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는 몸싸움이 없는 종목이다. 구기 종목 가운데 신체적 접촉이 거의 없는, 가장 신사적인 스포츠로 인식된다.
그런데 최근 네트를 사이에 두고 선수와 감독 간의 신경전과 감정싸움이 격화하고 있다. 프로배구 출범 후 세리머니를 놓고 이처럼 논란이 뜨거운 적이 없었다. 선수들의 감정 표현, 세리머니의 금도는 어디까지일까.
논란의 불씨는 김연경(흥국생명)으로부터 시작됐다. 지난 11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흥국생명-GS칼텍스의 경기. 김연경은 2세트 도중 상대의 블로킹에 공격이 막히자 공을 코트에 내리찍었다. 이어 5세트 14-14에서 상대의 손에 맞고 떨어진 공을 걷어내지 못하자 네트를 잡고 끌어내렸다. 이를 보고 심판진에 강력하게 항의한 차상현 GS칼텍스 감독은 경기 뒤 "(김연경에게) 어떤 식으로든 경고를 줘야 했다"며 강하게 아쉬움을 표현했다.
한국배구연맹(KOVO)은 12일 "김연경이 네트 앞에서 한 행위에 관해 제재하지 않고 경기를 진행했다. 이는 잘못된 규칙 적용이라고 판단해 강주희 심판에게 제재금을 부과했다"고 밝혔다. 김연경도 경기 후 "네트를 끌어 내린 건 과했다고 생각한다. 참아야 했는데….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곧바로 사과했다. 박미희 흥국생명 감독도 "조금 절제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KOVO가 12일 징계 내용을 발표하면서 "V리그 모든 구성원이 페어플레이 정신에 따라 리그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교육과 예방에 만전을 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에도 세리머니를 놓고 선수 및 감독 간의 신경전이 과열되고 있다.
1~2위 리턴매치가 열린 13일 KB손해보험-OK금융그룹전이 끝난 뒤 양 팀 선수들은 삿대질까지 하며 격앙된 모습을 보였다. OK금융그룹 선수단은 "노우모리 케이타가 상대 팀을 배려하지 않는 세리머니를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네트를 두고 선수들이 대치하자 감독과 심판진이 코트로 달려 나와 말렸다. 배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KOVO에 따르면, OK금융그룹의 한 선수도 4세트에서 득점을 올린 뒤 상대 팀 선수단을 향해 세리머니를 펼쳤다. 이에 KB손해보험 선수들도 감정이 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양 팀 선수들이 경기 종료 후 충돌한 것이다.
KOVO는 "경기 중 심판진이 케이타에게 '세리머니를 자제하라'고 구두 경고를 했다. OK금융그룹 선수에게 더 강력히 제재하지 않은 게 아쉽다'라고 내부 의견이 모였다"고 밝혔다.
15일 대한항공-한국전력전에서는 로베르토 산틸리 대한항공 감독이 상대 선수단을 향해 영어로 "조용히 하라"는 외침과 함께 손동작을 했다. 산틸리 감독은 "한국전력 리베로가 리시브를 받고 웃는 행위가 조롱하는 듯한 느낌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산틸리 감독의 행동에 장병철 한국전력 감독도 항의하면서 양 팀 감독 모두 옐로카드를 받았다.
스포츠에서 세리머니는 심리적인 요소다. 팀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사기를 북돋기 위한 행동이다. 팬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측면도 있다. 다만 과도하면 감정싸움으로 번진다. 세리머니는 '상대를 자극하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 내에 이뤄져야 하는 게 불문률이다.
LIG 손해보험(현 KB손해보험) 감독 출신의 문용관 KOVO 경기운영실장은 "배구에서 세리머니를 할 때 상대방이 불쾌감을 느끼지 않도록 네트를 등지고 한다거나, 눈을 마주치지 않고 세리머니를 하는 게 좋다. 또한 자극적 행동이나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귀띔했다.
한국배구연맹 규정에 '세리머니'에 대한 구체적인 처벌 및 징계 조항은 없다. 다만 세리머니는 '비신사적인 플레이'에 포함돼 적용된다. 심판은 선수가 과한 세리머니를 했다고 판단하면 구두 경고, 옐로카드, 레드카드를 줄 수 있다. 문용관 경기운영실장은 "배구는 신사적인 스포츠다. 상대에게 모욕, 불쾌감을 주는 행위를 했다면 심판이 제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KOVO는 12일 경기에서 김연경에게 구두 경고를 했고, 5세트 네트를 끌어 내린 행동에 대해 '비신사적인 행위'라고 결론을 내렸다.
선수단의 감정싸움으로 코트가 과열되자, KOVO는 시즌 중 이례적으로 머리를 맞댔다. 16일 남녀부 11개 감독(2개 구단 감독 불참)과 주부심이 모여 의견을 나눴다. KOVO 관계자는 "대개 시즌 전 이런 자리를 통해 규정 설명회를 연다. 필요에 따라 올스타 휴식기 때 개최하기도 한다"며 "최근 경기가 과열됨에 따라 이례적으로 다 같이 모였다"라고 밝혔다. 또한 KOVO는 개막 후 15일 경기까지 잘못된 부분을 되짚어보며 심판진에 "규정을 원칙적으로 적용해달라"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