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왼쪽) 감독이 박영현에게 투구 자세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KT 위즈 선동열(59)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선수 시절 던진 슬라이더는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구종 중 하나로 꼽힌다.
스피드는 시속 140㎞대 이를 만큼 빨랐고, 마치 커브처럼 낙폭이 컸다. 포심 패스트볼(직구)을 예상한 타자는 갑자기 꺾이는 공에 어설픈 스윙을 연발했다. 그야말로 마구.
선 감독도 슬라이더를 익히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고교(광주제일고) 1학년 때 2년 선배 방수원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좀처럼 손에 익지 않아 잠시 포기했다. 하지만 이듬해 졸업생이 되어 모교를 찾은 방수원으로부터 "공의 솔기를 잡고 직구처럼 던지되, 오른쪽 손가락에 변화를 주면 된다"는 원리를 다시 배웠다.
이후 선 전 감독은 슬라이더를 점차 자신만의 무기로 가다듬었다. 그는 체격(키 1m84㎝)에 비해 손가락이 짧은 편이었지만, 악력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솔기를 감싼 중지에 힘을 가하고, 검지는 중지 위쪽에 살짝 대기만 하는 독특한 그립이 탄생했다.
선 전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 지휘봉을 잡았던 2008년, 당시 삼성의 외국인 투수였던 톰 션이 슬라이더를 가르쳐 달라며 다가왔다. 선 전 감독은 자신의 신체조건에 맞춰서 만들어진 그립을 설명하며 "배우기 어려울 것"이라며 웃었다. 이에 앞서 권오준, 배영수, 오승환 등 삼성 주축 국내 투수들도 선 전 감독 슬라이더를 연마하는 데 실패했다고.
그런 '선동열 표' 슬라이더를 익히기 시작한 신인 투수가 있다. KT 위즈 오른손 투수 박영현(19)이다. 선 전 감독은 지난 17일부터 열흘 동안 KT 스프링캠프 인스트럭터를 맡으면서 박영현에게 슬라이더 그립을 전수했다.
박영현은 선 전 감독이 슬라이더를 처음 배웠을 때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선 전 감독은 중지에 힘을 더 줘서 던지는 방식을 박영현에게 알려줬다. 중지를 이용해 강하게 찍으면 옆으로 휠 뿐만 아니라 아래로 떨어지는 움직임도 나올 수 있다는 귀띔도 했다.
박영현은 며칠 동안 선 전 감독이 알려준 방식을 연마했다. 이미 KT 코치들 사이에서 "확실히 달라진 것 같다"는 평가가 나왔다. 박영현은 선 전 감독의 원포인트 레슨에 감탄하며 "(슬라이더는) 원래 던졌던 구종이지만, 감독님에게 배운 후 확실히 다른 느낌이 든다"라고 했다. 선 전 감독은 박영현이 역대 최고 마무리 투수인 오승환처럼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격려했다.
박영현은 2022 1차 신인 드래프트에 지명된 유망주다. 지난해 제4회 대선 고교 최동원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프로 데뷔전도 치르지 않았지만, 이미 1군 불펜 자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강철 KT 감독은 평소 "투수는 결정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박영현이 슬라이더를 체화하면 확실한 결정구를 갖고 데뷔 시즌을 치를 수 있다.
KT 구단은 지난해 캠프에도 선 전 감독을 인스트럭터로 초빙했다. 하체 밸런스가 좋지 않고, 중심 이동이 익숙하지 않았던 젊은 투수들이 선 전 감독의 지도로 성장했다. 올해는 '특급 신인' 박영현이 터닝 포인트를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