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없는 개봉지연은 없다. 한 해 수 십편, 많게는 100편이 넘는 크고 작은 영화들이 충무로에서 쏟아져 나온다. 제작 단계부터 기대치를 한껏 끌어올리는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이런 영화는 대체 왜 만들지?'라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도 있다. 물론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것이고 결과는 제각각이다. 100억 대작이 '폭망'하는 경우도, 저예산 영화가 1000만 돌파 못지 않은 '대박'을 치는 경우도 우리는 그 동안 많이 봐 왔다.
영화는 많고 비집고 들어갈 틈바구니는 한정적이다. 어떤 영화라고 좋은 시기에 자리잡고 싶지 않을까. 제작부터 개봉까지 쉼없는 지원사격을 받으며 엘리트 코스를 밟는 작품 뒤편에는 밀리고 밀려 얌전히 개봉 순서를 기다려야만 하는 일명 '창고행(行) 영화'가 수두룩하다. "그 영화 왜 개봉 안해? 결국 창고로 들어갔대?"라는 말은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이야기다.
이유는 다양하다. 내부 시사 결과 재미가 없거나, 완성도가 떨어지는 등 자체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메르스 등 에상못한 사회적 문제나 천재지변 등으로 인한 분위기 변화로 일단 개봉을 미루는 경우도 상당하다. 주연 배우의 개인적인 사유가 원인이 되는 경우는 가장 치명적이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개봉이 지연 된 영화 중 '대박 흥행'에 성공한 작품은 손에 꼽을 만한 정도라 배급사, 제작사들은 '개봉지연', '개봉표류'라는 선입견이 씌어지는 것을 극도록 꺼려한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개봉이 지연될리 없고, 작품이 잘 나왔다면 '개봉 새치기'는 사실상 일도 아니다. 상업영화의 1순위 목표는 흥행이고 결국 장사다.
▶'협녀'·'탐정홍길동' 등 1년 개봉지연…결과는 '실패' 2012년 비 신세경이 주연으로 나섰던 'R2B: 리턴 투 베이스'(김동원 감독)는 완성도 등을 문제로 개봉시기 조율 끝에 1년간 창고에서 숨죽이고 있다 꺼내진 대표적 사례다. 흥행은 당연히 실패. 100억대가 투자 됐음에도 누적관객수 120만 명을 겨우 넘기면서 영화에 얽혀이던 여러 관계자들이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사태를 만들기도 했다. 2014년 '협녀, 칼의 기억'(박흥식 감독)은 주연배우 이병헌의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개봉이 미뤄진 것으로 유명한 작품. '협녀, 칼의 기억' 역시 당초 개봉을 예정하고 있던 시기보다 약 1년이 지난 시기 겨우 스크린에 내걸었지만 누적관객수 50만 명이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는 굴욕을 맛 봤다. 이와 함께 5월 개봉한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역시 어마어마한 CG 작업으로 개봉이 차일 피일 미뤄졌고 편집에 편집을 거쳐 완성도를 높이는데 애썼지만 손익분기점은 넘기지 못했다.
▶"시간이 약" 나홍진 '곡성' 이례적 성공 물론 개봉이 지연됐다고 해서 100% 흥행 실패로만 이어진다고는 말 할 수 없다. 시간이 약이 돼 성공한 케이스도 있다. 5월 스크린을 삼킨 '곡성'(나홍진 감독)은 칸 국제영화제 출품을 위해 개봉을 미루는 초강수를 뒀다. 기획부터 제작, 촬영, 개봉까지 무려 6년을 '곡성'에 매달려 있던 나홍진 감독은 시간을 결코 허투루 쓰지 않았고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탄생시키는데 성공, 호평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또 촬영 후 배우가 대거 교체되는 초유의 상황을 이겨낸 '연평해전', 역시 CG 작업으로 개봉이 밀린 '히말라야' 등은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호불호 갈린 평가와 달리 흥행에는 성공했다. 잘나왔다 소문은 자자했지만 '협녀, 칼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이병헌 때문에 개봉이 밀렸던 '내부자들'(우민호 감독)은 소문에 걸맞게 스크린을 압도하며 '이병헌이 살리고, 이병헌을 살려낸 작품'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NEW 개봉표류 '루시드 드림' 1월 개봉확정…'판도라' 고심 현재도 망망대해를 표류 중인 작품은 많다. 그 중 올해 '부산행'으로 1000만 꿀맛을 본 NEW는 여러 편의 개봉표류 영화로 인해 골머리를 썩고 있다. 다행히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져 개봉 시기를 전혀 잡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박유천 이슈까지 터지며 두 손을 놓아버려야 했던 설경구 고수 주연 '루시드 드림'(김준성 감독)은 2017년 1월 4일 개봉일을 확정, NEW의 새해 첫 영화로 포문을 열게 됐다. 개봉 지연의 주 원인을 박유천에게 뒤집어 씌우면서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볼만한 영화'로 편집 됐다는 입소문이 퍼지고 있다. 개봉 후 웃게 될지 울게 될지는 미지수.
김남길 김명민이 주연을 맡은 '판도라'(박정우 감독)는 원자력 발전소에 위기가 닥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재난 블록버스터로 투자부터 난항을 겪더니 1년째 개봉일을 잡지 못한 채 눈치를 보고 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룬데다가 경주 지진까지 발생하면서 이래저래 한숨은 늘어가고 있다. 관계자에 따르면 더 이상 개봉일을 미룰 수는 없어 오는 12월 혹은 1월 개봉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하지만 NEW는 연말 영화로 정우성 조인성의 '더킹' 개봉을 내부적으로 확정지은 상태. 두 작품 모두 100억 이상이 투자된 대작이기에 섣부른 집안 싸움을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 성격은 다소 다르지만 중국에 고액을 받고 판권을 판 '부산행'은 사드 배치 등의 여파 때문인지 대만, 홍콩 등 주변 국가에서 개봉해 폭발적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있음에도 대륙 개봉은 감감 무소식. 여기에 영상마저 불법 유포되면서 씁쓸함을 남겼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몇몇 이들은 '조금 더 손보면 낫겠지, 조금 더 품에 안고 있으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에 영화를 꽁꽁 묶어두려 하는 경향이 있다. 하다보니 점점 산으로 가는 작품도 있지만 애초 첫 단추를 잘못 꿴 작품들은 사실상 회생이 불가능하다"며 "작품에도 운이 있고 흥행도 천운을 타고 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말 많은 작품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기대치가 떨어지면, 실망으로 이어지더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