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人] '뷰티 학계 선구자' 김주덕 교수, "K뷰티 르네상스? 정부 지원과 투자·규제 완화 필요해"
등록2019.03.18 07:00
한국 화장품 업계는 K팝과 드라마 인기를 타고 최근 수년 사이 급성장을 이뤘다. K뷰티의 '르네상스' '전성기'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화장품이 '돈이 된다' '수출이 잘된다'는 소문이 돌면서 K뷰티 시장에 뛰어든 기업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하지만 충분한 준비 없이 화장품 업계에 발을 들이면서 부작용도 늘었다.
김주덕 성신여자대학교 뷰티산업학과 교수는 한국 화장품과 뷰티 분야를 대학 내 학문으로 안착한 선구자로 꼽힌다. 정부는 화장품을 '사치품'이라며 거리를 두고, 국내 학계는 '미용'이라며 손사래 칠 때 가장 먼저 학문적 정립을 시작했다. 지난 수십 년간 '대학교에서 어떻게 화장품을 가르치나' '남자가 왜 화장품을 연구하는가'라는 선입견과 싸웠던 김 교수는 이제 글로벌 4위까지 도약한 한국 화장품 산업의 저변 확대에 큰 힘을 보탠 인물로 자리 잡았다.
본지가 지난 13일 성울 강북구 미아동에 위치한 성신여대 운정캠퍼스에서 김 교수를 만나 K뷰티의 현재와 미래를 짚었다. 잘못된 일에는 단호했고, 잘된 부분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K뷰티와 화장품 산업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묻어났다.
- K뷰티 바람이 글로벌 전역에 불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문화 산업과 밀접하다. 1990년대 후반 중국·대만·홍콩 등지로 수출된 한국 드라마와 K팝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드라마 여주인공이 아름답고 피부도 깨끗하게 나오자 '한국인들은 화장품을 뭘 쓸까. 어떤 기법을 쓸까' 궁금해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한국 화장품 붐으로 연결됐다. 현재도 중화권과 아시아권에서 K뷰티 인기가 상당하다. 최근에는 미국과 페루 등에서도 한국 화장품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 K뷰티만의 강점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다. 품질에 비해 가격이 우수하다. 2000년대 초 '미샤'가 론칭하면서 브랜드 숍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기존에는 화장품 브랜드가 공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공장 대신 유통망을 확보한 브랜드 숍이 늘어나면서 제조자개발생산(ODM)과 주문자위탁생산(OEM) 방식이 발전했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원가를 유지하면서 준수한 제품이 대량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 준수한 기술력을 담보하기 쉽지 않은데. "ODM과 OEM사로 LG생활건강이나 아모레퍼시픽, 국내외 굴지 화장품 연구소에서 배출된 인재가 흘러 들어가면서 기술력도 높아졌다. K뷰티 제품의 '상향 평준화'도 ODM과 OEM 성장과 함께 벌어진 현상이다. 큰 회사든 작은 회사든 제품력이 비슷한 것이다. 상표만 갈아 붙이는 OEM과 달리 ODM은 나름의 연구 개발도 한다."
- 화장품 업계에 뛰어드는 사업자도 늘어나고 있다. "2017년 기준 화장품제조판매업자가 1만여 개, 제조업자가 2500여 개 이상이다. 언론 등을 통해 화장품 수출이 잘되고 성장한다고 하니까 너도나도 뛰어든다. 진입 장벽도 낮다. 아이디어만 갖고 ODM과 OEM사로 가면 며칠 안 돼 완제품을 준다. 이들을 통하면 아이디어가 없어도 제품을 손에 쥘 수 있다. 제약·바이오 기업은 물론이고 증권사·의료기·정수기·전자까지 뷰티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모두 화장품 산업에 들어온다. 립 제품이나 색조 하나만 갖고 있는 '마이크로 브랜드'도 부쩍 증가했다. 겉으로 보기에 쉬워 보이는 것이다."
- 그만큼 내실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ODM과 OEM사로 진입 장벽 자체가 낮은 것은 문제가 아니다. 화장품 산업의 활성화 측면에서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 하지만 너무 쉽게 생각하고 화장품 분야에 들어서면서 실패 비율도 높아진다. 시장에 대한 충분한 고찰·연구·개발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과정을 건너뛰는 것이다. 최근 '스킨푸드' 등 브랜드 숍이 줄줄이 무너지고 있다."
- 소수의 ODM·OEM사의 성장이 산업계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겠다. "국내에 ODM과 OEM사가 535여 개다. 그런데 이 중에서 잘되는 곳은 흔히 말하는 '빅3' 정도다. 브랜드 숫자는 수천여 개인데 이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공장은 몇 개라고 생각해 보자. 결국 비슷한 컨셉트의 제품이 시중에 넘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다양한 기술을 적용해 제품을 만들려고 노력해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더 문제는 현재의 제조 업체 명기 방식이다."
(화장품 브랜드 숍 상당수가 적자로 돌아섰지만, 국내 '간판' ODM사의 매출은 매년 사상 최대치를 돌파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ODM 업계 '대장주'인 한국 콜마는 2018년 연간 매출이 전년 대비 68.1% 늘어난 1조3814억원,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23.1% 늘어난 825억원으로 추정된다. 코스맥스도 2018년 연 매출 1조2550억원, 영업이익 570억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42%, 62.3% 증가해 연 매출 1조원을 돌파할 전망이다. 올해는 두 회사 모두 연간 매출액이 1조5000억원을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 제조 업체 명기란. "우리나라는 화장품 용기 뒤에 제조 업체를 쓴다. 가령 A 브랜드의 아이크림인데 뒷면에 제조사는 한국 콜마라고 적는 식이다. 전 세계에서 의무적으로 제조 업체명을 쓰는 국가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외국은 책임회사나 판매회사를 쓰고 있다. 명품 화장품이 많은 프랑스역시 각 제품 뒤에 의무적으로 제조 업체명을 쓰지 않는다. 우리의 수출 주력국이자 경쟁국인 중국 화장품 회사는 특정 K뷰티 제품이 좋다고 느끼면 그걸 들고 제조 회사로 달려가 '비슷한 카피 제품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ODM·OEM사는 다르게 만든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결국 제품이 비슷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몇 개 공장이 수천여 개의 브랜드를 다룬다고 생각해 보라."
- 상도의에 벗어나지 않나. "그렇다. 결국 K뷰티 산업을 저해한다. 중국의 화장품 산업과 기술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굴지의 중국 기업이 깊은 노하우와 기술력을 습득한 한국 화장품 기업 연구원들을 뽑아 간 지 오래다. 중국이 한국 기술을 앞지르는 날도 머지않았다. 현재의 승자독식 구조가 단단해지고 카피 상품이 늘어날수록 한국 화장품 산업은 함께 무너진다."
(업계에 따르면 중국 2위 화장품 업체인 잘라의 브랜드 자연당은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아모레퍼시픽 계열사 대표를 지낸 인물을 최고경영자(CEO)로 영입했고, 연구소장과 마케팅총괄 등도 아모레퍼시픽 출신으로 채웠다)
- 사실상 중국 화장품인데 무늬만 한국 제품인 것도 많겠다. "중국 회사고 브랜드지만 연구소는 경기도 등 국내에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OEM·ODM사가 한국에 있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K뷰티 이미지를 덧씌울 수 있다. 과거 중국의 한 화장품 회사가 마스크 팩을 출시했는데, '미백' 기능을 넣겠다면서 표백제를 사용해 문제가 생겼다. 이후 중국인들도 자국 제품에 대한 신뢰도가 높지 않다. 하지만 한국에서 만들어졌고, 한국 ODM·OEM사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메이드 인 코리아'인 것이다."
- K뷰티의 '르네상스'를 지속하려면 현 상태에 멈춰선 안 될 것 같다. "앞서 말했던 제조 업체 명기 방식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극소수의 OEM·ODM사가 지배하는 한국 화장품 산업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정부는 각종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 단적인 예로 '화장품·표시광고 실증제'가 있다. 광고할 때 효과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하라는 것인데, 아직 규모가 작은 뷰티 업계에서는 버거운 부분이 있다. 제품이 인체에 무해하고 문제가 없다면 광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화장품·표시광고 실증제는 화장품영업자 스스로 본인이 표시·광고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타당한 자료를 갖춰 입증하는 제도다. 화장품법 제13조 14조에 따라 화장품 제조업자·제조판매업자 또는 판매자는 시험 및 조사 결과 등 과학적 방법을 사용해 자신이 표시·광고한 내용을 실증해야 한다)
- 최근 중소벤처기업부가 K뷰티 등을 육성하기 위해 나름의 자구안을 마련했다. "부족하다. 학자로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 내 화장품 기업의 고위 관계자들을 자주 만난다. 한 기업인은 "이제 K뷰티가 베이징이나 상하이 등 대도시에서 경쟁할 것이 아니라 중소 도시를 공략해야 한다"고 지적하더라. 문제는 중소 도시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점이다. 이들 도시의 유통망·화장품 사업 환경·인기 품목 등 마케팅 분야를 총망라한 자료가 전무하다. 정부가 이런 연구를 수행해 자료를 제공한다면 우리 화장품 중소기업들의 해외 진출도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 한국은 세계 4위의 화장품 수출 국가다. 향후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022년까지 2~3위를 목표로 잡고 있다.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지원책이 마련돼야 지속할 수 있다. 한국은 산업 부존 자원이 적은 나라다. 바이오와 나노 기술의 저변이 잘 닦여 있기 때문에 화장품은 우리나라의 미래 먹거리로 가장 좋은 산업이 될 수 있다. 인력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과 대학원을 늘리고,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을 위한 정부의 지원이 요구된다."
- 화장품과 뷰티를 대학 내 학문으로 안착시킨 1세대 학자로 꼽힌다.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은데. "과거 우리 정부는 화장품을 '사치품'으로 분류하고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다. 학계도 마찬가지다. 화장품학과를 만들려고 하는데 내부 반대로 무산된 적이 많다.(웃음) 화학이나 생물학·약학을 다루는 학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미용을 다루는 과를 어떻게 만들 수 있냐'며 반대하더라. 웃지 못할 선입견이 참 많은 분야다. '남자가 왜 화장품학을 하냐'는 식의 말도 들어 봤다. 참고로 나는 해병대 출신이다.(웃음) 최근 수년 사이 K뷰티가 급성장하면서 이런 편견도 상당히 사라졌다."
서지영 기자 seo.jiyeong@jtbc.co.kr/사진=정시종 기자
▶김주덕 교수는?
성균관대학교에서 화학공학과 학사·석사·박사를 마쳤다. 이후 LG생활건강 연구원을 거친 뒤 경북과학대학교에서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숙명여자대학교 원격대학원 향장미용전공 주임교수를 맡으며 15년 동안 제자를 양성했다. 2015년 성신여자대학교 융합디자인예술대학원 부원장에 임명됐고, 뷰티산업학과 학과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 화장품 산업화와 발전을 연구한 1세대 학자로 업계 발전을 위해 정부와는 물론이고 업계 전반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다. 현재 식품의약품안전처 화장품 부분 정책 자문위원·기술표준원 산업표준 심의위원(정밀학 분과 위원장)·한국산업인력공단 NCS 개발 심의위원·환경부통합 환경관리 기술자급반 위원·한국화장품미용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