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죽여주는 여자'(이재용 감독)가 개봉 5일 만에 5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례적으로 중장년층 관객들이 관람 열풍을 보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노인 성매매, 안락사 등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뤘음에도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그 중심에는 노련한 연기력으로 공감대를 높인 '죽여주는 배우' 윤여정(70)이 있다.
이재용 감독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덜컥 출연을 결정했다. 다만 '알고싶지 않았던 현실'을 맞닥 뜨리고 일명 '박카스 할머니'라 불리는 캐릭터를 직접 연기하면서 우울증을 앓았다. 툴툴거리며 거침없는 입담을 뽐내기로는 충무로 1인자.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애정과 소녀감성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인터뷰 ①에서 이어집니다.
-청청 패션까지 소화했다.
"이재용 감독이 청재킷에 판타롱 스타킹을 '강추'했다. 관객들에게 시대에 대한 혼돈을 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감독이 주장하기를 이 여자가 젊었을 때, 그러니까 스물 몇 살 때 동두천에서 일하면서 파란만장한 전성기 시절을 보냈을 것이라고 하더라. 아이까지 낳을 것을 보면 나름 희망도 있었을 것이고."
-가장 예뻤던 시절을 추억한다는 의미일까.
"그렇지. 그냥 그 시간에 머무르고 싶을 수도 있고. 비루한 자존심이 있을 수 있지 않냐. '난 이런 일을 하지만 당신들하고 달라. 난 달라' 그게 너무 슬펐다. 하루 2만원, 3만원을 벌고 손님이 없으면 공치는 날도 많다. 그런 와중에 자존심을 표현하고 싶지 않았을까."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를 데려가는 것도 떠나보낸 자식 때문인가.
"죄의식이 발동한 것이다. 집주인이고 함께 사는 청년이고 내가 그 아이를 데려갔을 때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다들 서럽게 사는 사람들이니까 상황을 딱 보고 아는거지. 아마 TV드라마였으면 2회 분량은 나갔을 소재다. 근데 영화는 한 큐에 끝냈다. '왜 데려왔어?' 한 마디 없다. 그게 좋더라. 공동체 느낌도 들고."
-궁시렁 궁시렁 툴툴거리는 대사는 애드리브였나.
"이재용 감독 특유의 유머와 짜증이다. 이재용 감독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뭔 줄 아나? '고객님 커피 나오셨습니다' 이거다. 커피를 시킬 때마다 '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이냐. 무슨 어법이냐. 대한민국 이상하다. 커피가 나오셨다니'라면서 막 짜증을 낸다. '계산 도와드릴까요?' 이 말에도 '대신 해줄 것도 아니면서 도와주긴 뭘 도와줘' 이런다. 본인 경험에서 우러나온 대사들이다."
-공원에서 또 다른 박카스 할머니와 싸우는 신도 재미있었다.
"난 애드리브를 잘 못하는 배우라서 굳이 나서서 하지는 않는다. 그 장면도 애드리브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쓰여져 있는대로 연기했다. 촬영을 하면서 실제로 그 일을 하는 분들을 봤는데 어떤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 물론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이재용 감독도 리서치가 부족했다고 말하던데.
"굉장히 힘든 일이라고 하더라. 마음을 쉽게 열지 않으니까. 근데 그렇지 않겠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서 '내가 이 일을 왜 하게 됐고, 지금은 이렇다'고 말하는 것이 쉽겠나. 말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우리 스태프들도 멀리서 지켜보며 참고 정도만 했다고 하더라."
-그렇게 큰 일을 저질러 놓고 홀연히 현장을 빠져 나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당연히 잡힐 줄 알고 그런 것이지. 그 여자는 머리 좋은 여자가 아니다. 아마 감독에 들어가고 싶었을 수도 있다. 일부러 가려는 사람도 많다더라. 살기 힘드니까. 감옥에 가면 먹여주고 재워 주기는 하니까. 베니스에서 영화를 상영했는데 처음엔 '이 사람들이 이 내용을 이해할까?' 싶었다. 근데 몇몇 장면에서는 웃기도 하더라.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우리보다 더 앞서 있는 것 같았다."
-'죽여주는 여자'를 촬영한 후 달라진 생각이 있다면.
"이제 슬슬 인생을 정리해야 할 때가 됐다는 것?(웃음) 70살이니까. 옛날 같으면 벌써 밀려났을 뒷방 할머니다. 고령화 시대가 됐으니 이렇게 일도 하고 있는거지. 엄청난 축복이고 매일 감사하다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나도 일을 못하게 될 때가 오지 않겠냐. 그 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고."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
"일을 하던 사람이 못하게 되면 일단 자존감이 없어진다. 윤여정이라는 배우로 살아온 세월이 많기 때문에 그걸 못하게 됐을 때 내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다. 해결 안 되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위스를 가 볼까 생각하기도 했다.(웃음) 친구들끼리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두 부류로 나뉜다. '죽는 얘기를 왜 지금부터 해!'라고 투덜거리는 부류와 '정신이 있을 때, 판단력이 있을 때 대비하자'는 부류다. 의견이 분분하다."
-이재용 감독에게 고마운 부분도 있을 것 같다.
"상업 영화면 이런 주제를 절대 못 다룰 것이다. 나 같은 할머니를 내세워 영화를 찍지도 않을 것이고. '죽여주는 여자'는 KAFA라고 영화 아카데미의 지원을 받아 찍은 작품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감독이 관심을 가져주고 날 써줘서 고맙긴 하지. 너무 괴롭혔지만. 한 번은 나에게 투자를 해서 노인 영화를 찍으라고 하길래 '미쳤냐'고 했다. 그렇게 돈 다 날리면 노후는 어쩌라고. 날 길바닥으로 내볼려고 하는 것 같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