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승무원들 전원 복직 이슈가 한창이었을 시기 손에 들어온 시나리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라는 제목부터 직설적인 이 작품을 유다인은 온전히 영화로만 받아 들이지 못했고, 현실과 직결된 우리의 이야기로 생각했다. 단순히 하고 싶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 만으로 유다인에게는 부끄럽지 않은 필모그래피가 될 전망이다.
데뷔 16년 차, 수 많은 배우들과 또 그들이 펼쳐내는 연기들 사이에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고 밝힌 유다인은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서 작지만 큰 존재감을 빛낸다. 내 주위 어딘가에 꼭 한명은 있을 법한 인물의 대표성을 띄는 캐릭터들이 유다인을 만나면 온전한 정체성으로 살아 숨쉰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살려낸 정은 캐릭터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파견 명령을 받아 하청업체로 가게 된 정은이 1년의 시간을 버텨내고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한 여정을 담았다. 극중 정은은 회사에서 인정받는 우수 사원이었지만 갑작스럽게 권고사직을 마주하고 '1년 동안 파견을 가면 다시 원청으로 복귀시켜주겠다'는 제안을 어쩔 수 없이 수락, 낯선 도전에 직면한다.
신인시절 어수룩한 모습에 스태프들의 비아냥을 귀에 담으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는 유다인은 지금도 여전히 흔들리는 순간이 많지만 극중 정은처럼 원칙과 소신을 지켜내려 노력 중이다. "정은처럼 온갖 풍파를 버텨내지는 못하겠지만, 옆에서 어떤 부정적인 말을 하든 나만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되는 것 같다. 모두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나라의 수 많은,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직업이 곧 생존과 연결된다. 유다인에게는 배우가 곧 직업이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고, 할 수 있어 감사하지만 '내 인생의 전부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유다인은 "연기를 할 때도 거창한 바람과 목표보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 편안하기를 원한다. 0이었을 때 좋은 연기가 나오는 것 같다"며 똑부러진 소신을 거듭 전했다.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다"고 말했다. "배우로서 매 작품 아쉬움이 남는건 사실이다. '저 때 조금만 더 집중해서 촬영할걸' 싶었던 순간도 많다. 육체적으로 꽤 많이 힘들었는데 그로 인해 '집중을 못했던 것은 아닌가' 후회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선택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았나. "KTX 승무원들의 전원 복직 기사와 관련 다큐멘터리가 한창 이슈와 됐을 때, 이 작품을 받았다. 영화가 영화로 온전히 안 보였던 것 같고, 그래서 조금 다르게 와 닿기도 했다. 만약 실제 사건 없이 그냥 시나리오만 읽었다면 그렇게까지 '내가 꼭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이 작품에 잘 쓰일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잘 쓰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라는 배우가 이 영화에 투입되면, 정인이라는 역할로 잘 쓰일 것 같다? 도움이 될 것 같다?(웃음) 데뷔 15년, 16년에 접어 들었는데 연기를 하다보니 내가 잘 할 수 있는게 뭔지 조금씩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캐릭터라면 잘 표현할 수 있겠다' 나에겐 정은이 그랬다. 그런 면에서도 만족한다."
-그것이 유다인의 가장 큰 강점일까. "배우 유다인으로서는 장점으로 보이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난 TV 드라마를 할 때 모습과 영화를 할 때 모습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는 영화가 더 잘 맞는 것 같다. 큰 화면에서 봤을 때 더 많은 감정이 전달되는. 그게 강점이라면 강점 아닐까."
-원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가. 그런 목소리를 작품을 통해 내고 싶다는 생각도 늘 하고 있나. "솔직히 잘은 모른다. 엄청난 관심을 갖고 살지도 않는다. 어떤 정책적인 문제들은 어렵기도 하다. 하지만 배우로서,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일정 부분 좋은 영향을 주고 싶다. 언변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이야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다만 배우이기 때문에 연기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은 하고 싶다. 그게 내 역할이자 몫이 아닌가 싶다."
-정은의 감정은 어떻게 이해하고 공감했나. "KTX 승무원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들이나, 그들의 인터뷰에 담긴 절박함을 계속 떠올리면서 연기했다. 사실 내가 정은의 상황이었다면, 나는 정은이처럼 버텨내지 못했을 것 같다. 애초부터 하청업체에 못 내려갔을 뿐더러 그냥 무기력해지지 않았을까. 계속 나를 공격만 하는데…. 어휴.(웃음)"
-정은에게 훅 빠져들었던 신이 있다면. "초반에 촬영한 신인데 시나리오를 읽을 땐 못 느꼈지만 슛이 딱 들어가고 대사를 하면서 '아, 이거구나' 했던 순간이 있었다. '일을 줘야 일을 하죠!'라고 내뱉는 장면이었다. 그 말을 직접 하면서 정은의 마음과 심정을 크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배우도 일이 없으면 그냥 쉬어야 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그런 대사들이 일정 부분 공감을 통해 와 닿았던 것 같다."
-상황은 다르겠지만, 비슷한 경험이 있나. "정은과 비교하면 내 경험은 힘든 것도 아니겠지만 데뷔 초엔 많이 있었다. 신인시절 출연했던 어떤 드라마 현장에서 감독님이 '신을 마치는 표정을 지어달라'고 주문하신 적이 있다. 근데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더라. 그래서 계속 연기를 했더니 감독님은 계속 컷을 안 하셨다. 어떻게 어떻게 신이 끝나기는 했는데, 옆에 있던 스태프 분들이 나를 향해서 '바보' '멍청이' 이렇게 말을 하더라. 다 들리게. 그 촬영을 마친 후 차 타고 가면서 엉엉 울었다.(웃음)"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조리를 겪은 적도 있나. "그렇지는 않다. 다만 어쩌면 그렇지 않게 만들어줬을 주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많이 느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주변인들에게 감사함을 더 많이 갖게 되는 것 같다. 진심으로."
-정은은 이후 어떻게 살아갔을 것 같나. "음…. 정은이라면 자기가 생각하는 원칙대로, 소신대로,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여전히 살고 있지 않을까."
-유다인은 원칙대로, 소신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나. "많이 흔들린다. 주변 사람들의 조언도 기본적으로 나를 위해, 내가 더 잘 되라고 이야기 해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흔들릴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는 내 소신과 원칙을 지키려 한다. 소신대로 걷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좋은건지 나쁜건지는 잘 모르겠다.(웃음)"
-그것이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궁극적 메시지이기도 하다. "맞다. 우리 영화도 주위에서 '넌 안된다' 등 옆에서 어떤 부정적인 말을 하든 '나는 내가 나를 스스로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된다. 적어도'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모두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영화는 직업을 생존과 연결 짓기도 한다. 지금의 유다인에게 배우는 어떤 의미일까.
"어쨌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다. 할 수 있어 감사하고. 그렇지만 '내 인생의 전부야'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한다."
-촬영내내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들었을 것 같은데. "한 달 정도 찍었다. 짧고 굵게 촬영 했는데, 촬영하면서 병원에 가장 많이 다녔던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힘들긴 정말 힘들었다.(웃음) 특히 마지막 촬영이었던 장례식장 신이 끝났을 땐 나 포함 스태프들과 배우 몇 몇이 식중독에 걸려 서울로 바로 올라가지도 못했다. 단체로 응급실에 갔고 군산 숙소에서 반나절 가량을 끙끙 앓았던 기억이 난다."
-오정세와의 호흡은 어땠나. "영화는 무거웠는데 현장 분위기가 좋았던 이유 중 하나가 오정세 선배 덕분이다. 정세 선배가 있어서 더 좋았다. '모든 촬영장에는 오정세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웃음) 일단 정세 선배는 배우로서 아이디어가 진짜 많다. 예를 들어 초반에 송전탑 올라가는 신에서, 정은은 엄청 높이까지 막 올라가는 듯 보이지만 알고보면 바닥에서 조금도 올라가지 못한 채 멈춰있다. 그 옆을 정세 선배가 연기한 막내가 '끝났어요~' 하고 무심하게 지나간다"며 "그 신은 정세 선배 아이디어였다."
-최근 대세 오브 대세가 됐는데. "이미 너무 좋은 배우, 선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세 선배가 이 영화를 한다고 해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홍보 일정도 오빠가 다 참석해줘서 너무 너무 고맙다.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게 되는 것 같다."
-연기 외 요즘 관심 갖고 있는 분야 혹은 취미가 있다면. "유튜브.(웃음) 연기를 하다보니 촬영, 편집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다. '뭔가를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그런 면에서 유튜브는 접근이 어렵지 않더라. 일단 이것 저것 열심히 해보고 있다."
-차기작은 '야행'으로 결정했다. "개인적으로 기대된다. 하정우 선배와는 '의뢰인' 이후로 오랜만에 만나고, (정)만식 선배님도 '시체가 돌아왔다' 이후 처음 뵙는다. 그때 저를 굉장히 많이 잘 챙겨 주셔서 다시 만나게 돼 기쁘다. '야행'은 어떤 한 신 때문에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작품이다. 음… 기대해 주셨으면 좋겠다.(웃음)"
-새로운 목표나 바람이 있다면. "되게 거창하거나 큰 무언가는 없다. 그저 지금 이 상태 그대로 편안하기를 원한다. 0이었을 때 좋은 연기가 나오는 것 같다. 그렇게 쭉 연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