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고 소박한 이야기가 과연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지 기획단계부터 많은 분들의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흥행을 예측하기가 힘들었어요.”
인기리에 종영한 JTBC 드라마 ‘나쁜엄마’의 극본을 맡은 배세영 작가의 설명이다. 배 작가의 말처럼 새로운 소재와 장르의 콘텐츠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모성애, 시한부 등 ‘나쁜엄마’의 주요 요소들에 진부하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나쁜엄마’는 익숙한 소재에 따뜻한 감동을 듬뿍 녹여내며 호평을 받았다. 배 작가는 최근 일간스포츠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나쁜엄마’의 출발점, 소회 등을 전했다.
‘나쁜엄마’는 자식을 위해 악착같이 나쁜 엄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엄마 영순(라미란)과 뜻밖의 사고로 아이가 돼버린 아들 강호(이도현)가 잃어버린 행복을 찾아가는 내용의 드라마다. 지난 4월 3.6%(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로 첫발을 내디딘 후 상승세를 이어가다가 지난 8일 자체 최고인 12.0%를 기록하며 마침표를 찍었다.
드라마의 출발점은 무엇이었을까. 배 작가는 집필 당시 암 의심 소견을 받고 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며, 남겨질 아이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세상을 먼저 떠나야 하는 부모의 마음을 떠올린 것이 ‘나쁜엄마’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길고 짧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어찌 보면 사람은 모두가 시한부 인생이고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을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야 하죠. 부모라면 누구나 극중 영순과 같은 처지인데 그렇다면 ‘나는, 아니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떠나야 할까’, ‘만약 그 자식이 몸도 정신도 성치 않다면, 도움을 청할 가족 하나 없다면?’ 이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어요.”
‘나쁜엄마’는 배 작가의 첫 드라마다. 배 작가는 ‘바람 바람 바람’, ‘원더풀 고스트’, ‘완벽한 타인’, ‘극한직업’ 등 10여 년간 스크린 흥행작들을 집필한 바 있다. 당초 ‘나쁜엄마’ 또한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 시나리오로 기획됐다고 뒷얘기를 전했다.
“엄마에게 시한부 설정을 둔 것은 신파에 기댄 감정적인 이유가 아니라 영화, 드라마의 제한된 상영시간 내에서 엄마가 할 수 있는, 아니 해야만 하는 것들을 빠르고 집약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타임리미트가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복수의 플롯과 극중 강호, 미주(안은진)의 로맨스 서사는 영화 시나리오에서 드라마 대본으로 바뀌면서 여러 다양한 서브 플롯이 필요해졌고 그것을 구성하는 가운데 새롭게 등장하게 된 서사예요.”
배 작가는 ‘나쁜엄마’가 큰 사랑을 받은 가장 큰 이유로 라미란, 이도현 등 배우들의 연기력이었다고 공을 돌렸다. “작품을 쓰면서 머릿속에 그려 본 캐릭터가 원래 어떤 캐릭터였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영순, 강호, 미주에게 빠져 있었다. 눈빛, 표정, 말투, 무심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완벽하게 영순, 강호, 미주였다”며 “조우리 마을 사람들은 정말 대본에 저런 인물들을 썼나 싶을 정도로 세상 둘도 없을 개성 있는 연기들을 보여줬다. 조우리는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 연기 배틀의 장이었다”고 치켜세웠다.
극중 영순은 홀로 세상에 던져질 강호를 위해 나쁜 엄마를 자처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드라마가 끝난 후 ‘과연 영순이 작품 제목처럼 나쁜 엄마였을까’하는 물음표를 던지며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이야기를 직접 엮어 나간 배 작가에게 영순은 어떤 엄마였을까.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를 나눌 수 있는 정형화된 기준은 없다고 생각해요. 좋은 사랑, 나쁜 사랑이 없듯이 말이죠. 아무리 자식 입장에서 좋은 엄마였다고 말해도 엄마는 결국 자신이 나쁜 엄마였다고 말 할 거예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보편적으로 나눌 수 있지만 ‘엄마’라는 두 글자가 붙는 순간 좋거나 나쁘다는 개념은 모호해 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드라마의 영어 제목이 ‘더 굿 배드 마더’(The good bad mother)인 이유예요.”
배 작가는 결말에 대해 높은 만족감을 드러내며 “보통의 시한부 이야기처럼 마지막이 우울하거나 침울하지 않고 작은 축제처럼 표현한 것은 죽지 않는 게 행복한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죽음,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는 죽음, 행복하게 눈 감을 수 있는 죽음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나쁜엄마’를 통해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넘어져야만 하늘을 볼 수 있는 돼지처럼 부모님이 죽어 남편의 소중함을 알았고, 남편이 죽어서 자식의 소중함을 알았고, 자식이 아파서 자신의 소중함을 알았고, 자신의 죽음으로 이웃의 소중함을 알게 된 영순이처럼 한가지를 빼앗아 가면 그 자리에 채워지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모두가 시련과 고난 속에서야 찾게 되고 찾아지는 그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배 작가는 ‘나쁜엄마’의 집필 기간이 3년이었다며, 그 시간보다 7주간의 방영 기간이 더 의미 있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첫 드라마가 어떤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만날 수 있을지 많은 걱정과 긴장 속에 한 주 한 주를 보냈고 매주 쏟아지는 박수와 질타 속에서 많은 위로를 받고 또 많이 성장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모든 작가들은 집필하는 과정의 고난과 고통을 견뎌내며 작품을 완성해요. 저 또한 그랬죠. 그 결과물에서 제가 바라보았던 지향점을 함께 바라봐주고 사랑해 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좀 더 두터워진 진심으로 따뜻하고 희망찬 좋은 작품으로 여러분들을 찾아 뵐게요.”
한편 배 작가의 차기작은 영화 ‘아마존 활명수’다. 아마존 원주민들이 한국의 양궁 대회에 참가하는 이야기로 오는 7월 크랭크인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