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8일 "국제 밀 시세에 맞춰 라면값을 적정하게 내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라면 제조사들에게 가격을 내리라고 신호를 보낸 셈이다.
부총리가 정조준해 가격 인하를 요청하니 라면 업체들의 고심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말이 '요청'이지 협조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준다는 암묵적인 전제를 깔고 있어서다. 세무, 위생, 노무 등 정부의 무기는 다양하다. 이는 기업과 주주의 이익을 훼손한다.
실제 부총리 발언 이후 하루 만인 19일 농심은 전 거래일 대비 2만6500원(6.05%) 빠진 41만15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삼양식품은 8900원(7.79%) 빠진 10만5400원, 오뚜기는 1만3000원(2.94%) 낮아진 42만8500원에 거래가 종료됐다.
그렇다고 가격을 내리기도 쉽지 않다. 국제 밀 가격이 최근 안정화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맞지만, 평년에 비하면 여전히 높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에 지금도 원가 부담은 여전하다는 것이 업계의 주장이다.
업계 관계자는 “가격이 올랐을 때 사 둔 밀 재고분이 3~6개월치가 남아 있어 이를 먼저 소진해야 한다”며 “밀값 상승과 라면 가격 인상에 시차가 있었던 것처럼 인하에도 시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 역시 “국제 밀 가격이 하락했어도 제분회사가 밀가루 가격을 인하하지 않고 있는데, 라면 회사만 비난하는 것은 억울하다”며 “또 라면의 다른 원료인 전분, 설탕 등 다른 원재료 가격은 여전히 상승 중이며, 인건비·물류비 등 기타 제반 비용도 올라 당장 가격 인하에 나서기는 어렵다”고 했다.
다만 업체들은 라면이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라는 점을 고려해 국민 부담을 경감하기 위한 방안을 다각도로 검토하겠다고 전했다.
급등하는 물가를 잡기 위한 관권 개입은 일정 수준에서는 서민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을 역행하는 과도한 개입은 시장 왜곡을 부른다. 예컨대 밀 가격이 상승하면 라면 가격이 올라 라면을 덜 먹어야 밀 수입과 무역적자를 줄일 수 있다. 라면 가격을 못 올리면 기업은 라면의 용량을 줄여 대응한다. 소비자 만족도가 감소함은 물론이며 시설 조정, 포장지의 제품 설명 수정, 내부 교육 등 비용도 소모된다.
또 정부의 가격 인하 압박은 정부에 의한 물가 억제가 가능하다는 기대를 국민에게 심어준다. 정부의 가격 개입은 잠깐은 성공할 수 있어도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국민이 정부에 과도한 기대를 하면 결국 정부에 실망하게 된다. 그러면 정부는 더 무리한 일을 시도하게 된다. 정부는 자신이 만능이 아니라는 점을 국민에게 고백해야 한다.
서민들의 고통 경감이 중요하더라도 지나친 시장 개입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된다는 얘기다.
더욱이 윤석열 정부는 '자유'와 '시장경제'를 핵심 가치로 내걸었다. 과도하게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이런 가치와도 어긋난다. 힘들 때일수록 원칙을 지켜야 한다. 고물가를 잡으려면 가격통제의 유혹에서 벗어나 경쟁 촉진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