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해야 하는 부분에만 집중했다"며 "패배가 쌓여도 초조한 건 없다. 타자에게 맞아 일찌감치 마운드를 내려가고,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해 강판됐다면 위축됐을 텐데 그게 아니었다. 5~6이닝은 채웠기 때문에 결과에 연연하지 않았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김진욱 kt 감독은 장기적 플랜을 짜고 고영표를 선발투수로 육성 중이다. 계속 기회를 주고 있다. 김 감독은 "비록 승 수가 많지는 않지만 고영표가 꾸준히 제 몫을 해 주고 있다"며 "매번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많은 고민들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기억들이 모여 더 좋은 투수로 발전해 나간다"고 독려했다.
자질은 충분하다. 본더맨은 위력적인 슬라이더를 던졌다. 패스트볼과 조합해 땅볼 유도를 능숙하게 해냈다. 사이드암인 고영표는 체인지업으로 땅볼을 이끌어 낸다. 여기에 완벽에 가까운 제구력까지 갖췄다. 규정 이닝을 채운 선발투수 21명 중 볼넷 허용이 가장 적다. 9이닝당 볼넷이 1.03개. 그는 "이왕이면 안타를 맞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긍정적으로 타자와 승부를 한 게 적은 볼넷의 원동력인 것 같다"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