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움 증권이 서울 히어로즈 야구단의 새 메인 스폰서가 됐을 때, 야구계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팀 컬러와 잘 어울리는 이름의 기업"이라고 했다.
거액의 프리에이전트(FA) 선수를 영입하는 대신 젊은 유망주를 잘 뽑고 잘 키워내는 히어로즈의 특성과 '키움'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기업 이름이 잘 맞아떨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심지어 프로 지도자 경력이 전무했던 초보 사령탑 장정석 감독마저 점점 좋은 모습으로 자리를 잡아 가자 "역시 히어로즈는 감독도 잘 키우는 구단"이라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우스개소리만은 아니었다. 장 감독이 염경엽 현 SK 감독의 후임으로 2017년 히어로즈 새 사령탑에 올랐을 때, 무명 감독의 성공을 점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이장석 전 대표이사가 선수단 운영에 관여하기 위해 '편한 사람'을 감독으로 앉혔다는 의혹이 일었고, '바지 감독'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따라다녔다.
장 감독은 그런 비판과 의심의 시선을 스스로의 노력과 발전으로 극복해냈다. 공부하고, 연구하고, 주변의 의견에 차분히 귀를 기울였다. 코칭스태프와 신중히 상의해 중요한 결정을 내렸고, 공적인 자리에서는 20대 초반 젊은 선수들까지 모두 '○○○ 선수'라는 존칭으로 언급하며 격식을 갖췄다.
그런 자세가 이번 포스트시즌에 빛을 발했다. 준플레이오프에서는 류중일 LG 감독, 플레이오프에서는 염경엽 SK 감독과 맞붙어 모두 이겼다. 그리고 승리한 뒤에는 "상대 감독님들의 운영을 보며 많이 배웠다"고 했다. 비록 한국시리즈에서는 두산에 4패로 무릎을 꿇었지만,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싸웠다. 야구계 사람들은 '감독 장정석'의 미래를 본 포스트시즌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오직 키움 수뇌부의 판단만 달랐다. 하송 신임 대표가 취임한 키움은 "재계약은 확정적이고 몸값이 관건"이라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장 감독과 재계약하지 않았다. 대신 염 감독과 함께 일하던 손혁 SK 투수코치를 지난 4일 새 감독으로 앉혔다.
손 신임 감독은 어느 팀이든 감독감으로 한 번쯤 고려해볼 만한 인물이다. 문제는 손 코치의 감독 자질이 아니라 장 감독에 대한 키움의 태도다. 장 감독은 임기 3년 중 두 시즌 동안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고, 마지막 시즌에는 한국시리즈 무대까지 밟았다. 그러나 구단은 "새출발을 하겠다"며 장 감독을 내보냈다. 구체적으로 '새출발'의 의미를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최근 발각된 이장석 전 대표이사의 '옥중 경영' 논란을 떨쳐버리겠다는 암시로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박준상 전 대표이사와 임 모 전 고문변호사는 이 대표의 지시에 따라 팀을 운영한 사실이 적발돼 팀을 떠났다. 임은주 부사장은 그 사태를 고발하려다 도리어 직무 정지를 당했다. 그러나 이들과 장 감독은 경우가 달라도 많이 다르다. 박 전 대표와 임 변호사는 분명히 징계를 받아야 할 잘못을 저지른 반면, 장 감독은 오히려 어수선했던 구단 분위기에 동요하지 않고 선수단을 좋은 성적으로 이끌었다.
물론 이 전 대표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은 히어로즈 구단의 오랜 숙원이자 과제다. 그러나 애초에 히어로즈는 이장석이라는 인물이 구축하고 일궈 온 팀이다. 이 전 대표와 관련 있는 사람을 모두 몰아낼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옥석을 골라 바르게 구단을 끌어가는 것이 새 수뇌부가 해야 할 일이다.
이 전 대표가 뽑은 감독이 능력 부족으로 비난을 받았다면 해임하는 게 마땅하지만, 결과로 실력을 보여준 인물을 '이장석이 뽑았다'라는 이유로 무조건 배척하는 것도 구단의 발전 방향과는 어긋난다. 오히려 지난 1년간 허민 이사회 의장과 하송 감사위원장이 경영 감시 체제를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고 직무유기를 해온 셈이다.
올 시즌 초 야구계에는 "허 의장이 손혁 코치를 무척 마음에 들어한다. 내심 차기 감독으로 마음에 두고 있는 눈치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허 의장이 구단 경영 감시자가 아니라 구단주 역할을 욕심내기 시작했다는 얘기였다. 시즌 후반에도 역시 "허 의장이 '이제 히어로즈도 유명한 감독과 함께할 때가 됐다'는 뜻을 내비쳤다"며 "장 감독의 재계약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뒷얘기가 무성했다. 그러나 키움이 포스트시즌에서 좋은 경기를 펼치고 한국시리즈까지 오르자 "장 감독을 내보내고 싶어도 더 이상 명분이 없다"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었다.
여기에 김치현 키움 단장은 한국시리즈 종료 후 복수의 언론에 "장 감독과 세부적인 얘기는 나누지 않았지만, 시즌을 치르면서 충분히 능력을 입증하셨다"며 "재계약은 긍정적이다. 감독님과 고위층 미팅도 이미 잡혀 있고, 가능한 한 빨리 재계약을 마치는 게 목표"라고 단언까지 했다. 장 감독의 재계약이 더 기정사실로 보였던 이유다.
그러나 키움은 이 전 대표의 옥중 경영 정황이 세상에 드러나자 오히려 이 점을 감독 교체의 명분으로 역이용하는 '영리한' 수를 썼다. "새로 출발해야 한다"는 짧은 한 줄의 설명만으로 3년간 성과를 거둔 감독을 단숨에 내쳤다. 동시에 손 코치를 감독으로 부르면서 시즌 초반의 루머가 뜬소문만은 아니었음을 입증했다.
과연 '이장석이 뽑은 감독'을 내보내는 것은 새로운 히어로즈의 시작을 의미할까. 그렇다면 이 전 대표가 직접 신인 드래프트에 참석해 선발한 선수들과 직접 진두지휘해 트레이드 해온 선수들은 어떤 카테고리로 분류해야 할까. 세간에 공개된 박 전 대표와 임 변호사의 녹취록에 의해 이 전 대표는 영구 실격 이후인 올 시즌에도 구단 운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확인됐다. 어디까지가 '이장석의 사람'이고 어디까지가 아닌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구단의 새로운 수뇌부 역시 이장석 전 대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들이라는 게 문제다. 지난해 말 키움을 퇴사했다가 3개월 만에 단장으로 파격 선임돼 돌아온 김치현 단장은 물론이고, 허민 의장과 하송 신임 대표도 사실상 이 전 대표가 직접 선택한 사람들이다. 이 대표와 계속 소통해 온 박준상 전 대표는 허 의장 영입 당시 "직접 삼고초려해 모셔왔다"고 자랑스러워했고, 하 대표는 허 의장과 오랜 시간 함께 일해 온 오른팔이다. '옥중 인사권 행사'의 일부인 그들 역시 '이장석의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다.
결국 수뇌부 권력 다툼의 한복판에서 입지가 좁아진 장 감독은 3년간 온 힘을 쏟아 팀을 이끌고도 참담한 방식으로 지휘봉을 내려 놓았다. 장 감독은 새 감독이 발표된 지난 4일 밝은 표정으로 구단 사무실에 나타났다가 하 대표와 면담을 한 뒤 어두운 표정으로 짐을 모두 챙겨 야구장을 떠났다는 후문이다. "재계약이 긍정적"이라는 김 단장의 입장이 보도되면서 희망과 확신을 품었을 테지만, 구단의 응답은 기대와 정반대였다. 키움은 이제 단장의 공식 코멘트조차 신뢰할 수 없는 팀이 됐다. 이뿐만 아니다. 장 감독의 뒤를 잇는 손혁 감독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을 안긴 모양새다. "당장의 우승에 연연하지 말고 팀을 명문 구단으로 만들어 달라"는 당부를 하면서 계약기간은 2년밖에 보장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새 감독이 된 허문회 롯데 감독과 허삼영 삼성 감독은 모두 계약기간이 3년이다. 키움은 2년 총액 6억원이라는 '조촐한' 대우를 한 뒤 "우리 팀을 이미 잘 아는 분이라 적응기간이 짧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선문답식 설명을 내놨다. 심지어 대구에서 허 삼성 감독의 취임 기자간담회가 한창인 시간에 보도자료를 발표해 동업자 정신마저 망각하는 초보적 실수까지 저질렀다. 장 감독의 재계약 불발과 손 감독의 선임. 잇따라 전해진 이 두 소식은 모두 1년간 조금씩 팀을 장악해 온 새 수뇌부의 권력이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올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장석의 그림자'는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고, 키움은 계속 길을 잃은 채 헤매고 있다.
히어로즈의 진짜 '새출발'은 언제쯤 가능해질까. KBO 상벌위원회가 모든 법적·규약적 가능성을 치밀하게 고려해 신중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다. KBO 총재에게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두산 선수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일보다 더 중요한 책무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