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가 2023년 신년 시리즈로 '타격은 어쩔티비(feat.김태균)'를 연재합니다.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 중 하나로 꼽히는 김태균 해설위원이 연구한 야구, 특히 타격에 대한 이론·시각을 공유합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타격의 재미, 나아가 야구의 깊이를 독자들이 함께하길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흔히들 ‘공 보고 공 치기’라는 말을 많이 한다. 타석에 서면 복잡한 생각을 멈추고, 눈에 보이는 공을 방망이에 맞히는 것에만 집중하라는 의미다. 얼마나 간명한 표현인가.
나도 ‘공 보고 공 치기’를 하고 싶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타격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가능할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투수가 던지는 공은 타자에게 점(點)으로 보인다. 잠시 후 또 다른 점으로 보인다. 이게 몇 번 반복되면 공은 어느새 포수 미트 안으로 들어가 있다. 투구가 선(線)으로 보인다면, 스윙 궤적과 만나게 하기 수월할 거다. 그게 아니어서 타격이 어려운 거다.
그러니까, 타자는 공을 보고 치지 않는다. 무슨 궤변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난 이후에는 타자가 시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다. 점(공)을 보고 투구 궤적을 예측해야 한다. 타이밍을 잡고, 스윙을 시작하고, 수정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0.4초 안에 이뤄진다. 그러니 공을 보고 칠 수 없다는 거다. 타격하기 전에 자신의 스윙을 갖춰야 하고, 공이 보이면 본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건 확고한 자기 타격이 있어야 가능하다. 타격을 완성하는 건 치열한 연구와 훈련의 결과다.
스윙은 빠르고 짧아야 한다
내가 일본 프로야구(NPB)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뛰었던 2010년 6월 ‘아베 신노스케(요미우리 자이언츠)가 김태균의 타격폼을 본보기로 삼았다’는 내용의 기사가 났다. 아베는 “김태균의 방망이가 부드럽게, 이상적으로 나왔다. 그를 보고 나도 몸 앞에 둔 배트를 (왼손 타자의) 왼 어깨에 짊어지는 자세로 바꿨다”고 했다.
일본 타자들은 대개 방망이를 얼굴 가까이에 둔다. 투수가 공을 던지면 배트를 뒤로 뺐다가(테이크백 또는 백스윙) 다시 앞으로 나가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아베도 그런 폼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 눈에는 내 론치 포지션이 특이하게 보였나 보다. 백스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파워 포지션(백스윙이 끝난 상태. 오른손 타자의 경우 오른 어깨 근처에 형성된다)에 양손을 미리 갖다 놓고선 바로 스윙을 시작했다.
물론 배트가 뒤로 갔다가(힘을 모았다가) 앞으로 다시 나온다고 해서 스윙이 지체되는 건 아니다. 투수의 동작에 따라 타자도 리듬을 탄다.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 타자도 힘을 최대한 쓸 수 있는 자세(파워 포지션)를 만든다.
백스윙할 때 양손과 어깨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간다고 나는 느꼈다. 그래서 스윙이 무뎌진다고 판단해 테이크백을 하지 않은 것이다. 총에 비유하면 미리 장전한 채 격발했다. 군동작을 없애 파워 포지션에서 임팩트까지의 거리를 단축했다. 그리고 힙턴으로 만든 회전력을 타구에 실으려고 노력했다. 힘이 넘치던 서른 살 전후에 알맞은 폼이었다.
물론 이건 나의 방법일 뿐 정답은 아니다. 다만 타자가 이런 선택지도 갖고 있으면 좋다. 선수는 누구나 슬럼프에 빠진다. 컨디션과 체력이 매일 달라진다. 그럴 때 폼을 조금씩 수정하며 '단기 처방'을 해야 한다.
난 선수 시절 레그킥(leg kick, 앞다리를 들었다가 내디디며 추진력을 얻는 타법)을 거의 하지 않았고, 토탭(toe-tap, 앞발을 지면에 가볍게 튕기면서 하는 스윙)을 활용했다. 하체 쓰는 방법이 고정된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폼을 조금씩 바꿨다. 한 가지 폼으로 한 시즌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 투수들은 빠르고 정확한 공을 던졌다. 특히 내 약점인 하이 패스트볼을 잘 구사했다. 그런데도 내가 NPB에서 버텼던 건 빠르고 간결한 스윙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베는 스윙을 시작하기 전, 준비 자세만 보고 내 타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스윙을 하기도 전에 승부는 어느 정도 결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수 손을 떠난 공의 솔기가 타자에게 보일 때가 있다. 그걸 보고 공의 회전(구종)을 예측하고, 대응하는 게 타자의 몫이다. 훈련한 대로 몸이 움직일 뿐이다.
타격은 ‘0.4초의 예술’이다. 또 ‘0.4초의 과학’이다. 이 어려운 일을 해내려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자신의 스윙을 완성해야 한다. 그래야 전성기가 길어진다. 나이 먹는다고 스윙이 크게 변하는 건 아니다. 다만 순발력이 떨어져서 예전처럼 치지 못하는 거다. 타이밍이 늦었다고 한 박자 빨리 스윙하면 변화구에 속기 쉽다.
스트레스는 타자의 친구다
타자의 스윙은 금세 끝난다. 그렇다고 야구가 짧은 건 아니다. 한 경기 플레이 타임이 평균 3시간을 넘는다. 거의 매일, 6개월 이상 시즌을 치른다.
대신 인플레이 시간은 길지 않다. 야구 경기에서 양 팀 선수들이 던지고, 때리고, 달리는 시간을 다 더해도 30분 정도일 거다. 이런 야구의 특성을 선수는 잘 이해해야 한다. 야구 경기의 대부분은 ‘생각하는 시간’, ‘준비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
특히 성공률(타율) 3할이 목표인 타자는 7할의 실패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꽤 예민한 성격이다. 팬들에게 늘 응원만 받은 것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야구가 잘 안 되면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그럴 때 코치님이나 선배님들이 “너 요새 왜 그래? 슬럼프야?”라고 물으면 심리적으로 더 흔들렸다.
아무리 좋은 타자라도 10타수 무안타 정도를 기록하는 건 1년에 몇 번씩 겪는 일이다. 슬럼프라면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안다. 주위에서 슬럼프라는 말을 꺼내면 선수의 고민을 더해줄 뿐이다. 슬럼프에 빠졌다는 기사라도 나오면 무안타 기록이 더 늘어날 수 있다. 모른 척하는 게 도와주는 거다.
타격은 기본적으로 ‘7할의 실패’를 전제하는 기술이다. 게다가 사이클이 있다. 몇 타석에서 안타를 치지 못했다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한 시즌을 견디기 정말 어렵다. ‘내가 못 쳤다’가 아니라 ‘투수가 잘 던졌다’라면서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한다. 스트레스는 프로 선수의 친구다. 그냥 같이 가는 거다.
여러 경험이 쌓이면서 난 스트레스와 공생하는 법을 알게 됐다. 타자가 볼로 판단한 공이 스트라이크를 판정을 받으면 예민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내 타격이 어느 정도 완성된 후에는 심판 판정으로부터 꽤 자유로워졌다. 볼일 수도, 스트라이크일 수도 있는 공은 어차피 내가 노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공을 못 쳐도, 다음 공을 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 패기는 역시 반복 훈련을 통해 만들어졌다.
자, 이제 타석에 들어선다. 피로와 부상이 없는 몸으로 걸어간다. 타자의 스윙은 어느 공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단련돼 있다. 이 타석에서 못 치면? 다음에 잘 치면 된다는 배짱도 가졌다. 그걸로 이미 3할은 이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