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현지시각) 독일 볼프스부르크에서 열린 폭스바겐그룹 '파워데이' 행사에서 헤르베르트 디스 폭스바겐그룹 회장이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폭스바겐코리아 제공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이 앞다퉈 전기차 '배터리 독립'을 선언하고 있다. 자체 개발 배터리를 활용, 전기차 생산 비용을 낮추기 위해서다. 폭스바겐은 물론 테슬라·GM·토요타까지 자체 배터리 개발에 뛰어들었다. 중요한 고객이 떨어져 나갈지 모른다는 우려에 배터리 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가운데 자동차 업계와 배터리 업계 간 주도권 다툼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배터리 개발 나선 완성차
22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폭스바겐은 장기적으로는 배터리를 내재화하기로 했다. 증가하는 배터리 수요에 대응하고 안정적인 공급체계를 갖추기 위해 2030년까지 유럽에 6곳의 기가팩토리를 설립할 계획이다.
폭스바겐의 모듈형 전기차 플랫폼 MEB. 폭스바겐 제공 헤르베르트 디스 폭스바겐그룹 회장은 지난 15일(현지시각) 개최한 '파워데이'에서 "2023년부터 '유니파이드 셀'이라는 표준화 배터리 제품을 선보일 것"이라며 "시간당 40GW를 생산하는 기가 팩토리를 유럽 전역에서 가동해 2030년에는 전체 전기차 모델의 80%에 탑재하겠다"고 말했다.
폭스바겐이 자체 생산하기로 한 유니파이드 셀은 LG·SK의 파우치형과 달리 각기둥(각형) 형태다. 각형 배터리이기 때문에 날렵한 스케이트보드 형태의 전기차 플랫폼에 곧장 끼워 넣을 수 있다.
배터리 내재화에 나선 것은 폭스바겐뿐만이 아니다. 세계 전기차 1위 업체인 테슬라는 지난해 독일 배터리업체 ATW오토모티브를 인수하며 자체 배터리 생산에 착수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 역시 지난해 3월 자체 개발한 배터리 및 전기차 플랫폼 '얼티엄'을 공개했다. LG에너지솔루션과 GM이 공동 개발한 얼티엄 배터리는 초기 개발 때부터 GM의 자체 플랫폼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설계됐다. 얼티엄 배터리 관련 특허 상당수는 GM이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현대차마저 배터리 자체 생산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앞서 현대차는 남양연구소 내 배터리 개발실에 전기차용 배터리 연구개발 조직을 선행기술·생산기술·배터리기술 3개 부문으로 확대·강화한 바 있다. 현대차 전기차에 최적화된 시스템을 연구하고 전해질의 액체 대신 고체를 사용하는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하기 위한 것이다. 연구인력도 대폭 보강했다.
일본 토요타 역시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전기차 업체들이 스스로 배터리 개발에 나서는 것은 비용 때문이다. 전기차의 대중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시장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가격을 낮춰야 한다고 판단했다.
현재 전기차 전체 생산원가에서 배터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30~40%에 이른다. 폭스바겐은 배터리 제조원가 절감이 계획대로 달성될 경우, 전기차 판매가격이 5% 이상 낮아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는 전기차 가격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값비싼 부품"이라며 "배터리를 더 싼 값에 자체 조달해 수직계열화를 이루겠다는 게 완성차 기업의 최종 목표다"고 말했다.
위기 맞은 K배터리
완성차 업체가 본격적으로 배터리 독자 생산에 착수하면서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삼성SDI 등 K배터리 업계는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다.
완성차 업체들이 배터리를 자체 개발하기 전까지는 국내 3사가 이끄는 배터리 업계에서 제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지만, 그 이후에는 대규모 수익원을 하나둘 잃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현재 배터리 자체 개발을 선언한 테슬라와 폭스바겐은 지난해 전 세계 전기차 판매 1, 2위 업체다. 자체 개발을 검토 중인 GM과 현대차는 3~4위에 해당한다.
어제의 고객이 경쟁자로 돌변하면서 배터리에 쏟아부은 수조 원의 투자비용을 회수하기도 전에 완성차 업체가 기술력을 따라잡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드러난다.
회사별로 온도 차는 있지만, 다들 “향후 수주 전략에 적지 않은 영향이 있을 것은 분명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변화하는 배터리 시장에서 K배터리가 입지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할 경우, 도태는 시간 문제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다만 전기차 배터리 시장이 매년 급성장하고 있는 만큼 배터리 기업들의 타격이 예상보다 크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LG화학이나 SK이노베이션 등과 기술 차이가 커서 실제 내재화까지 갈 길이 멀다는 분석도 있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현재 4%에 불과한 전기차 시장 비중은 향후 20년간 100%에 육박하게 될 것이고, 향후 10년간의 성장 속도가 가장 빠를 것"이라며 "시장이 충분히 커져 경쟁에 따라 명암이 갈린다면 모를까 현재는 그런 시점이 아니기 때문에 K배터리 업체에 대한 우려는 단기적 시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결국 관건은 품질과 가격 경쟁력에 있다"며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품질 향상과 더불어 가격을 낮추기 위한 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는 만큼 충분히 시장에서 살아남을 것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