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포지션이든, 정상에 올라선 선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한화 마무리 투수 정우람(35)이 그렇다.
정우람은 지난 시즌이 끝난 뒤 두 번째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얻었다. 소속팀과 나이, 경력, 성적을 불문하고 대부분의 선수들에게 차갑기만 했던 FA 시장. 그러나 정우람에게는 예외였다. 한화는 30대 중반으로 접어든 마무리 투수에게 4년의 계약 기간을 보장하고 총액 39억원을 안겼다. 무엇보다 최근 FA 선수들의 계약에 반드시 따라 붙는 '성적 옵션'을 단 하나도 달지 않았다.
베테랑 선수에게 이보다 확실한 믿음의 표현은 없다. '투수 정우람'은 굳이 옵션을 걸지 않아도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구단의 확신을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다. 정우람 역시 그 뜻을 잘 알고 있다. '무옵션'으로 얻게 되는 심리적 이점을 고스란히 마운드 위에서 결과로 돌려 주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스스로에게 매년 '자체 옵션'을 부여하고 그 수치를 이뤄내는 것. 오랜 기간 리그 톱클래스 마무리 투수였던 정우람의 약속이자 자존심이다.
지난 4년간 한결같은 안정감으로 한화의 뒷문을 지켜 온 그는 이제 다가올 4년도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앞으로 나아갈 생각이다. 정우람은 "한화가 내 마지막 소속팀이라는 생각으로 뛰고 있다. 좋은 계약은 그 와중에 덤으로 따라온 것"이라며 "남은 4년도 부상 없이 공을 던지면서 선배들, 후배들과 좋은 팀을 만들어 가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화에서 새로운 4년의 출발을 맞이하게 됐다. "계속 몸 담았던 팀이니 출발이 아니라 '연장'이다. (웃음) 지난 4년간 좋은 선수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으니, 앞으로의 4년도 그 연장선이라 생각하면서 잘 보내고 싶다. 개인 성적을 떠나 지난 4년처럼 부상 없이 계속 해나가다 보면 한화가 좀 더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18년 구원왕에 올랐지만, 지난해엔 세이브 기회 자체가 많지 않았다. 올해는 더 많이 나갈 수 있을까? "그렇다. 올해는 지난 시즌보다 더 많이 나갈 것 같다는 느낌이 온다. 젊은 선수들이 지난 2년간 여러 경험을 쌓은 결과가 이번 캠프에서 좋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2년 사이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겪었으니, 이전보다 성숙하고 앞으로 계속 그래프가 상승하는 한 해가 되지 않을까."
-한화 베테랑 선수들이 입을 모아 '젊은 선수들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어떤 점이 지난해와 가장 많이 달라 보이나. "여유가 많이 느껴진다. 스스로 어떤 방향으로 훈련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있다. 본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실력을 발휘하는 것인데, 그 '실력 발휘'를 위해 내가 캠프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선수들 본인이 어느 정도 정립된 것 같다. 또 운동할 때 집중력이 높으면서도 여유가 조금씩 묻어나오니 고참들 입장에서는 지난 2년보다 잔소리할 부분이 많이 줄었다. 또 중간급 선수들은 선배들이 잘했던 부분을 후배들에게 잘 대물림해주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어서 팀 전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FA 시장이 잔뜩 얼어붙은 가운데서도, 일찌감치 한화와 옵션 없는 4년 계약을 원만하게 마쳤다. "원하던 계약기간 4년을 보장 받았고 성적에 따른 옵션도 없으니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곧바로 도장을 찍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나. (웃음) 나이도 있고 시장 분위기도 예전하고 달라서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개인적으로 큰 욕심을 내기보다 한화에서 좀 더 오래 뛰면서 선배들, 후배들과 함께 좋은 팀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그런 마음을 가진 와중에 덤으로 좋은 계약까지 따라온 거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에 맞게 책임감을 느끼고 열심히 해야할 것 같다."
-옵션이 없어서 성적에 대한 부담을 크게 덜었을 듯하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스스로에게 옵션을 걸고 있다. 그 옵션을 달성하겠다는 마음으로 4년을 뛰려고 한다. (나만의 목표라) 정확한 수치는 공개할 수 없지만, 작은 숫자는 아니다. 대부분 생각하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잘 해야 팀에도 플러스가 되기 때문에 스스로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옵션을 정하고 뛸 것이다."
-그렇다면 '정우람 옵션'을 달성하면 어떤 보너스를 받나. "내가 나 스스로에게 상을 주면 되지 않을까. 아직 아내와 합의되지 않은 얘기이긴 하지만(웃음), 1년에 특정 금액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 나 자신에게 선물을 하면 좋을 것 같다. 나 나름의 동기 부여가 될 것 같다."
-한화에서 더 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어느 선수든 '지금 내가 소속된 팀이 나의 마지막 팀이 됐으면 좋겠다'고 바랄 것이다. 예전에 다른 팀에서 뛸 때도 그랬고, 지금 한화에서도 그렇고, 늘 그런 마음으로 야구를 해왔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언제 어떻게 소속팀이 바뀌게 될 지도 모르는 거지만, 어쨌든 내가 한 팀에 몸 담게 되는 순간 그 팀에서 내 야구인생을 마무리한다고 생각하면서 공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 잡생각 없이 내 야구를 할 수 있다."
-한화는 2018년 포스트시즌에 오른 뒤 지난해 유독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올해는 '엄지 척' 세리머니까지 만들면서 모두가 재도약을 바라고 있는데. "일단 지난해의 아쉬운 부분들을 선수들은 이제 거의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미 잊었다. 매년 그렇듯이 올해는 새로울 출발이고, 다들 서로 다른 각오는 있겠지만 더 편하고 재미있게 야구하려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 새 주장 (이)용규가 선수들을 위한 세리머니도 만들고 어린 선수들이 놀이터처럼 더 편하게 훈련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잘 만들어주는 것 같다. 베테랑들 역시 지난해 비록 실패는 했지만, 괜히 힘이 들어가서 올해 만회하려고 하기보다 운동장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방법만 생각하고 있다. 그게 지금 한화의 분위기다."
-'엄지 척' 세리머니는 마음에 드나. "주로 안타를 치고 나서 하는 동작인데, 나는 타자가 아니라서 자주 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세이브하고 난 뒤에는 그것보다 더 큰 액션을 보여줘야 할 것 같다. (웃음) 지난해 다른 팀 세리머니들을 보면, 어떤 동작인가를 떠나 (단체 세리머니를 시도하는) 시도와 분위기 자체가 좋아 보였다. 우리 팀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