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원년 개막전 '신 스틸러' MBC 청룡 유승안…"이종도 끝내기 만루포는 내가 실수한 덕"
등록2020.09.23 06:01
"제가 없었다면 스토리 진행이 안 되잖아요."
39년 전 봄을 돌아본 유승안(63) 전 경찰야구단 감독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혈기 왕성한 20대 중반. 전 국민의 시선을 모은 프로야구 출범 무대에서 대통령의 시구를 받은 그는 삼엄함 뚫고 공을 건네는 '관례'를 지켰다. 경기에서도 거침없었다. 4번 타자로 나섰고, 소속팀 MBC 청룡이 3점 뒤진 경기 후반 동점 홈런을 때려냈다. 프로 야구 출범 3호 홈런이자 1호 동점포였다.
그러나 그는 경기 뒤 그는 내쉬었다고 한다. 유 감독은 "충신이었다가 역적이 됐다"고 했다. 연장 10회 말 1사 2·3루 유리한 볼카운트(3볼)에서 투수 앞 땅볼로 물러났다. 3루 주자는 홈에서 아웃된 것.
그 유명한 원년 개막전 끝내기 만루포는 이 땅볼 아웃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당사자가 웃으며 그 시절을 돌아봤다. 극적인 드라마의 복선이나 다름없었다. 유 감독은 '욕심' 많은 선수 역할로 개막전을 빛낸 조연이었다. MBC 청룡 선발 포수로 나선 유 감독에게 역사적인 첫 경기와 1982년 그와 MBC 청룡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프로 무대가 정립되지 않은 그 시절을 '혼란기'로 규정했다.
- 프로야구 출범 소식을 들었을 때 심경을 기억하나. "당시 나는 실업 야구팀 한일은행 소속이었다. 26살로 기억한다. 20대 후반이면 은퇴 수순을 밟던 때다. 프로 무대 출범에 설렘이 컸고 '딱 5년만 뛰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는 평생 야구판에서 있게 될 줄 몰랐다."
- 프로 무대 도전을 포기한 않은 실업 선수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은퇴하면 은행 업무를 해야 했다. 적성에 맞았겠는가. 장효조, 김용달, 유두열 등 내 또래들은 그저 프로가 생겨서 좋아했다. 그러나 망설임이 있던 선배들도 많았던 것으로 안다.
- 장효조, 유두열은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 멤버다. (당시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대회 전념 차원에서 프로 입단이 유예됐다) "김재박 선배, 김시진, 임호균 그리고 최동원 등 당시 대표팀 선수들은 1983년부터 프로 무대에 합류했다. 그래서 윤동균, 김우열 선배처럼 실업 야구 스타 플레이어의 원년 합류는 희소식이었다. 일본 프로 리그에서 활약하던 백인천 감독이 우리 팀(MBC 청룡)에 와서 감독 겸 선수로 뛴 것도 많은 관심을 유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원년 무대 MBC 청룡의 전력은. "OB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다. 롯데도 괜찮았다. 삼성이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에도 스타 플레이어던 배대웅, 천보성, 김한근 선배가 있었다. 삼성이 원년 개막전을 장식하는 게 당연해 보였다."
- 역사적인 개막전에서 4번 타자 겸 포수로 선발 출장했다. "개막 전 캠프, 훈련에서 컨디션이 좋았다. 장타력도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오래 지키지는 못했다. 부상도 있었고, 백인천 감독과 갈등도 있었다. 그래도 시즌 초반 4번 출전은 주효한 게 아닐까.
- 개막전이자 출범식이었다. 당시 대통령의 시구를 받았는데. "경호가 철저했던 기억이 난다. 관중 입장 전에 관중석에 미리 자리한 사람들이 있었다. 경호원이었을 것이다. 심판 복장,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배치된 경호원도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출범 기념구를 전달하기 위해 마운드에 올라가다가 제지당하기도 했다."
- 어떻게 됐나. "결국 건넸다. 막는 사람들에게 '이건 야구에서 관례다'고 설명했다. 젊은 시절이었다."
- 당시 정순명, 하기룡 투수가 더 좋은 투수로 평가됐다. 이길환 투수가 MBC 청룡 선발 투수로 나선 배경이 있나. "백인천 감독이 일본 리그 출신 아닌가. 언더 핸드 투수가 성적을 내는 데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수준급 잠수함 투수의 공은 당시 생소했고, 공략이 어려웠다. 이길환의 공도 좋았다."
- 유종겸 투수와 배터리 호흡을 맞춘 5회 초, 선두 타자 이만수에게 출범 최초 홈런을 허용했다. "이만수가 펄쩍거리며 뛰어서 그라운드를 돌던 기억이 있다. 야구도 잘했지만, 그때부터 흥이 많던 친구다. 최초 홈런을 맞았던 상황에 볼 배합까지는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이만수의 성향은 또렷이 기억난다."
- 어땠는가. "당시에는 포수와 타자, 심판이 대화도 많이 하던 시절이다. 일종의 견제였다. 그런데 이만수는 타석은 매우 과묵한 편이었다. 자신도 포수였고, 다른 팀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면 시끄럽게 굴었으면서 말이다. 내가 계속 말을 걸면 '조용히 하세요'라며 쏘아붙이고 타석에 집중했다. 그 친구가 타격 쪽에서 일가견이 있고 성적도 좋았던 이유는 타석에서의 진지함이 아닐까."
- 유 감독도 응수했다. MBC 청룡이 4-7로 뒤진 7회 말 동점 3점 홈런을 쳤다. "삼성 투수는 좌완 황규봉 선배였다. 나는 우투수보다 좌투수 공을 더 잘 쳤다. 묵직한 공이 들어왔지만 조금 높았다. 운이 좋았다. 그래도 오른쪽 담장을 넘긴 것은 자부심이 있다. 당시에는 밀어서 담장을 넘기는 장면이 많지 않았다. 손목 힘은 인정받았다. 4번 타자니까 일발 장타를 기대받았고, 욕심을 내봤다."
- 이 홈런은 이만수, 백인천에 이어 역대 3호였다. 최초 홈런 욕심은 없었나. "그때는 기록의 중요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프로 야구가 출범했지만, 실업 야구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다. 실업 야구 때도 많은 관중 앞에서 항상 축제처럼 경기를 치렀다. 평균 기록, 누적 기록이 갖는 의미는 나중에야 알았다."
- 이 경기는 역사에 남았다. 유 감독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드라마다. "이종도 선배가 영웅이 된 건 내 도움이다. 나는 역적이 전락했고. (웃음)"
- 유 감독은 10회 말 1사 2·3루 볼카운트 3볼에서 투수 앞 땅볼을 쳤더라. "이선희 선배가 나를 (볼넷으로) 거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4구째 공이 포수 머리 높이로 오더라. 내 몸은 자동으로 움직였다. 투수 키를 넘길 수 있었는데 글러브에 잡혔다. 3루 주자가 홈에서 아웃됐다. 백인천 감독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더라."
- 덕분에 이종도에게 타석이 이어졌다. "삼성은 그 경기에서 홈런까지 친 백인천 감독을 당연히 고의4구로 걸렀다. 만약 내가 볼넷으로 출루했다면 이종도 선배까지 타석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백 감독이 해결했겠지. 이런 상황에서 기가 막힌 홈런이 나왔다. 내가 없었으면 스토리 연결이 안 되는 경기였다. 나는 경기 뒤에 한숨만 나왔다."
- 원년 기억을 조금 더 떠올려보자.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를 꼽는다면. "OB 투수 박철순의 공이 정말 좋았다. 원년에 22연승을 거둔 투수 아닌가. 미국 유학파였고 그가 던지던 너클볼은 정말 치기 어려웠다. 빠른 공 체감 구속은 시속 145㎞ 정도. 이후 최동원, 선동열이 프로 무대에 진입했다. 원년 최고 투수는 박철순이었다."
- 배터리 호흡을 맞춘 투수(MBC 청룡 소속) 중에 꼽는다면. "원년 개막전 승리 투수가 된 좌완 유종겸이다. 동기고 호흡이 잘 맞았다. 원년 얘기는 아니지만, 유종겸이 장효조에게 매우 강했던 기억이 난다. 장효조가 누구인가. 한국 야구 통산 타율 1위(0.331) 아닌가. 좌투수와 좌타자 대결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유독 강했다."
- 원년 일상도 궁금하다. 이동과 숙박은 어땠나. "굳이 비교한다면 지금은 KTX, 당시는 시외버스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길도 안 좋은 시대였다. 이동은 피로했다. 버스는 기억에 남는다. 이동하면서 회의나 담화를 나누라고 맨 뒷자리에 원형 테이블을 설치해줬다. 항상 좋은 숙소를 쓴 것은 아니다. 품위 유지에 신경을 쓴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여관에서 잘 때도 있었다.
- 룸메이트는 누구였나. "정확히는 기억은 안 난다. 지금은 선배와 후배가 한방을 쓰지 않나. 원년에는 그냥 마음에 맞는 동료끼리 합의한 뒤 매니저한테 얘기했다."
- MBC의 1982년을 돌아본다면. "솔직히 팀 워크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모래알 같았다. 좋은 선수는 있었지만, 개성이 강해서 따로 노는 편이었다. 융화되지 못하기도 했다. 6팀 중 3위였는데, 좋은 성적이라고 볼 순 없었다."
- 유승안의 1982년은. "팀과 비슷했다. 정신없었다. 프로라는 환경 변화에 완벽한 적응 못 했다. 혼란기였다. 갑자기 좋은 대우를 받고, 관심을 받는 것을 잘 흡수하지 못했다."
- 39년이 지난 현재, 포수 유승안은 경찰야구단 감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경찰야구단은 지난해 7월, 창단 14년 만에 해단했다) "아들들(KT 유원상, KIA 유민상)까지 야구를 시킨 사람이다. 한국 야구에 애정이 깊고, 걸어온 길에 자부심이 있다. 그가 중에서도 경찰야구단을 맡은 건 내 인생에 가장 잘한 일이다. 한국 야구 토양을 다지는 데 조금은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 향후 계획도 궁금하다. "여전히 야구 저변은 넓어져야 한다. 프로팀, KBO의 육성 정책 활성화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다. 프로 선수를 현역으로 경험했고, 지도자도 했다. 한국 야구 전반에 대해 진단을 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목소리를 내고 싶다."
- 현재 KBO리그에서 유 감독의 눈길을 끄는 선수는 있나. "아들들은 요즘 빌빌댄다. 아무래도 경찰야구단 출신 선수들의 행보에 관심이 많이 간다. 실력이 늘어서 소속팀으로 돌아간 양의지, 허경민 등이 지금도 활약하고 있다. KT 이대은과 롯데 안치홍이 갑자기 슬럼프가 와서 안타깝다. 두산 박건우는 지금도 잘하지만,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우타자로 성장할 수 있는 선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