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홍은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호타준족이다. 단일 시즌 30홈런-30도루를 해낸 선수는 박재홍 뿐이다. 사진은 1996년 9월 3일 LG 트윈스전에서 역대 최초로 30-30클럽을 달성하고 환호하는 박재홍. IS 포토 한 번도 어려운 '30홈런-30도루' 클럽에 세 번이나 가입한 선수. '리틀 쿠바' 박재홍(49)이 일간스포츠가 선정한 40주년 올스타 외야수 부문 한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세대별 야구인 10명씩 총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장효조(26표), 양준혁(22표)에서 이어 외야수 중 세 번째로 많은 20표를 얻었다.
박재홍은 역대 외야수 중 세 손가락 안에 포함될 만큼 남다른 경쟁력을 보여줬다. 그는 잘 넘기고, 잘 훔쳤다. 개인 통산 300홈런을 때려낸 거포이면서, 도루를 267번이나 성공한 대도였다. 프로야구 무대에서 통산 300홈런 이상 때려낸 14명 중 200도루 이상 기록한 선수는 박재홍뿐이다. 호타준족(장타력과 빠른 발을 모두 갖춘 선수)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광주일고 시절 동기였던 김종국 KIA 타이거즈 감독은 "공·수·주에서 가장 완벽한 선수였다. 장타력까지 좋았다. 그야말로 야구 천재"라고 박재홍의 선수 시절을 돌아봤다.
박재홍이 그라운드에서 발산한 에너지는 강렬했다. '리틀 쿠바'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IS포토 광주제일고 재학 시절 4번 타자·에이스로 활약하며 특급 유망주로 평가받은 박재홍은 1992 신인 드래프트에서 해태 타이거즈(현재 KIA)의 1차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프로 무대에 바로 뛰어드는 고졸 선수는 드물었다. 박재홍도 연세대 진학을 결정했다.
대학 시절도 꽃길을 걸었다. 한국야구의 황금세대로 여겨지는 '전설의 92학번' 일원이었다. 국제대회에서 맹활약하며 1993년 국제야구연맹 올스타에 뽑혔고, 1995년 대학야구 춘계리그에서는 연세대의 우승을 이끌며 최우수선수상(MVP)·타점왕·도루왕을 거머쥐었다. 박재홍은 야구 선수로는 크지 않은 키(1m76㎝)에도 괴력을 뿜어냈다. 당시 아마야구 최강으로 평가받던 쿠바 선수들에게도 지지 않는다며 '리틀 쿠바'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박재홍은 1996년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고 프로 무대에 뛰어들었다. 신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활약을 보여줬다. 5월 5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홈 더블헤더에서 3홈런 8타점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알렸고, 이후에도 홈런과 도루를 차곡차곡 쌓았다. '왼발이 배터박스를 벗어난다'라며 부정타격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7월 16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75경기 만에 20홈런-20도루, 9월 3일 LG 트윈스전에서 프로야구 역대 최초로 30홈런-30도루까지 달성했다.
만장일치로 1996년 신인왕에 선정된 박재홍(오른쪽)이 MVP 수상자 구대성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IS포토 박재홍은 1996시즌 타율 0.295 30홈런 108타점 36도루를 기록했다. 신인 선수가 홈런왕과 타점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해 남긴 신인 선수 데뷔 시즌 최다 홈런(30개)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박재홍은 만장일치로 신인왕을 차지했고, 외야수 골든글러브도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투수 4관왕에 오른 한화 구대성과의 MVP 경쟁에서는 한 발 밀렸지만, 타자 중에서는 독보적인 퍼포먼스를 남겼다.
박재홍은 누구보다 강렬한 데뷔 시즌을 보냈다. 현재 20대 젊은 후배들이 그를 역대 최고의 외야수로 꼽은 이유다. 2021년 도루왕 김혜성은 "신인 선수가 해낸 30홈런-30도루 기록이기에 임팩트가 컸다"라고 했다. 2021년 신인왕 이의리는 "'호타준족'이라는 단어를 내가 인식할 수 있게 해주신 선배님"이라고 말했다.
2000년 골든글러브 시상식. 박재홍(아래쪽 오른쪽 두 번째)은 통산 4번째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IS포토 박재홍은 1997시즌 허리 부상 탓에 96경기밖에 뛰지 못하고도 27홈런을 때려냈다. 이 부문 리그 4위에 올랐다. 1998시즌은 30홈런 43도루 기록하며 커리어 두 번째 30홈런-30도루를 해냈다. 그해 소속팀 현대의 창단 첫 통합 우승까지 이끌었다.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데뷔 4년 차(199시즌)에 억대 연봉(1억원)을 받은 선수로 이름을 올리며 가치를 인정받았다. 2000시즌은 개인 3번째 30-30클럽 가입뿐 115타점 101홈런까지 기록하며 커리어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현대의 창단 두 번째 한국시리즈(KS) 우승도 견인했다.
거칠 것 없던 박재홍의 야구 인생에도 시련은 있었다. 2001시즌부터 잔 부상에 시달리며 앞선 5시즌(1996~2000)보다 장타력이 떨어졌다. 2003시즌을 앞두고는 KIA로 트레이드됐다. 팀 쇄신을 노린 현대는 현금 10억원과 유망주 정성훈을 받고 간판선수를 넘겼다. 현대팬은 구단의 결정에 비난을 쏟아냈다.
박재홍은 KIA에서 자존심을 구겼다. 2003시즌은 타율 0.301 19홈런을 기록하며 나쁘지 않은 성적을 남겼지만, 2004시즌은 타율 0.253 7홈런에 그쳤다. 1군 등록일수를 채우지 못해 자유계약선수(FA) 자격 취득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섰다. 2004년 12월, 투수 김희걸과 1대1 트레이드로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은 그는 2005시즌 타율 0.304 18홈런을 기록하며 재기했다. 이후 4시즌(2006~2009)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쳐내며 SK가 강팀으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 FA 계약도 두 차례 따냈다.
2012년 10월 5일 열린 박재홍의 통산 300홈런 시상식. IS포토 박재홍은 2009년 4월 23일 롯데전에서 도루를 추가하며 프로야구 최초로 250홈런-250도루에 가입했다. 하지만 300홈런-300도루는 해내지 못했다. 2012년 10월 3일 LG전에서 통산 300번째 홈런을 때려냈지만, 도루는 267개에서 멈췄다. 박재홍은 은퇴를 결정하고 해설위원으로 새 출발 하며 "남은 33개의 도루는 해설가로서 시청자 마음을 훔치겠다"라고 했다. 2013년부터 지금까지 방송사 해설위원으로 현장을 누비고 있다.
선수 시절 박재홍과 한솥밥을 먹은 정경배 SSG 랜더스 코치는 "30-30클럽에 3번씩 가입할 선수가 앞으로 몇 명이나 나올 수 있을까. 그가 남긴 기록의 가치는 정말 크다"라고 했다. 실제로 2000년 박재홍 이후 이 기록을 해낸 국내 타자는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