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이형석의 리플레이] 고우석 "창피했던 2년, 마지막이라는 심정의 2019년"
잠실구장에 사이렌이 울려 퍼지면 LG 고우석(21)이 마운드에 오른다. 사이렌 소리는 이제 고우석의 '트레이드 마크'다. 리그를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는 자신의 등판을 상징하는 등장 음악을 하나씩 갖고 있다. MLB 최초 통산 600세이브를 돌파한 트레버 호프먼은 밴드 AC/DC의 '지옥의 종소리', 통산 652세이브를 올린 마리아노 리베라는 메탈리카의 '엔터 샌드맨'을 썼다. KBO리그 최다 세이브 1위 오승환은 NEXT의 '라젠카 세이브 어스'를 등장 음악으로 사용했다.고우석의 등장 음악은 드라우닝 풀의 '솔저스'로 인트로 부분에 나오는 사이렌 소리가 인상적인 곡이다. 원래 봉중근이 상대 타자의 기를 죽이기 위해 사용한 곡인데, LG는 이 곡을 고우석에게 물려줬다.이제 막 마무리 투수로 뛴 지 4개월이 된 최연소 마무리 투수에게는 엄청난 영광이다. 그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 설레고 흥분된다. 무언가 압도하는 분위기를 낸다"고 했다. 요즘에는 그 감흥이 더욱 특별하다. 고우석은 "예전에는 마운드에 오를 때 음악이 흘러나왔는데, 요즘은 (등판이 확정되고) 불펜에서 마지막 공을 던질 때 응원석에서 사이렌 음악을 틀어준다"며 "등판 전에 사이렌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더욱 좋다. 봉중근 선배님이 등장 음악을 물려준 것에 대해 더욱 좋아하시더라"고 웃었다.LG가 젊은 신예 투수에게 등장 음악을 물려준 것은 그만큼 기대감과 함께, 고우석이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의 등장에 든든함을 느낀 LG 팬들은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면 환호성을 내지른다.고우석은 21일 현재 8승2패 23세이브를 기록하고 있다. 4월 말, 정찬헌의 부상 이탈로 마무리 바통을 넘겨받은 그는 세이브 부문 3위에 올라 있다. 평균자책점(1.42)과 이닝당 출루허용률(WHIP·1.07)은 10개 구단 마무리 투수 중 가장 낮다. 마무리 투수로 보직을 변경한 뒤 총 25차례의 세이브 기회 중 블론 세이브는 두 번으로 적은 편이다. 고우석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운도 따라주고, 기록도 더 잘 나오고 있다"고 겸손해했다.여러 기록 가운데서도 낮은 WHIP에 만족한다. 그는 "중간계투로 시즌을 맞기 전에 이닝당 출루허용률을 낮추고 싶다고 얘기했다. 운이 따르지 않을 수 있는 피안타와 달리 볼넷과 삼진, 몸에 맞는 공 등 내가 억제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낮추고 싶어서였다"며 "다행히도 좋은 결과가 나오고 있다"고 웃었다.고우석은 포심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150㎞를 넘는다. 자신도 "가장 큰 무기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150㎞ 이하의 직구를 던진 적이 거의 없다. 마무리 투수에게 필수조건으로 여겨지는 '강속구'에 '강심장'을 더해 9이닝당 탈삼진이 10.42개에 달한다. 10개 구단 마무리 투수 중 최고 수치다. 상대 타자 입장에선 직구를 던질 줄 알면서도 타이밍이 늦어 헛스윙하거나, 여기에 슬라이더까지 염두에 둬 머릿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그는 "투구는 전적으로 포수의 사인대로 던진다. 직구를 10개 연속 던질 때도 마찬가지다"며 "포수가 타자 타이밍을 간파해 상황별로 사인을 낸다. 나는 (유)강남이 형과 (이)성우 형의 사인을 통해 포수의 생각을 읽고 던진다. 그게 호흡인 것 같다"고 말했다.입단 3년 차 고우석은 2017년 LG 1차지명 투수다. 두산·키움과 함께 순번을 정해 첫 번째 지명권을 행사하는, 유망주가 가장 많은 수도권에서 LG가 그해 가장 먼저 선택한 선수다. 그만큼 고우석을 향한 기대감은 넘쳤다. 하지만 2017년 25경기에서 승패 없이 1홀드 평균자책점 4.50, 지난해엔 56경기에서 3승5패 3홀드 평균자책점 5.91로 기대에 못 미쳤다. 고우석은 "창피했다"고 한다. 또 "자만했다"고 반성했다. "2018년 시즌 전에 '기회만 오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자만 아닌 자만을 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내가 너무 못했다. 코칭스태프에서 왜 나를 기용할 수 없는지 깨닫게 된 시즌이었다. 그동안 잘한다고 여겼던 나 스스로가 너무 창피하고 한심했다. 지난 2년간 나름 열심히 했지만, 간절함이 있었다고 말할 순 없다. '내가 가진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우석은 벼랑 끝 심정으로 2019년을 준비했다. 그는 "선배들은 아직 젊으니 한 단계씩 밟고 올라가면 된다고 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2019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팀에 기여하지 못하면 '끝일 수도 있겠다'라고 여겼다"고 한다.올해부터 최일언 코치와 지도를 받는 점도 "큰 행운이다"고 말했다. 그는 "좋은 감독님과 코치님을 만났다. 최일언 코치님은 기술보다 마운드에서 마음 편히 공을 던지도록 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볼이 되더라도 코치님이 원하는 모습을 보이면 박수 쳐주며 '이렇게 해야 된다'고 칭찬해 주셨다. '끝내기로 10번을 져도 상관없다. 네 공을 던져라'고 하셨다"며 "한두 달 지나니 자신감이 생겼다. 귀를 열고 듣게 됐다. 전에는 '내 공이 통할까'라는 생각이 많았다. 볼넷이 줄어든 원동력이다"고 고마워했다. 9이닝당 볼넷이 3.95개로 조금 높은 편인데, 마무리 투수로 옮긴 뒤엔 종전 6.91개에서 2.95개로 확 줄었다. 고우석은 LG 투수로는 2014년 봉중근 이후 한 시즌 30세이브에 도전한다. 하지만 팀 성적을 우선으로 여긴다. 그는 "30세이브를 올리면 좋겠지만, 팀이 가장 많이 이기는 게 첫 번째다. 팀이 많이 승리하면 세이브 기록은 따라온다"며 "30게임을 남겨 놓았는데 최대한 많은 경기에 등판해 부상 없이, 내 구위를 유지하며 시즌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다짐했다. 프리미어 12, 올림픽 등 대표팀 승선 여부에 대해서도 "매 경기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를 통해 성적과 명예가 따라올 수 있다"며 크게 욕심내진 않았다.LG는 20일 현재 62승51패1무의 성적으로 4위에 올라 3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이 유력하다. LG가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는다면 고우석에게는 첫 가을야구다. 그는 "일단 (가을야구에서) 블론을 해선 안 된다"며 "항상 나쁜 상황부터 머릿속에 넣고 있다. 기분 좋은 생각만 가지면 놓치는 게 많아서다. 그래도 5전 3선승제 승부에선 3세이브, 한국시리즈에선 4세이브를 하고 싶다"고 당차게 말했다. 이형석 기자 lee.hyeongseok@joongang.co.kr
2019.08.22 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